이해할 수 없는 일들 2

2018.12.29 15:42

어디로갈까 조회 수:1436

한 해가 저무는 시점이어선지 확실히 난데없는 전화들이 늘어납니다.
새벽 네시, 전화벨 소리가 잠을 깨웠어요. 서른 번쯤 울릴 때까지 저는 벨 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매번 벨이 울릴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고 무의식 중에 믿고 있었던 것 같아요.
통신수단이 휴대폰으로 바뀐 후론 어느 시간에 전화벨이 울리더라도 불안, 불만 따위는 갖지 않게 됐어요. 
그렇다 해도 벨 소리는 기본적으로 무례하죠.
'누군가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구둣발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는 듯한 소리'라고 표현한 작가도 있었던 것처럼.

발신자는 광주의 S였어요. 언제나 그렇듯, 가라앉은 목소리에 용건 없는 전화였습니다.
"(대뜸) 난 니가 스쳐가는 작은 시골역에 불과하지?"
-(멍~)..... 그다지 작진 않아.
"다행이다."
- 근데 무슨 말이야?
"니 삶에서 나는 간신히 기억될 만한 존재일 거란 생각이 들어서... 시골역이 흔히 그렇잖아."
-(실소)

대학 졸업을 반 년 앞두고 그가 돌연히 자퇴하고 수사생활을 시작했을 때, 저는 비로소 '소명'이란 단어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됐어요.
모태 카톨릭 신자이지만 십대부터 냉담하며 살던 친구였는데 반 년 동안 회오리 같은 사건을 겪고 나서 결연히 접어든 길이었죠.
스페인에서 봉사와 명상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와 그가 명동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던 날, 태어나 처음으로 타인의 삶을 두고 질투의 감정을 느껴봤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된 지 이제 2 년, 그는 다시 제 근심을 버는 위치로 범속해지고 말았어요.

십사 년 전 처음 대면하던 날, 학교 인문관 뒷숲에서 우리는 나란히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의 친구와 제 친구가 혼약식을 한 날이었고, 증인겸 하객으로 그와 나, 단 두 사람이 인문관 뒷숲으로 초대되었던 거였어요.
볕이 강하고 맑은 봄날이었죠. 커다란 벚꽃나무 아래에서 넷이 어깨를 다정히 대고 사진을 찍으면서도 그 좋은 날 아무도 웃지를 않았더군요.
그래도 사진 속 정경이 자연스럽고 따뜻해서, 우리의 관계는 편안한  틀에서 시작되었구나 사진을 볼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곤 합니다.

더없이 좋은 친구였어요. 선천적으로 알콜이 안 맞는 체질임에도 언제나 무람없는 술동무가 되어주었죠. 알뛰세와 가브리엘 마르셀 같은 머리 아픈 책도 같이 읽었고, 화랑 순례며 민가협 교도소 면회질에도 가장 많이, 말없이 동행해주었어요.
얼굴도 마음도 사고방식도 거의 무구한 자연에 가까운 사람이었으므로, 그 시절엔 제가 S를 향해 세상에 대한 분노를 먼지 털 듯 털어댔죠.
이젠 제가 듣고 그가 말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떠안은 기쁨, 슬픔, 환멸, 절망 같은 것들에 대해서.  
외국 노동자들을 상대로 수많은 영성 상담을 해주고 있는 그이지만, 그도 또한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절실한 것일 테죠.

이상한 일이 아니라 인간적이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그가 의식하든 못하든, 들어주며 어루만져 주는 자의 외로움이란 것이 있을 테니까요. 
살아갈수록 절대로 허용될 수 없는 관계의 구도란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호수 위를 지나는 새의 그림자처럼 젖지 않고, 마당에 쓸리고 있는 나무 그림자처럼 먼지가 일지 않는, 그런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날들이에요. 자아가 형성되고 타자를 의식하게 된 무렵부터 내내 해온 생각인 것 같기도 합니다.

덧: S를 생각하면 언제나 루오의 선이 굵고 간결하며 맑은 그림이 떠올라요. http://www.millercreation.com/gallery/image/655054586
그리고 스피노자의 이 말도.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sunt.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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