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넘기 몇시간 전

2019.04.21 17:01

어디로갈까 조회 수:1056

몇 시간 후면 스페인 국경을 넘어 모로코 탕헤르에 닿게 됩니다. 이곳에선 짧은 이동일 뿐이지만 제게 그곳은 낯선 바람이 부는 전혀 모르는 다른 세계인 거죠. 두 팔을 10시 10분의 시계처럼 펼치고 무엇이든 와도 좋다, 다 감당해주겠다,고 외치고 싶습니다. (근데 뭣 때문인지 어제부터 물만 마셔도 토기가 있고 자꾸 눕고 싶은 상태인 게 함정. - -;)
데이빗 린치의 <Wild at Heart>이었던가요?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소리를 크게 확대해서 들려준 영화가 있었죠. 지금 제 마음이 타는 소리가 바로 그런 것 같습니다. 불붙어 타오르고 또 타오르는데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그 소리.

위축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여보지만, 타이트한 일정을 생각하면 미리 피곤하고 긴장이 돼요.
조직 속에서 저는 부분이고 객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밟으면 쉽게 무너질 개미집 속에도 한 생애와 큰 세상이 있 듯, 일개 부자유한 구성원인 제 속에도 온갖 생각들이 명멸합니다. 개미에게 개미집만이 전부는 아닌 거죠. 하찮게 작은 개미에게도 하늘은 사람의 하늘만큼, 아틀라스 산정 위의 하늘만큼 넓은 거죠. 그래서 자꾸만 불이 붙고 또 타들어요. 무엇이? 마음이, 의지가, 계획이, 시간이.

휴대폰에 넣어온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 2번 선율 속에서 잠들었다가, 일어나서는 쇼팽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듣고 있어요. 헤겔적이고 sophisticated된 브람스의 세계가 밀려가고, 물방울 같은 투명한 음향, 속도, 진동이 귓속에/마음에 가득찹니다. 이곡을 들으며 눈물을 흘린 적이 있노라 고백하시던 은사님이 생각나네요. 제게 미셸 세르를 소개해 주셨던 분이죠. 완결된 체계는 닫혀 있어도 그 아름다움이 세상을 물들인다는 걸 가르쳐주셨어요.

"그는 물을 부어버린다. 물방울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역진 불가능한 시간들. 
말하자면 물방울의 낙하 시간과 추위로 인한 결빙 시간의 단조로운 계산. 
회귀는 일어나지 않는다. 유일한 희망은 물방울 하나 또는 여러 개가 떨어지지 않고 남아 있으리라는 것이다. 

앎은 기쁨과 눈물 곁에 있다. 나는 미슐레를 비웃는다. 그러나 정오까지만 비웃는다. 
왜냐하면, 고백컨대 나는 부분도함수를 포함하는 방정식에 마음이 동요되었으며, 
그때 나는 조수의 리듬을 계산하기에 앞서 진동하는 하나의 현이었기 때문이다." - Michel Serres

마음속으로 복창합니다.
'나는 조수의 리듬을 계산하기에 앞서, 진동하는 하나의 현이다.'

덧: 모닝 커피 마시러 내려갔다가(꽤 멀쩡한 상태였음.) 로비에서 갑자기 다리가 풀려 폭삭 주저앉는 모양새 구기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근데 빛의 속도로 "누나 괜찮아요?"라는 한국말과 함께 앳된 동양 남자 얼굴과 손이 제 눈앞으로 쑥 들어오는 게 아니겠어요?
당황스럽고, 의아하고, 고맙고... 현실감이 없었는데, 급 자태 수습하며 일어나 알아보니 체험학습 나온 한국 고딩 2 소년이었어요.
요즘 고등학교는 학기 중에도 그런 명목으로 해외여행이 가능한가 봅니다.

어떻게 한눈에 내가 한국인인 줄 알아봤냐고 물었더니 싱긋 웃으며 답하더군요.
"뭔가 한국 여성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합창 같은 표정을 갖고 계셨어요." 
해석하기 어려운 이 한마디가 꽤 오래 제 뇌리에 꽂혀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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