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18 17:17
독일 드레스덴의 마이센 도자기 박물관에 전시된 양파꽃 문양의 테이블 식기 세트
유럽 도자기의 시작이 동아시아의 백자에서부터 유래했다는 것 아십니까? 그것도 청화백자에서 말입니다. 오늘날 화려하고 세련된 유럽의 도자기들을 보다 보면 이들의 기원이 동아시아에서 시작됐다는 것이 믿기어지지 않을 만큼 낯설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유럽 도자기가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모습을 갖고 있다는 얘기도 되겠지요. 다만 한 가지 이색적인 것은, 전통적으로 도자 문화가 발달한 동아시아의 미술문화에서는 도자기의 역사가 당당한 한 축을 차지하고 있습니다만, 서양의 미술문화에서는 전혀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서양의 미술문화에서는 ‘공예’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낮습니다. 동아시아 미술사에서 회화, 조각, 건축, 공예 이렇게 네 분야의 장르가 있다면, 그리고 분명히 도자사가 중심이 되는 공예사가 미술의 주요 장르로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서양의 미술사에서 ‘공예’장르는 아예 실종된 상황이나 다름이 없다는 사실만 살펴봐도 뭔가 이색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서구인들은 실제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그릇 – 음식과 음료를 담아 마시는 물건 – 에 까지 예술적 의미 부여를 할 필요까지는 못 느꼈던 듯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릇이란, 실용적인 물건일 뿐 인간의 정신세계를 담아내는 어떤 미학의 주형으로까지는 인식되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이죠. 아마도 이러한 태도가 서양미술사에서 공예장르의 실종을 가져온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사실 이 뿐만이 아닌 것이, 17세기부터 유럽에 설립되기 시작한 미술아카데미만 해도 교육 과정에는 회화, 조각, 건축만 있을 뿐 공예 과정이 없었습니다. 공예 분야는 별도로 장식미술학교를 설립하여 기술교육을 하고 있었을 뿐이죠. 서양인들에게 있어서 이른바 도자 – 공예란, 예술이라기보다는 기술의 한 측면으로만 이해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양파꽃 문양의 마이센 접시(기본형)
그렇다면 이들 서양인들은 언제부터 도자기(그릇과 타일)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일까요? 특히 중국 도자기(백자)에 말입니다. 사실 고대 그리스 때부터 도자기를 사용하긴 했기 때문에 서양인들에게도 도자기의 존재가 그리 낯선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고대 이후 중세부터 서양인들은 평범한 질그릇의 사용과 함께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주로 금이나 은으로 된 그릇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의 주제가 되는 도자기 열풍은 르네상스를 지나고서도 한참 이후에 일어난 것이었던 겁니다.
도자기는 크게 세 단계로 나뉩니다. 토기와 도기 그리고 자기이지요. 이 세 단계의 분류는 소성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데, 가볍고 단단한 정도에 따라 이와 같이 분류합니다. 가장 무겁고 두꺼운 두께의 토기와 그 중간 단계인 도기 그리고 가장 가볍고 단단한 자기. 특히 이 자기는 바로 도자의 완성된 단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가벼우면 잘 깨지고 그래서 두껍다면 단단하겠지만 무거운. 이같은 당연한 물리법칙을 거스르는 ‘가볍고 단단한’ 경질 도자 백자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도자문화의 완성품으로 불립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가장 흔한 도자기가 바로 이 도자의 가장 완성된 단계인 ‘백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유럽 – 특히 독일의 작센에서 처음으로 이 백자를 스스로 만들어 내면서(1710년) 오늘날 유럽 백자의 기원인 ‘쯔벨무스터( zwiebelmuster양파꽃 문양)’의 전설이 시작되기도 하는 것이죠. 독일인을 비롯한 서양인들은 지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 내내 백자 만드는 기술을 알기 위해 엄청난 사투를 벌였습니다. 이는 당시 최고의 백자 만드는 기술을 가졌던 중국의 청조가 백자 기술의 유출을 엄금한 탓도 있지만 서양의 상류층 전반에서 불었던 중국식 백자에 대한 열정도 있었던 것입니다. 현재 우리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이들 도자기들이 아마도 처음부터 그렇게 당연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면, 문득 드는 생각은, 그렇다면 대체 언제부터 서양인들은 도자기에 – 그러니까 중국의 백자와 일본의 백자까지 - 이렇게 열광하게 되었을까요?
