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주류 경제학이란 무엇인가?

 

0.1

 

주류 경제학에 대한 저의 정의는 이미 비교적 분명하게 제시한 바 있지만,

여기서 보다 명료화하여 다시 서술하겠습니다.

 

지난 20년간 4개의 경제학 학술지에 논문이 실린 사람들을 모아 놓고

A라는 텍스트에 대해 이것이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이 가르치고 연구하는 경제학의 규범에 부합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75% 이상이 예라고 하면 A는 주류 경제학 집합에 포함 (테스트 통과)

 

4개의 경제학 학술지는

American Economic Review,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 Econometrica

로 하며, 출간 기간이 20년이 넘지 않은 학술지가 있을 경우, 창간호부터 포함시키기로 함.

 

4개 중 3개는 Chiappori Levitt이 미시경제학에서 이론 논문과 실증 논문 간의 관계에 대해 조사하면서

꼽은 것들을 그대로 가져왔고, Econometrica는 제가 덧붙였는데, 대부분의 경제학 전공자들이 동의할 것입니다.

Chiappori Levitt의 글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pricetheory.uchicago.edu/levitt/Papers/ChiapporiLevitt2003.pdf

 

Oxford Cambridge 에서 출판하는 학술지나

아예 다른 학문적 지향을 갖는 학술지를 배제한 것에 대해 해명하겠습니다.

 

현재 주류/비주류, 국적, 하이에크주의/마르크스주의를 불문하고

경제학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 전체가

전체 학술지에 대해

어떤 학술지가 가장 좋은 학술지냐? 어떤 학술지에 당신의 논문이 출판되길 가장 원하느냐?

를 두고 투표를 해서 줄을 세웁니다.

, , , , , , ….

 

집합 1: , , , 라 기준 85% 로 테스트를 통과하는 텍스트의 집합

집합 2: , , , 라 기준 75%

집합 3: , , , 라 기준 65%

집합 4: , , , 마 기준 XX%

 

저의 정의가 집합 2이고

집합1 ⊂ 집합2 ⊂ 집합3 임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기준을 높이는 경우와 낮추는 경우 각각 그에 따르는 비용과 편익은 명확합니다.

집합 3을 사용할 경우 더 많은 입장들을(텍스트들을)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간의 정합성이랄까 이런 점이 떨어집니다.

이게 무슨 경제학이야, 이건 경제학이 아니야라는 소리가 늘어날 것입니다.

(나중에 이런 다툼의 사례를 소개하겠습니다.)

 

집합 4

() ~ ()의 거리와 XX에 의해

집합 1, 2, 3 중 어느 것 하나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XX=75로 고정하고 보겠습니다.

() ~ ()가 충분히 가까우면 집합 4는 집합 2, 저의 정의에 가깝습니다.

() ~ ()가 멀어질수록 집합 4는 집합 1에 가까워지다가 충분히 멀면 집합 1보다 더 작은 집합이 될 것입니다.

투표권을 가진 학자들의 이질성이 커질수록 테스트를 통과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시카고학파 경제학자들 20명과 맑스주의 경제학자들 20명에게 1 1표를 준 다음

75% 기준으로 테스트를 하면 주류 경제학의 외연은, 예를 들자면, 0이 되고

50% 기준으로 테스트를 하면 주류 경제학의 외연은 집합 2보다는 클 가능성이 많습니다.

각 집단 내 20명 사이에도 스펙트럼이 균일/균등 분포(uniform distribution)라고 가정하면,

50% 기준일 때는 대부분의 시카고 규범, 대부분의 맑스주의 규범, 그 중간 규범이 다 포함될 테니까요.

이 경우처럼, 75% 기준으로 집합의 외연이 0에 가까워진다면,

두 집단은 서로 다른 학문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 , , 4개 학술지가 절대 진리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주류라는 타이틀이나 경제학이라는 이름을 어느 쪽에 주든지 관계 없이

변함 없는 사실은 일련의 학자-학생들이 제가 정의한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의 해명이 왜 75%인가에 대한 해명을 포함하고 있지만 조금 더 부연하겠습니다.

