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희 - 「대도시의 사랑법」중

2019.09.16 14:05

Sonny 조회 수:678

멋지고 화려한 공간, 일생일대의 축제, 생애 제일 이뻐보일 사람들, 샹들리에 아래에서 틀림없이 즐거워야 할 이 사교의 현장에 왜 "결혼식"이라는 간판이 붙으면 세상 지겹고 뻔한 시간낭비가 될까요.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펑펑 쏟아요. 대부분은 부모님 앞에서 울죠. 그런데 쌩뚱맞게 친구가 눈물 한 바가지를 쏟기도 합니다. 들여다보면 전혀 쌩뚱맞지 않을 정도의 각별함이 서려있는 눈물들이에요.

친구 재희의 결혼식에서 아직 울기 전, 영은 재희와의 첫만남을 떠올립니다. 아무하고나 취기섞인 키스에 열심이던 어느 밤 재희와 영은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재희가 영과 키스를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영이 언 놈이랑 정신없이 물고빨고 할 때 재희가 그걸 목격하면서 둘 사이의 작은 비밀이 생겼다는 거죠. 그걸 계기로 두 사람은 시시콜콜 이야기를 하다가 같이 살기 시작합니다. 각자 좋아하는 남자 이야기를 떠들고, 누가 토하면 남은 사람이 욕하면서 그걸 닦아주고.

"그 새끼 자지는 컸는데." 어떤 남자도 마음고생시키는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못합니다. 좀 번듯하거나, 비전 없는 자아도취 쌩얼간이거나. 영과 재희의 입방아에서 이들은 그냥 인간 딜도로 오르내릴 뿐인데 그게 그렇게 못되고 웃겨요. 물론 좋은 "자지"도 있어요. 그럴 때 이들은 비로서 사람 아니면 남자로 승급됩니다. 뒤집어보면 먹을 것도 없는 그 고추밭에서, 가장 위태로운 순간을 나누는 사람은 영과 재희 서로 둘뿐이에요. X같은 놈들과 X도 아닌 놈들이 부리는 행패에서 영과 재희만이 서로 구해주니까요.

이 두 사람이 좀 부럽기도 해요. 제 입으로 자기가 문란하다고 하지만, 인스턴트로나마 빨리빨리 연애하고 섹스하고 헤어지고. 진정한 사랑 같은 거 믿지 않으면 외로움의 공백은 어찌됐든 메워놓는 게 좋잖아요. 얼마나 개차반이고 양아치든간에. 술 들어가면 아무리 시시한 인간이어도 옆에 좀 있었으면 좋겠고. 그 찰나의 성욕이 해소되고 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서 챙겨주는 다정한 사람이 있는 게 이 둘이죠. 걱정하고, 질투 안하고, 투닥대고, 못난 남자친구 감별해주고. 육체적 외로움이 해소되고 나면 정신적 외로움을 이 둘이 나란히 메꿔주는 듯한 기분도 들었어요. 영과 재희의 털털하고 다정한 관계는 커녕, 쌍놈들과 하룻밤 보내는 것도 없이 그냥 외로운 저같은 인간들에겐 좀 호사스럽게 보이기도 했어요.

이 둘이 오만 남자를 만나고 헤어지고 드러운 꼴 다 보면서 살길래 저조차도 잠깐 "평생 친구"의 판타지에 속았어요. 좀 믿고 싶었죠. 그랗지만 현실은 그렇게 자기 뜻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으니까요. 재희는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안정적인 남자와 진득하게 연애를 하고, 결혼을 선언하고...

재희의 결혼식에서 영은 질질 짭니다. 속사정을 모르는 인간들이야 왠 궁상이냐고 웃지만, 그럴만 하잖아요. 서로 비밀을 다 알고 그렇게 챙겨주던 사람들이었는데. 룸메이트로 살았던 이들의 룸은 이제 영 혼자서 덩그러니 놓여 독차지하게 됩니다. 어쩐지 그래요. 재희가 사다놓던 냉동 블루베리도 이제는 다 떨어졌고.

이쯤하면 자기연민이 튀어나올 법도 한데, 영은 그런 생각을 별로 안합니다. 멍 때리고, 그냥 곱씹어요. 그 난리소동을 다 겪은 친구의 빈 자리까지 다 차지하고 누워서. 그러니까 읽는 저도 감히 동정을 못했습니다. 뭐 어쩌라고. 그냥 그렇게 친구들 결혼하면 보기 힘들어지고 그런 거지 뭐...

대도시의 사랑법에 실린 첫 이야기에요. 그런데 사랑은 이야기할 틈도 없어 각종 진상과 못난 남자들 이야기로 페이지가 다 채워졌어요.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대도시의 사랑법은 사랑 그런 거 포기하고 살란 말일까요. 아니 그럼 팍팍해서 어떻게 살라고. 대도시에서 개똥같은 사랑 대충대충 하며 살려면 우정법부터 익혀야 할지도요. 남들이 보면 사랑이라고 오해하기 충분한, 그립고 애틋하고, 차갑고 파랗게 얼어서 서걱서걱 달달하던 재희와의 시간이야말로 대도시의 제멋대로인 인간들이 버텨나갈 수 있던 마음 속 쿠션 같은 건 아니었는지. 이상하게 영영 작별인 거 같은데 그런 건 또 아니고 그리워할 필요 없는데 괜히 지난 시간이 아름답고. 대도시의 우정과 사랑은 결혼식장에서 다 쫑난다니까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68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813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318
123343 프레임드 #447 [2] Lunagazer 2023.06.01 104
123342 배우 제인 폰다 "佛 클레망 감독이 베드신 찍기 전 동침 요구" [10] ND 2023.06.01 1054
123341 XBOX 혹은 디아블로4 진상 고객 되기 정보 [1] skelington 2023.06.01 248
123340 오늘 일 마치면 버호벤의 <사랑을 위한 죽음>+라멜라 [6] daviddain 2023.06.01 283
123339 이 와중에 아무도 관심없을 전기차 구입 이야기-soboo님에게 감사 [4] 애니하우 2023.06.01 563
123338 진짜루... 왜냐하면 2023.06.01 212
123337 오발령과 비사격 [2] Sonny 2023.06.01 575
123336 십수년만의 콘서트 관람 - 백예린 ‘SQUARE' [3] skelington 2023.06.01 344
123335 머라이어 캐리 Fantasy(1995) [1] catgotmy 2023.06.01 169
123334 유월 시작을 분노로. [8] thoma 2023.06.01 504
123333 연극 [벚꽃동산]을 보고 왔습니다 [4] Sonny 2023.06.01 247
123332 모기장 칠 때가 됐네요 [1] 가끔영화 2023.06.01 135
123331 [웨이브바낭] 척 노리스 영화를 처음으로 각잡고 봤습니다. '델타 포스' [6] 로이배티 2023.05.31 357
123330 프레임드 #446 [4] Lunagazer 2023.05.31 103
123329 [인어공주](2023) 보고 왔습니다 [5] Sonny 2023.05.31 790
123328 [인어공주](1989) 봤습니다 [2] Sonny 2023.05.31 386
123327 근황 [6] 칼리토 2023.05.31 474
123326 2010년대의 미국 대중음악 [2] catgotmy 2023.05.31 253
123325 북한에 대해 [5] catgotmy 2023.05.31 413
123324 오랜만에 안반가운 위급재난문자 [10] 예상수 2023.05.31 742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