여러가지 모양의 마이센 접시들(1900 년경 다른 독일 제조업체가 생산한 파란 양파꽃 문양의 테이블 도자기 세트)
서양인들에게도 물론 그들 나름대로의 토기와 도기 문화는 있었습니다. 일상생활의 물그릇부터 우유단지와 올리브 단지에 이르기까지 일찍부터 다양한 토기와 도기를 사용해 왔죠. 그런 그들에게 마침내 도자기, 그것도 백자 세트가 일률적으로 필요한 문화의 단계에 들어왔던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였습니다. 18세기는 유럽 문화사에 있어서 ‘로코코’시대라고 불리는 아주 독특한 시기였습니다. 이전의 르네상스나 바로크적인 이상주의, 혹은 웅장한 미술 사조는 아니었지만 로코코의 시대는 특히 장식미술이 발달했던 시기로 문화 전반에 걸쳐 우아함과 사치스러움이 절정에 달했었고,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여성의 시대’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는 시절이기도 합니다. 이 ‘여성의 시대’라는 표현에는 비단 로코코라는 미술 양식 자체가 웅장하고 남성적인 바로크에 비해 섬세하고 부드러운 여성적 분위기가 있다는 뜻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그래도 이런 뜻으로 많이 쓰이기도 합니다만) 왜냐하면 로코코 시대 자체가 문화적으로는 여성들의 영향이 실제적으로 커지는 시대였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절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각국에는 ‘살롱 문화’라는 것이 크게 유행했는데, 살롱이란, 이 당시의 귀족이나 부르주아 계층 같은 상류 사회의 사람들이 일정 기간을 두고 모임을 가지면서 다과를 즐기며 철학과 사상을 논하는 모임 문화를 말합니다. 일종의 상류층 사교 문화인데, 이 시절에는 상류 계층의 사람들 중 주로 귀부인들이 중심이 되어 모임을 형성했고 이 귀부인들이 자신의 저택에 모임 사람들을 초대하여 책읽기 모임을 하거나 실내악 연주를 듣거나 하면서 학문과 사상을 논하는, 예술과 철학을 탐구하는 지성의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이런 지적인 모임의 자리는 여성들에게 뜻밖의 기회를 제공했는데, 바로 지속적인 독서와 함께 다른 이들과의 토론의 기회가 주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모임을 위해 책을 계속 읽을 기회가 주어진 귀부인들과 부르주아 여성들은 단순히 모임의 중재자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모임 주도자가 되어 갔습니다. 책읽기를 통해 단련한 논리와 언변으로 남성들과 토론 중 상대 남성을 지력으로 제압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실질적인 모임을 이끄는 주역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 중에는 스스로 책을 쓰는 작가가 되기도 하는 등 살롱 자체가 모임을 주도하는 여성들에게 명사로서 성장할 기회를 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실로 ‘여성의 시대’라는 말이 나올법한 분위기가 조성된 측면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에서 무엇보다도 모임 장소가 되는 살롱이 이들 여성들의 저택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모임을 준비하는 귀부인들로서는 손님을 대접할 식기 세트에 무엇보다도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유럽인들 앞에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중국 – 청의 도자기였습니다.
15세기 경 명나라 청화백자(작가 미상, 1403~1424, 지름 41cm 높이 7cm, 대영박물관 소장
시누아즈리(chinoiserie)란, 중국풍이라는 프랑스 어로, 이 당시 불던 중국식 유행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살롱 문화의 발달과 함께 유럽에서 도자기 세트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자 당시 동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의 도자기를 생산하던 중국의 도자기가 순식간에 이들 서양 상류층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사실 그동안 유럽인들에게 도기란 올리브 오일을 담는 투박한 항아리나 우유를 담는 질박한 단지에 다름 아닌 것이었습니다만 이제는 저 멀리 바다 건너 중국의 하얀 도자기들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유럽 상류층의 고급 식기란 금그릇과 은그릇이 도맡아왔지만 이제는 그 몫이 중국산 도자기 – 청화백자가 도맡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살롱 문화의 발달과 함께 지난 시절 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동방항로의 개척으로 유럽 땅에는 낯선 지역의 기호 식품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열대 지방에서 자라는 작물들인 차, 커피, 설탕 그리고 카카오였지요.(카카오는 정제에 따라 코코아와 초콜렛으로 나뉩니다.) 문제는 서양 사람들이 이러한 기호 식품에 엄청난 열광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고, 그런데 딱하게도 이런 작물들은 유럽 땅에서는 결코 재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죠.(그렇기 때문에 서양 열강들의 식민지 개척 작업이 이 시기부터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더 탄력을 받기 시작합니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두 대륙은 실로 커피와 설탕 때문에 절단이 났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올 정도) 이 시기, 18세기 살롱 문화의 발달과 함께 도입되기 시작한 차와 커피같은 기호 식품의 발달은 손님을 접대하고 함께 근사한 간식거리를 찾고 있던 살롱의 주인들에게는 더 할 수 없는 최상의 기호식품이 되었고, 이들을 담을 그릇 세트들은 더할 나위없는 매혹적인 아이템들이 되었지요.