텍스트A가 집합 2의 원소이나, 집합 1의 원소는 아니라면,

그것은 그것대로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명제 A에 대한 잘 나가는 경제학자들의 지지율은 75% ~ 85% 어디쯤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정도의 문제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정의를 내리고 시작해서 쓸모 있는 얘기가 진행되면 됩니다.

왜 가, , , 라 를 기준으로 하는가, 75%를 기준으로 하는가를 두고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학술지를 기준으로 하거나, 75를 높이거나 낮추었을 때,

더 쓸모 있는 얘기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적실한 근거들을 제시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은 저의 정의입니다. 처음부터 이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

저는 물론이고, 누구도 이것이 옳다는 것을 논증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세간티니님은 물론이고, 누구도 이것이 옳다는 것을 반증(反證)할 수도 없습니다.

논의를 위한 기능적인 정의입니다.

 

논증/반증이 불가능한 주장을 세 개 덧붙이겠습니다

("가능한"을 "불가능한"으로 수정했습니다. 한심한 실수였습니다.

다행히 바로 아래에 "입증-논증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를 반복했었네요. 

원래 제가 하고 싶었던 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에 대한 인정이었습니다.

제 주장 중에 논증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별해서 인지하고 쓰고 있습니다.)


1)     4개 저널에다 마, , 사에 해당하는 저널을 더해서 75% 테스트를 하여도 집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 , 사 는 Journal of Economic Perspectives, Journal of Economic Literature,

Journal of econometrics, Journal of macroeconomics 나 뭐 이런 비슷비슷한 학술지들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들 간의 순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런 데 신경 쓰지 않아도, 여러 과목의 교과서와 논문들을 꾸준히 읽으면

집합 2의 외연에 대해 분명한 감을 갖게 됩니다..

(집합 2의 외연과 그 원인을 알 것, 집합 2의 강력한 힘과 한계를 알 것,

이것이 주류 경제학을 잘 안다에 대한 저의 정의입니다.

경영학이나 철학을 전공하고도 이것을 충족하면 주류 경제학을 잘 아는 것이고

경제학을 전공하고도 이것을 충족하지 못 하면 주류 경제학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장하준과 관련해서는 경제사에 특화된 학술지에 대해서도 덧붙일 필요가 있겠습니다.

Journal of Economic History Cambridge 대학 출판부에서 출판한다고 나오는데

주류 경제사 학술지이며, , , , (, , )와 같은 규범을 갖고 있습니다.

집합 2의 외연은 유지됩니다.

2)     4개 또는 7개 저널을 기준으로 기준치를 65%~85%로 조금씩 바꾸면서 테스트를 해도

주류 경제학의 외연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집합 2의 외연은 안정적이고 견고합니다.

3)     4개 또는 7개 저널을 기준으로 장하준의 주요 텍스트([사다리 걷어차기], [나쁜 사마리아인들]

[23가지]) 50%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합니다.

25% 테스트도 통과하지 못할 가능성이 꽤 높습니다.

 

위 세 가지 주장에 대한 (확정적인) 입증-논증은 불가능합니다.

양쪽의 주장들을 듣고 더 그럴 듯한 얘기를 각자 취하면 됩니다.

이후 제가 쓰는 내용들이 제 주장의 신빙성/개연성을 뒷받침하겠지만 충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비교적 충분할 만큼 쓰려면 더 많은 내용을 써야 할 텐데, 저는 현재로서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다른 분들의 주류 경제학 이해가 빈약하다는 정도만 충분히 밝힐 계획입니다.)

그러니 검증되지 않은 주장 정도로 받아들여 주시고,

이에 대해서 저를 신뢰하지 못하는 분은 그냥 제 얘기를 무시하시면 됩니다.

