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영화이고 런닝타임은 106분. 장르는 아트하우스 호러 정도 됩니다. 스포일러는 없겠구요.



 - 황량하고 신비로운 아이슬란드 풍광이 살짝 보이구요. 말떼가 달리는 모습이 보이고. 양이 가득한 축사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때 문득 어떤 기운(?) 내지는 존재 같은 게 축사에 들어오는 듯한 연출이 나오고는... 장면이 바뀝니다. 아주아주 외딴 집에서 단 둘이 양을 치며 사는 젊은 부부가 나와요. 이 사람들 일 하는 걸 이것저것 차례로 보여주다가 드디어 임신한 양들의 새끼를 받아줄 차례. 영차, 영차하고 아기양을 받아내다가 어떤 아기양을 받아내곤 둘 모두 굉장히 당황하는 표정을 짓습니다. 그러고는... 그 아기양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인간 아기인양 정성스레 키우기 시작합니다. 뭘까요. 이 양반들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 그 아기양의 정체가 사실 스포일러는 아니에요. 영화 소개글에 따라 그냥 밝혀버리는 글들도 있고, 또 런닝타임 30분이 조금 넘어가는 시점부터 그냥 대놓고 보여주고요. 결정적으로 그냥 딱 보면 아 그런 거겠군? 하고 눈치를 챌 수 있어요. 그만큼 뻔하거든요. 하지만... 뭐 일단 언급은 안 하기로 하구요. 뭐든 일단은 모르고 보는 게 더 재밌으니까요. ㅋㅋ



 - 기본적으로 느릿느릿, 여유로운 템포로 흘러가는 아트하우스 무비입니다. 왜 그런 영화들 있잖아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무언가를 평범한(?) 영화들보다 이유를 알 수 없게 길고 자세하게 보여주는 식으로 여백을 채워나가는 영화들이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무언가를 길고 자세하게 보여주고. 크게 중요하지 않은 무언가를 일부러 설명 없이 슬쩍 보여주고 넘겨서 사람 궁금하게 만들고. 정작 중요한 장면들은 대략 심플하고 빠르게 넘겨서 사람 더더욱 궁금하게 만드는. 그래서 본의 아니게 두뇌 풀가동을 하게 만들고, 스스로 의미를 찾아내고 분석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그런 영홥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는 사람은 그런 거 안 좋아하고 또 해 볼 능력도 안 되는 사람이지요. ㅋㅋㅋㅋ 



 - 암튼 그러한 영화의 스타일 덕에 이 영화의 '이야기'는 사실 런닝타임 대비 되게 간단합니다. 

 신비한 존재에 의해 신비로운 아기양이 태어났다. 한 부부가 그 아기양을 자식처럼 키운다. 그 과정에서 본인들을 위해 영 나쁜 짓을 저지른 부부는 그 대가로 막판에 큰 위기를 맞게 된다. 라는 거죠. 중간에 왔다 가는 손님 이야기가 꽤 길게 들어가긴 하지만 핵심은 그렇구요. 여기에서 정말 핵심만 추려내고 '뭐든 필요 이상으로 길게 보여주기'를 쳐내서 심플하게 만들면 최소 절반 이하로 줄이고도 거의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느릿한 전개와 여기저기 박혀 있는 의미심장한 디테일들 덕에 영화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혹은 관객들로 하여금 다양하게 해석하고 싶게 만드는 매력을 얻게 되고. 아마 이 영화에 쏟아졌던 호평은 그런 성격의 덕을 많이 봤을 겁니다.



 - 그러니까 이건 그냥 아일랜드의 요정(?) 이야기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실제로 그런 '요정의 아기' 설화들과 거의 비슷한 이야기 뼈대를 갖고 있기도 하구요. 혹은 기독교적 상징들을 찾아내서 각자가 아는 성서 지식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영화의 첫 장면이 크리스마스에 시작되기도 하는 데다가 하필 다른 동물도 아닌 양의 아기 이야기구요. 이 아기를 키우는 사람 이름이 또 하필 '마리아'에요. 크리스마스에 태어나진 않았지만 그 날 생긴 아기이고, 그걸 키우는 여자는 그 아기를 임신한 적이 없는 사람이구요. 등장 인물 중엔 '베드로'와 대략 철자가 비슷한 이름을 단 양반도 하나 나오네요.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니고 그냥 보편적인 인간 세상의 이야기로 해석해보려고 해도 어떻게든 갖다 붙일 수 있겠죠. 영화 속 주인공 부부의 행동을 피지배층의 소중한 것을 약탈하고 탄압하는 지배층의 모습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고, 그냥 자신들의 슬픈 사연으로 인해 잘못된 선택을 해버린 평범한 사람들이 그 실수로 인해 비극을 맞게 되는 이야기로 생각해도 됩니다. 심지어 그냥 보이는 그대로 인간과 동물의 관계 이야기로 생각해도 꽤 그럴싸하게 맞아들어가구요.