마이센의 경질백자 화병, 1735년 작, 파리 장식미술박물관 소장
문제는 당시에 이들 서양인들의 그릇 만드는 기술이 경질의 가볍고 단단한 백자를 만들 수 있는 수준이 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자기 만드는 기술 수준은 아직은 투박한 단지나 질그릇 정도였기 때문에 저 멀리 바다 건너 들어온 중국(청)의 백자 – 청화백자 - 와는 전혀 비교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청화백자는 명품이었고 유럽인들의 그릇들은 단순한 일상 용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지요.(물론 금그릇이나 은그릇 같은 충분히 고급스런 식기 세트들이 있었지만 이는 살롱의 손님 접대에 걸맞는 차나 커피를 담을 식기로서는 그닥 어울리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주 오랫동안 최상의 도자기를 만들어왔던 중국 도자기들이 유럽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그 가볍고 단단함 그리고 순백의 하얀색에 은은한 푸른색의 꽃과 식물 문양은 단순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오랫동안 질리지 않는 매력을 선사했는데, 이 시기 서양인들의 요란하고 장식적인 로코코와도 썩 잘 어울리며 숱한 도자기 애호가들이 생겨났지요. 이 때문에 유럽의 왕공귀족들을 비롯한 부르주아의 상류층 문화에서는 중국풍의 일대 유행이 생겨납니다. 웬만큼 산다는 집들은 중국 도자기 세트를 한 벌씩 갖추는 것이 유행이 되었고, 왕공귀족들은 결혼이나 생일같은 경조사 혹은 국가간의 국혼이나 국빈 방문시 중국의 도자기를 선물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될 정도로 크게 유행했습니다.
이런 분위기하에서 ‘도자기는 돈이 된다’는 생각을 누구나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백자의 하얀색을 가리켜 ‘하얀 황금’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죠. 이런 상황이니 너도 나도 나서서 백자를 만들고자 하는 나라들이 있었던 것은 당연했죠. 그러나 문제는 가볍고 단단한 경질의 백자를 만든다는 것은 보통의 기술로는 되는 일이 아니었고, 그 기술을 선점하고 있는 중국 – 청 정부는 도자기 기술을 독점하기 위해 기술 유출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곳까지 가서 도자기 만드는 기술을 배워 온다는 것도 상상만 해도 엄청난 일이긴 합니다만. 게다가 도자기라는 것은 단순히 기술의 문제만이 아닌, 백자를 만들 수 있는 흙의 산지를 찾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침내 유럽 국가들 중의 하나가 백자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합니다.
바로 작센 공국의 마이센에 있는 공방에서였죠.(1710년) 요한 뵈트거(1682 ~ 1719)라는 전직 연금술사가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경질의 백색 도기를 만들어냈는데(1708년) 이후 수 차례 실험을 거듭하여 마침내 시장에 판매가 가능한 중국 도자기 수준의 경질 백자를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이후 마이센에 도자기 공장을 설립하여 본격적인 백자 제작에 착수하죠.(1710년) 이것이 바로 유럽 최초의 백자 생산 그리고 독일 도자기 마이센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중국의 백자를 ‘하얀 황금’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는 정말 재밌는 우연의 일치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백자가 워낙 고가의 상품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고가의 명품들을 유럽의 좀 산다는 사람들이 돈을 아끼지 않고 사들였기 때문에 그런 별명을 붙인 것이긴 합니다만, 실제로 유럽에서 최초로 자력 생산한 마이센 백자의 창조주가 실은 ‘연금술사’ 출신이니 말입니다.
마담 지오핀의 살롱에서 볼테르의 작품 읽기, 샤를 가브리엘 르모니에, 1812년 작, 캔버스에 유채, 프랑스 말메종 성 소장
Château de Cheverny, Loir-et-Cher, France - grand salon
Petit salon du château de Montrésor dans le département d'Indre-et-Loire en France.
살롱의 귀부인들, 미하일 문 카치, 1878년, 패널에 유채, 88.9cm☓116.8cm,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2018.02.18 18:48
2018.02.18 22:53
당시, 그러니까 18세기에 서양 각국에서 중국 도자기가 엄청 유행할 때 붙인 별명이랍니다. 백자가 워낙 금값이니 '하얀 황금'이라고요. 그런데 유럽에서 백자 처음 만든 사람 전직이 연금술사인건...무슨 논리적인 우연의 일치인지요 ㅎㅎ
살롱에 대한 연구들을 찾아보니, 학자들 사이에도 논란이 많더군요. 대혁명 당시 실질적인 공화국 이론의 토대 제공을 했다는 가장 과격한 주장부터, 그런것 까지는 아니고 주로 가쉽과 쉬운 교양수준의 이야기가 오가는 동네 사랑방이었다는 얘기까지 다양합니다. 짐작이 되시겠지만 전자는 주로 여성학자들이 주장하고 후자는 남성학자들이 주장하는 측면이 좀 있습니다. 딱한 얘기긴 한데, 저 시절 남자들이 여자들과 진짜로 학문과 정치와 그 모든 교양 수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논의했을까 의심하는 것이죠.