1) 2) 는 별로 문제가 안 될 텐데,

3)에 대해서 강한 반감을 갖는 분은 제가 어떤 얘기를 해도 별로 안 믿으실 테니

제가 대화하고자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상대방에게 입증 책임을 떠 넘기겠습니다.

, 제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반론 근거가 제시되면,

댓글로든 별도의 글로든 저의 오류를 인정하겠습니다.

저의 논의에서는 사실 위 세 가지 주장이 필수불가결한 것도 아니고..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위 세 가지 주장 중 일부가 약간씩 틀렸다 하더라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내용들에 한정되기 때문에 그것은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적실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위 세 가지 사실을 부정하는 분은 대화상대로 고려하지 않습니다.

저도 그 분으로부터 기꺼이 무시당하겠습니다. 아이돌 팬보이로든, 엘프 코스프레로든.

제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75% 기준을 유지하면서 장하준이 테스트를 통과하려면,

, , , 카든 타, , 하든 무엇이든 다른 학술지를 기준으로 하여야 하며

이 경우, 결국 다른 규범에 의해서 규율되는 활동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하고자 하는 논의 목적에 따라 집합 2를 주류 경제학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다른 논의 목적에는 집합 1, 집합 3, 또는 집합 4, 5, 6이 부합할 수도 있습니다. 하세요.

두 논의 중 어떤 것이 더 좋은 논의라고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논의일 것입니다.

이 점에서 제가 저의 논의가 반드시 더 좋은 논의라는 인상을 전달했다면, 그것은 저의 불찰(잘못)입니다.

 

쓰고 보니 뻘짓이군요. 이것은 사실 과학철학의 표준 논의들을 대충 현실에 적용한 것입니다.

새로운 얘기는 전혀 아니고, 패러다임이니 뭐니 하는 얘기들이랑 비슷한 얘기입니다.

영양가 없는 태클에 대한 자기 방어 차원에서 정리한 뻘짓이긴 하지만

경제학에 관심 있는 다른 분들에게도 나름 유용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0.2

 

주류(mainstream)”라는 말에 대해 해명하겠습니다.

 

한국 언론 중 조중동이 주류입니까, 경향신문이 주류입니까?

경향신문이 주류입니까, 녹색평론이 주류입니까?

어떤 것이 주류라는 것은 그것이 비주류에 비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저는 녹색평론은 정기구독한 적이 있지만, 경향신문이나 조중동은 제 돈 주고 사서 본 적이 없습니다.

김종철 선생이나 녹색평론 독자들은 녹색평론이 주류라는 타이틀을 갖는 데 별로 관심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사례를 더 생각해 보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듀게에서 hubris, bankertrust, 저 중에 누가 주류입니까?

hubris님이 주류이고 저는 비주류입니다.

이것은 (주류에 대한 대부분의 정의를 기준으로) 그저 사실입니다.

장하준은 저의 정의를 기준으로 주류가 아닙니다. 이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장하준에 대해 듣보잡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사용할 생각이 없습니다.

장하준은 비주류이되 듣보잡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듀게에서 비주류이고 듣보잡입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제가 말한 바는 장하준이 주류가 아니며,

주류에서 진지한 반론의 대상으로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간티니님이 얘기하시는 듣보잡의 정의라면

제가 장하준은 듣보잡이라고 주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의를 기준으로 장하준이 듣보잡이 아니라 하더라도

제 주장의 다른 핵심들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반복이지만 저는 듣보잡을 세간티니님과 다르게 정의하기 때문에

장하준을 듣보잡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말한 적도 없습니다.

 

 

장하준을 저의 정의에 부합하는 주류에 편입시키려는 의도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편입시키려고 한 적 없다고 하시겠죠…)

장하준의 고유성을 순화하여 제가 말하는 주류들과 유사한 입장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장하준과 주류 모두에게 별로 득이 될 것이 없습니다.

 

대립된 입장의 두 학파가 어떤 역사적 분기점에서 만나 주류의 새로운 방향을 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 대립이 주류내의 대립이든, 주류와 비주류의 대립이든.

