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워즈 세계에서 명작과 망작이 있을지언정 호불호가 갈리고 논란의 중심에 선 작품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나오는군요. 


오랜만에 게시판이 영화로 뜨거워지는 걸 보니 반갑네요 :D 


'라스트 제다이'는 여러모로 기존 스타워즈와 결을 달리 하는 작품입니다. 거의 의도적이라 할만큼 기존 스타워즈 세계관의 클리셰들을 거부하고 있고, 전쟁을 그리는 시선은 '깨어난 포스'의 후속작이라기보다 외전이었던 '로그 원 : 스타워즈 스토리'의 후속작처럼 느껴져요. 스노크 황제 대 레이 & 카일로의 싸움이라든지, 카일로와 루크의 대결 등 당연히 제다이 vs 시스의 라이트 세이버 검투 & 포스 대결이 펼쳐져야 할 장면에선 의도적으로 이를 피해버리고, 언제나 성공해왔던 무모한 소규모 침투작전은 실패로 끝나 오히려 저항군을 더욱 위기에 몰아넣으며, 소형 전함과 X-윙 파이터 몇 대만으로 제국군의 최종병기를 농락하던 반란군은 압도적인 전력차 앞에 별다른 반격조차 못해본 채 학살당하면서 그저 최후의 발악을 몇 차례 보여줄 뿐입니다. 광산 행성에서 벌이는 최후의 정면돌격조차 적에게 어떠한 유의미한 피해도 입히지 못한 채 그나마 남아있던 파일럿들만 소모하는 것으로 끝나죠. 완전무결한 인물은 없고, 죽음은 무게를 가지며, 모든 인물들은 차가운 현실의 벽과 마주한 채 선택의 기로에 내몰립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오히려 반란군의 대의는 더욱 빛납니다. 더 이상 나이브한 이상이 아니라 눈보라치는 황야에 홀로 남겨진 채, 작은 승리 몇 차례를 거두지만 오히려 더욱 벼랑 끝에 몰려가는 처절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지켜야 하는 희망의 불씨죠. 이런 면에서 '라스트 제다이'는 스타워즈 역사상 가장 입체적인 작품이자 최고의 작품입니다. 


...다만, 이게 스타워즈와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어요. '라스트 제다이'의 정신적 전작인 '로그 원'은 제다이와 스카이워커 가문 이야기에서 완전히 탈피하며 이제 어른이 된 스타워즈 팬들의 눈높이에 맞춘 작품이었고, 팬덤의 반응도 무척 호의적이었습니다. 왜냐면 '로그 원'은 외전이었거든요. 물론 레아 공주님과 '그분'이 나오긴 합니다만, 이건 거의 팬서비스 차원이었죠. '로그 원'의 세계는 본편과 떨어져있으며 '로그 원'의 주인공들은 본편에서 조연이나 엑스트라 정도에 머무를 무명들입니다. 덕분에 이전의 어떤 작품에서도 보여주지 못했던 스타워즈 세계관의 어두운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기존의 캐릭터들을 전혀 건드리지 않을 수 있었죠. ...그런데 '라스트 제다이'는 아니잖아요. 스타워즈 본편의 세계고 새로운 3부작의 핵심적인 허리 역할을 담당하는 작품입니다. 7편에서 퇴장한 한 솔로 빼면 기존의 인물들도 모두 나오고요. 그런데 새 인물들 뿐 아니라 기존 인물들까지 캐릭터를 바꿔놨으니 올드 팬덤이 반발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스타워즈의 본편 세계는 명확한 선악의 구별 아래 전형적인 영웅탄생설화, 가족주의, 사무라이 활극, 서부극이 버무려진 세계입니다. 이야기는 아임 유어 파더 빼면 40년전 기준으로도 전혀 참신하지 않았어요. 지극히 통속적이고 전형적인 이야기죠.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남녀노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 전형성과 통속성이야말로 스타워즈가 신화화된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라스트 제다이'는 이 스타워즈의 클리셰와 유산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있죠. '라스트 제다이'의 인물들은 스타워즈의 그 어느 작품속 인물들보다도 합리적이고 입체적이지만, 별로 스타워즈스럽진 않습니다. 캐릭터의 깊이를 얻은 대신, 그 얄팍함마저 매력으로 승화시키던 스타워즈 특유의 아우라를 잃었어요. 이런 면에서 '라스트 제다이'는 스타워즈 역사상 최악의 작품입니다. 


차라리 8편이 아니라 3부작의 마지막편 9편이 이런 분위기로 나왔다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이 들어요. 장장 40여년을 이어온 장대한 사가의 마지막 작품이 그 동안의 유산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며 끝나는 거죠. 아마 그랬다면 논란이 더욱 커지며 화끈한 불판이 깔리고, 스타워즈는 새롭게 불타오르며 더욱 활력을 얻었을텐데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53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80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308
123316 점심시간을 빌려, 한달만에 잠깐 쓰고 갑니다:비뚤어진 어른들 [4] 예상수 2023.05.30 465
123315 ‘다음 소희’ 없도록…경기도의회, 현장실습생 안전보장조례 입법예고 [1] 왜냐하면 2023.05.30 183
123314 버호벤의 <캐티 티펠>/안데르센/<늑대의 혈족> daviddain 2023.05.30 178
123313 [웨이브바낭] 세상의 모든 영화 감독 지망생들에게 바칩니다 '달은... 해가 꾸는 꿈' [18] 로이배티 2023.05.29 626
123312 Yesterday, Ditto, I am, DibloVI,지브리스튜디오 애니 그리고 수영 [4] soboo 2023.05.29 282
123311 '큐어' 짧은 잡담 [11] thoma 2023.05.29 429
123310 외로우니까 좋네요 [6] catgotmy 2023.05.29 411
123309 누구일까요? [5] 왜냐하면 2023.05.29 208
123308 뻔뻔한 유베/레비/컨퍼런스 리그 [2] daviddain 2023.05.29 135
123307 프레임드 #444 [4] Lunagazer 2023.05.29 83
123306 가장 기억에 남는 죽음씬은 무엇인가요? [12] 말러 2023.05.29 528
123305 인어공주 박스오피스 [4] theforce 2023.05.29 554
123304 인어공주... [5] 메피스토 2023.05.29 730
123303 [웨이브바낭] '연기'를 하는 장 클로드 반담이 궁금하십니까. 'JCVD' 잡담 [3] 로이배티 2023.05.29 279
123302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견종 [1] catgotmy 2023.05.28 211
123301 네덜란드 어 배우고 싶을 때+<포스맨> 잡담 [6] daviddain 2023.05.28 255
123300 프레임드 #443 [4] Lunagazer 2023.05.28 98
123299 [바낭] 후... 나는 나 자신을 넘어섰다... 극장에서 졸지 않고 본 영화 [4] 스누피커피 2023.05.28 419
123298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때려치면서 [2] catgotmy 2023.05.28 243
123297 도르트문트는 너무 멍청해 우승 못 한다는 정치인 말이 진실일까요 [1] daviddain 2023.05.27 18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