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했다고 생각한 날이 있었습니다.

취준생이었고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1년전 잘 다니던 회사에서 지인의 추천을 받아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하고, 사내 정치질로 인해 권고사직을 당했던 시기였습니다. 

사람에 대한 배신, 커리어에 대한 절망으로 멘붕이 오고 난 후 정신이 수습되는데에만 두달쯤 걸렸어요.

큰 문제없이 5년여를 같은 업계에서 경력을 쌓으며 잘 해내고 있던 자존감은 바닥을 쳐 버렸습니다.


백수가 된 지 네달이 지나가는 시점이었죠. 실업급여도 끝나가고. 나는 포트폴리오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너무나 길지만 포트폴리오를 그 회사때문에 날렸어요.(고 말하고싶은.)

정확히 말하자면 그 회사에 간 첫날, 바로 전날 이직전의 회사에서 잘 사용하던 외장하드를 연결하는 순간 뻑나버렸죠.

복구도 안되는 상황. 하여간 여러모로 나는 노력해야만 했어요.


그런 와중에 남자친구와 사소한 다툼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가지 얘기가 오고갔고 결국에 나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그냥 나는 "망했어~ 내 인생은 끝났어" 흑흑흑.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남자친구는 갑자기 웃으며 천천히 내 환경에 따른 나의 심리상태와 기분등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의 입에서 나오는 내 기분과 감정들을 수화기 너머로 듣자니 묘한감정이 들었지요.

남자친구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내 불안함과 나아질 노력을 하지 않는 무기력한 내 자신이 보이면서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그도 나같은 시기를 겪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나와 함께 하고 있을 때도, 함께이지 않았을때도 어떤형식으로든 불안함과 무기력함을 느껴보았을 거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막무가내로 망했다며 엉엉 울던 나와는 달리 차근히 설명해주며 괜찮다고 말해주는 그 모습에 더 내가 부끄러워서 눈물이 더 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퉁퉁부은 눈으로 장을 봤습니다.

마트에 그저 우유를 사러 갔을 뿐이었는데 세일하는 찜용 소갈비가 자꾸만 눈에 아른아른.

집에 들어와 뒹굴뒹굴 거리며 고민을 하다가 결국 사와서는 빨리 재료를 손질하기 시작합니다.

혼자서 먹을거니까, 아니 어쩌면 내일 주말이니까 남자친구와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고기 2키로정도.

그리고 당근하나, 감자하나, 밤 열알남짓, 청홍피망 한개씩, 대파 한뿌리.  


찬물에 고기를 한번 헹구고 다시깨끗한 찬물에 고기를 담가 한시간쯤 두어 핏물을 빼 줍니다. 

왠지 손을 더 대고싶어 근막주위에 칼집을 드문드문 내 주기도 하고

겉면에 붙은 별거아닌 기름들을 하나하나 뜯어내 빠알간 고기로 만들어 둡니다.

감자를 씻어서 숭덩숭덩 썰고 당근한개를 일곱토막쯤 내서 표면에 칼집을 내 꽃모양을 내 줍니다. 문득 낯선 내 자신을 보는것 같습니다.

잔재주를 부리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 이상하다. 나는 투박한 음식을 아주 좋은 접시에 담는걸 좋아하는데...?' 이렇게 모양을 내서 음식에 넣는것은 생전 처음입니다.

피망도 씨와 꼭지를 떼고 썩썩 썰어 준비하고요 대파는 잘 다듬어 어슷썰기로 한입크기 만하게, 그리고 뿌리에 흙이 없도록 잘 헹궈줍니다.


이제 요리를 위한 준비가 끝난 것입니다. 이렇게 손이 많이가는 음식을 한다는건 나름 삶에대한 보람을 줍니다..

뭔가를 그럴듯 하게 해 냈다는 뿌듯함. 그걸 요리를 하며 아주 많이 받게됩니다. 직업선택을 잘못했나 싶은생각도 살풋. (사실 엄청많이.)


물을 팔팔 끓이고 아까 준비한 대파뿌리와 고기를 넣어서 기름기가 우러나오면 한번 헹궈줍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갈비'찜'을 할 차례입니다.

이제부터는 매우 간단하지요. 앞에 준비한 재료들, 그리고 양념장을 넣고 중불에서 천천히 끓이며 졸여주면 그만입니다.

딱딱한 재료는 처음에, 그리고 아삭한 식감이 살아야 할 채소는 뭉근하게 졸아든 뒤 넣어 10분만 끓여 뒤적여 줍니다.


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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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입 베어물면 부드러운 고기가 녹듯이 퍼지고 자잘하게 찢어지는 고기를 씹어 삼킬때 소고기의 기름과 어우러진 양념이 미소를 띄게 합니다.

마치 내가 고독한 미식가 선생인듯 뭐라뭐라 속으로 읊조리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노랗게 졸여진 밤, 촉촉한 야채들이 고기국물을 머금고 달큰하게 혀에 다가오면, 아뜨거! 하더라도 앙앙씹어 꿀떡 넘기는 맛도 좋습니다.

기름이 자작하고 파와 마늘 피망등이 녹아들어 녹진녹진한 양념은 따끈한 쌀밥에 얹어 스튜를 먹듯 한입 하면 모든 미각이 만족됩니다.  


이렇게 하나를 하는데도 서너시간은 훌쩍 지나는 복잡하다면 복잡하고 손이 많이가는 요리 갈비찜.

그만큼 호사스럽고 고급스러운 음식입니다.


오늘 이렇게 갑자기 생각치도 않았던 갈비찜을 하게 된 이유가 뭘까 갸우뚱 해 봅니다.

내 무의식은 나한테 호사스럽고 고급스러운 무언가를 느끼게 해 주고 싶었던 걸까요?

갑자기 고기가 눈에 띄였던 것도, 손이 많이가는 정성스런 음식을 먹고싶었던 것도. 무의식이 다 시킨것일까요.

포트폴리오도 준비하지 않고있는 게으르고 무기력한 삶에서 서너시간을 들여 앞 뒤의 과정이 만만치만은 않은 이 요리를 한다는것은.

어제 망했다고 엉엉 울던 나에게 '하나도 안망했어, 이거봐 잘하잖아?' 라고 스스로가 하는 위로 같은 것일까요.

답을 알 수는 없지만 이 한접시가 나에게 주는 생각들은 무척 긍정적인 것 같습니다.


다들 갈비찜 해 드세요오오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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