하지만 저는 현재 두 입장 간의 차이를 논의하고, 그 중 주류가 더 낫다는 요지의 논의를 하고자 했습니다.

나중에 만날 것이니까 지금의 차이에 대해서는 논의하면 안 된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서로 다른 경로를 걸어온 발걸음들이 정상에서 서로 만나서 합일하는 광경이 더 매력적

이라는 얘기는 뜬구름 잡는 얘기로 들립니다.

나중에 만날 지도 불확실한 마당에.

 

장하준이 비주류라는 말에 그토록 극렬히(?) 반대하며

적실하지도 않은 얘기들을 논거라고 제시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텍스트 해석이 후지기 때문일 텐데,

텍스트 해석이 후진 해석의 이유 중 하나가,

일단 주류가 비주류보다 좋은 것이라는, 별로 신통치 않은 믿음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제 논의를 반박하고 싶으면,

장하준은 비주류인데 주류보다 좋은 비주류다라는 논의를

적실한 근거와 함께 진행하는 것이 더 생산적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장하준이 주류인 근거를 제시하든지 말입니다.

 

 

0.21

 

주류에 대한 해명은 raven님의 문제제기 중 하나와 직접 관계됩니다.

 

raven님의 문제제기를 이 맥락에서 제 나름대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a 가 주류다라는 명제는 사실 명제로 분류할 수 있지만,

혹은, 사실/가치 구분 진영은 사실 명제로 분류하지만,

사실/가치의 명확한 구분 자체에 대해 의심하는 입장에 따르면

주류다라는 술어자체가 가치함축적인 술어이므로

그 용법에 주의해야 한다

는 취지로 이해됩니다.

(제가 잘못 재기술하였으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타당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암묵적) 가치함축에 대한 식별, 견제, 비판이

술어의 가치함축에 대한 철학적 고찰 없이도 가능하며, 실제로 비교적 잘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그 단계까지 가지 않고 해결될 문제면 그냥 일상 언중의 방식을 따라가는 것이 좋다는 입장입니다.

 

“A가 주류다가 어떤 부당한 당위로 이어지는 것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길은 여러 갈래입니다.

- 사실/가치 명제 구분을 전제하고

  “A가 주류다라는 사실 명제로부터 “A가 옳다또는 “A를 따라야 한다는 가치 명제가 도출되지 않는다는 고발,

자연주의의 오류 고발의 길이 있습니다.

- 사실/가치 명제 구분을 (부분적으로) 부정하고

그 구분의 한계 내지는 허구성을 주장하며 주류다라는 술어의 (은폐된) 가치함축에 대한 고발의 길이 있습니다.

 

저는 첫 번째에 가까운, 일상 언중의 방식을 따랐는데,

“A가 주류라는 게, 반드시 A가 더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케바케다.”라고

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일상어 용법에 호소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제 방식이 raven님의 방식보다 더 좋은지 여부는 논증/반증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더좋다는 것은 논의의 목적에 비추어 평가한 유용성의 관점입니다.

술어의 가치함축 일반에 관한 철학적 논의라면 raven님의 문제제기를 반드시 검토해야 할 것이고

주류경제학의 정의에 관한 논의라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냥 제 방식이 저한테 맞아서 사용할 뿐이고 제 방식이 더 좋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raven님의 반론 내용도 어느 정도 예상이 되고, 저도 더 자세히 할 얘기가 꽤 있지만

이것은 저의 핵심 논지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더 자세히 할 얘기 중 일부는 썼다가 글이 너무 길어져서

잘라냈기 때문에 필요하면 댓글에 추가할 수 있습니다.)

이 논의의 마지막쯤에나 아니면 자연주의의 오류에 관한 별도의 논의와 연결해서

더 살펴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하면,

이것은 정도의 문제, 즉 계량적인(quantitative) 문제, 크기에 관한 문제이므로

크기와 관련된 근거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A가 효율적이다라는 사실명제의 술어에 가치함축이 있다는 명제는

적어도 제게는 정보값이 0입니다. (다른 분에게는 새롭고 의미 있는 얘기일 수 있습니다.)