 어느 쪽으로 생각을 해도 그럴싸하지만, 어느 쪽을 선택해도 완벽하게 깔끔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어떻게 해석을 하든 꼭 여분의 디테일들이 미사용분으로 남거든요. 근데 뭐... 아마 이야기를 쓴 사람도 이런 걸 어느 정도 의도하지 않았을까 싶구요.



 - 하지만 이런 거 안 & 못 따지는 제게는 뭐 그리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구요. 제게 중요했던 건 그냥 아이슬란드라는 이 영화의 국적 그 자체였습니다.

 아마 아이슬란드에 관심이 많으시거나, 혹은 아이슬란드를 배경으로 하는 환타지물들을 보신 분들이라면 무슨 소린지 바로 이해가 가실 거에요. 이 나라의 자연 풍광은 정말로 기이하고 괴상합니다. 얼핏 보면 그냥 다른 영화들에도 흔하게 나오는 산이고 물이고 벌판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다른 느낌이 있어요. 글로 형용할 능력이 안 되니 그냥 흔한 표현으로 '언제 어디서 요정 같은 게 튀어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법한' 특유의 분위기가 있죠. 그래서 그런지 어쩌다 제가 최근에 본 아이슬란드 영상물 셋이 다 장르가 다크한 환타지 스릴러... ㅋㅋㅋ


 암튼 그렇게 어떤 일이 벌어져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아이슬란드의 풍광을 아주 잘 활용해서 그림을 만들어내는 영화입니다. 덕택에 별 일 없어도 계속 뭔가 불길하구요. 위험한 것 같구요. 막판 직전까지 거의 내내 평화롭기 그지 없는데도 뭔 사건이든 벌어질 것 같구요. 뭣보다 아무리 이상한 상황도 그냥 대략 납득하게 됩니다. 영화 특유의 아트하우스풍과도 썩 잘 어울리구요. 개인적으론 이런 풍광과 분위기가 절반 이상의 지분을 차지하는 영화라고 느꼈어요. 



 - 이렇게 떡밥 풀이 놀이를 포기해버리니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어 이만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굳이 장르를 엄격하게 따져 보자면 호러 맞아요. 하지만 클라이막스 전까지는 그냥 괴상하고 다크한 분위기의 드라마 정도의 느낌이니 본격 호러 장르 영화를 기대하는 분들은 피하시는 게 좋습니다. 느긋한 템포로 흘러가는 아트하우스풍 영화라는 것도 감안하셔야겠구요.

 저처럼 떡밥 풀이를 시원하게 포기해버리는 분들이라면 즐길 거리가 괴상하게 아름다운 '분위기' 하나만 남는 영화인 것인데요. 아이슬란드 파워!와 감독의 적절한 연출 덕에 그 분위기는 충분히 근사합니다. 그러니 유니크한 영화 좋아하시고 그냥 분위기 뜯어 먹는 영화 좋아하는 분들은 보셔도 좋을 거에요. 저도 그런 식으로 즐겁게 봤습니다.




 + 근데 누미 라파스는 스웨덴 사람이잖아요? 영어를 잘 해서 헐리웃이나 유럽 다른 나라들에서도 활동하지만 또 제가 최근에 본 이 분 영화는 노르웨이 영화였죠. 스웨덴에서 온 여자! 라고 설정이 붙어 있긴 했습니다만. 어쨌든 그러더니 이번엔 또 아이슬란드잖아요. 활동 반경이 좀 과하게 넓은 게 아닌가 싶어서 확인해보니 어렸을 적에 아이슬란드에서 꽤 오래 살았던 경험이 있는 분이었군요. 허허 그것 참 일감 구할 시장이 넓어서 좋겠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ㅋㅋ 기본적으로 연기도 잘 하니까요.

 그리고 왠지, 개인적으로 누미 라파스는 헐리웃을 벗어나서 연기할 때 훨씬 좋은 배우처럼 보이고 심지어 외모도 더 예뻐 보입니다. 이유는 모르겠구요.



 ++ 아. 그리고 이것도 A24 배급 영화입니다. '하이 컨셉' 호러의 명가답다는 생각과 함께, 얼마 전에 본 '스크림' 생각이 나서 괜히 웃기네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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