사실 그럴 수도 있고요. 어쩌면 남녀의 모임에서는 정치 이야기는 금기 사항이고 단순하게 문화교양에 대한 얘기만 나누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한 얘기긴 한데, 여성들은 여성들끼리 따로 모이고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따로 모여서 서로가 원하는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결론적으로, 여성들이 만일 진지하게 정치문제를 논하고 싶어했다면 자기들끼리 따로 모였을 거라는 얘깁니다. 저 시절 남자들이 여성들과 시사에 관해 진지하게 대화를 하려고 들었을것 같지가 않아서 말이죠. 무려 250년, 혹은 300년전 아닙니까...
2018.02.19 09:20
2018.02.19 10:00
2018.02.18 23:37
마이센 도자기는 좀 쌀까 한번 사볼까 왠걸 평민은 엄두도 못내게 무지하게 비싸군요.
저런 집에서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데 별 취향은 아닙니다.
2018.02.19 00:29
2018.02.18 23:38
관련해서 도자기라는 제목으로 이천년대 초반에 kbs에서 6부작으로 했던 다큐가 있어요. 음악은 양방언(따로 도자기 ost가 나온 적도 있습죠), 꽤 잘 만든 다큐니까 관심이 가는 분은 찾아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그리고 서양미술사가 주 전공이시라 빠뜨리신 것 같긴 합니다만, 당시 도자기 문화는 물론 중국이 종주국이긴 했지만 조선도 만만치 않은 기술(+원재료) 보유국이었습죠. 임란 때 남도 지역의 도공들이 무자비로 잡혀갔던 것도 다 기술을 갖지 못한 왜인들의 도자기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고, 그때 가져간 평범한 사발 같은 것들을 이도다완이니 뭐니 이름 붙여가며 숭상한 것도 결국 선진 기술에 대한 숭상이었다고 생각하면 꽤 복잡한 기분이 듭니다.
2018.02.19 00:48
사실 저도 그 임진왜란 사건을 본문에 서술했다가 논점 이탈인것 같아서 삭제했답니다. 말씀하신대로 동아시아의 도자 문화에 대해 얘기를 한다면 조선 백자에 대해서도 빼놓으면 안돼는데, 일본이 훔쳐간 조선 백자 기술이 독일 마이센에 전해지는 이야기까지 하려니까, 글이 너무 길어져서 말입니다. 그런데 님 말씀 듣고 보니 아무래도 그 임진왜란의 조선 사기장인들 사건을 서술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것만큼 백자 기술의 중요성을 얘기해주는 사건은 없을듯 합니다.
그런데 좀 씁쓸한 것은 한일관계에서 일어났던 일이 저 유럽 땅에서도 일어났다는 말이죠. 마이센에서 백자 만드는 기술을 고안해낸 요한 뵈트거가 세상을 떠난지(1719) 거의 20여년 정도 뒤, 프로이센이 작센을 침공합니다. 바로 프리드리히 대왕의 1차 슐레지엔 전쟁(1740~1742)때 일인데요. 대왕의 프로이센 군이 작센을 점령하고 젤 먼저 한 일이 뭔지 아십니까? 바로 마이센의 백자 장인들 잡아가는 일이었답니다.…-_-;
그런 뒤에 7년 전쟁으로 새로 점령한 슐레지엔 땅에(지금의 폴란드) 이들을 이주시켜 큰 도자기 공방을 세웠죠. 왜냐하면 하얀 황금을 만들게 하려고요.(이게 오늘날 폴란드 백자의 기원이랍니다) 임란 때 일본이나 7년 전쟁(1756~1763) 당시 프로이센이나…왜 이리 똑같은지요. 진짜 하얀 황금이네요.
하얀 황금이라는 표현 멋져요. 실제로 어디선가 쓰이는 말일지 궁금하네요.
저런 '살롱'이나 '귀족'들을 보면 영화나 문학작품에서 다소 과장된 격식이나 소위 '품격을 갖춘 대화' 같은 것들의 실체가 궁금합니다. 요즘은 너무 과장되어 전시되는 것 같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