그 가치함축으로 인한 왜곡의 크기가 얼마인지

그리고 그 왜곡을 교정했을 때 구체적인 선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근거가 있어야

유의미한 정보입니다.

 

 

0.3

 

저의 주류 경제학정의의 범용성 내지 통용성에 대해 해명하겠습니다.

 

겨자님은 제게 유치산업보호론에 대해 공부하라며 Dani Rodrick의 논문을 링크하셨습니다.

바로 그 Dani Rodrick의 블로그입니다.

http://rodrik.typepad.com/

 

당사자가 “Unconventional” 이라고 대문에 밝히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자신이 25%에 속하는 (집합 2에 속하지 않는) 비주류라는 선언으로 이해합니다.

당연히, Dani Rodrick은 자신이 “conventional”한 주류들보다

적어도 본인이 지금 천착하고 있는 주제에 관해서는, 더 나은 시각을 갖고 있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류에서 통용되는 방법론으로 입증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겨자님의 (주요) 참고문헌인 Dani Rodrick

주류 경제학에 대한 저의 정의를 전제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겨자님과 세간티니님이 공히 언급하신 Samuelson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겨자님은 미국에서 가장 범용한 국제경영학교과서의 폴 사무엘슨 인용을 재인용(?)하셨고

세간티니님은 경제학의 본류인 폴 새뮤얼슨이라고 하는 등 여러 번 언급하셨고,

저는 세간티니님께 사뮤엘슨은 주류의 아버지라고 해도 될 것 같다고 대답한 바 있습니다.

(한국어 표기가 다 다르네요;;)

사뮤엘슨은 주류 경제학의 아버지 중 한 명이 맞습니다.

 

그의 논문입니다.

http://www.econ.jhu.edu/people/barnow/samuelson.pdf

위에서 언급한 마, , 사에 해당하는 학술지에 실린 논문입니다.

 

이 논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좀 더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주류라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논문 제목에서부터요.

 

그가 주류라고 부른 사람들입니다.

Alan Greenspan, Jagdish Bhagwati, Gregory Mankiw, Douglas Irwin and

economists John or Jane Doe spread widely throughout academia

 

그린스펀, 바그와티, 맨큐, 더글라스 어윈

그리고 학계에 널리 퍼져있는 경제학자 김모, 이모

 

더글라스 어윈의 장하준 서평은 제가 직접 소개하였고,

다른 3명은 매우 유명한 학자들입니다. (그 중 그린스펀은 연준 의장으로 유명. 학자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음)

거기에 더해 학계에 널리 퍼져있는 경제학자 김모, 이모를 묶어서 주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저의 용법과 완전히 일치하는 용법입니다.

(주류를 정의하는 방법도 저의 방법과 같고

이 정의가 사용된 맥락도 자유무역 옹호자들을 주류로 부른 것이므로

저의 맥락과 일치합니다.)

 

사실, 주류 경제학에 대한 저의 정의, 저의 용법은 너무 당연한 것인데...

이에 대해 설명이 필요하다는 사실부터가 그 후에 이어질 난관에 대해 예고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장하준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

겨자님이나 세간티니님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 것이라는 점을 거의 확실히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안 믿으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예상을 했기 때문에 정의부터 명시하고 시작한 것입니다.

누군가가 스티글리츠 얘기를 꺼낼 것도 100% 예상했습니다.

반론은 예상했지만 반론의 내용이 이렇게나 후지고 무례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불찰입니다.

제 정의의 범용성은 차차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므로 일단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다음 글에서 스티글리츠에 대해서 쓸 생각입니다.

 

 

0.31 주류 경제학의 상호 인용체계

 

겨자님의 텍스트에 대한 비판은 다음 글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개진할 예정이지만,

아래 기술할 내용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상호 인용체계를 강조했습니다. 주류 경제학을 그렇게 정의했습니다.

 

제가 현재까지 확인한 자료 중 주류 경제학 진영에서 장하준의 이름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자료는 4가지입니다.

 

a. 2003 9, 케네스 소콜로프, Economic Development In and Out of the Tropics

b. 2004 4, 더글라스 어윈의 [사다리 걷어차기] 서평

c. 2007 8, The Economist [나쁜 사마리아인들] 서평 http://www.economist.com/node/9719506

d. 2009 10, William Easterly [나쁜 사마리아인들] 서평

 http://www.nybooks.com/articles/archives/2009/oct/08/the-anarchy-of-success/

(전문 PDF: http://williameasterly.files.wordpress.com/2011/05/nyrb_theanarchyofsuccess_100809.pdf

이에 대한 장하준의 반론과 이스터리의 재반론도 NY REV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스터리 역시 소콜로프, 어윈처럼 강의계획서에서 이름을 발견할 수 있는 학자이며,

국역서도 한 권 출판되어 있으니 (특히 아프리카 개발에) 관심 있는 분은 참고하세요.)

 

저는 두 번째 글에서 b의 전문 번역을 올렸고,

향후, c, d 에 대해 소개할 계획임을 밝혔습니다. (c는 그때 이미 번역이 완료되어 있었습니다.)

 

위 네 자료는 모두 장하준의 작업을 부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저는 장하준이 이상한(awkward) 얘기를 많이 하기 때문에 주류 경제학자들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 때 이상한(awkward)”이라는 형용사는 c, The Economist 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a b 에서 인용되고, 다시 b d 에서 인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윌리엄 이스터리는 d 에서

장하준이 b 에서 XX를 배울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사뮤엘슨이 바그와티, 어윈을 주류 경제학자라고 분류했음을 확인했습니다.

바그와티, 어윈이 각각 집필한 자유무역 옹호론에 대한 The Economist의 서평 링크입니다.

 http://www.economist.com/node/975917

The Economist 가 두 사람에게 사용한 표현은 설득력 있다(persuasive), elegantly” 입니다.

(반면, 장하준에게 사용한 표현은

polemical, mischievous rhetorical set-pieces, awkward, shaky 입니다.

제가 뉘앙스를 조금이라도 과장할까봐 그대로 옮겼으니 영어 사용에 대해 양해 부탁드립니다.)

 

 

세간티니님의 댓글입니다.

 

이번 경제위기로 각광을 받은 라구람 라잔 교수나 누리엘 루비니 교수나 독자적인 수리모델이나 이론적 틀을 갖지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경제학자들로 동료 경제학자들에게 선정을 받았습니다. 장하준 교수가 (중략) 라구람 라잔 교수나 누리엘 루비니 교수만큼의 대중적 명성과 동료 학계의 신뢰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간티니님이 알고 인용하셨는지, 모르고 인용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위 선정은 The Economist 에 의해, 말하자면, 저의 참고문헌인 주류 경제학 신문에 의해,

제가 주류를 정의한 방식으로 얻은 결과입니다.

http://www.economist.com/node/18118985

라구람 라잔이 1, 케네스 로고프가 공동 2, 배리 아이켄그린, 누리엘 루비니가 공동 4위입니다.

저는 이미 케네스 로고프와 배리 아이켄그린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저의 참고문헌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입니다.

 

로고프와 라잔은 차례로 IMF의 수석 경제학자직을 수행하였습니다.

(로고프가 IMF에 있을 때 스티글리츠에게 보낸 공개 서한은 다음 다음 글에서 잠깐 살펴볼 예정입니다.)

지금 로고프는 하버드에 있고, 라잔은 시카고에 있습니다.

저는 독자적인 수리모델이나 이론적 틀을 얘기한 적이 없고, 상호 인용체계를 얘기했습니다.

순위에 이름이 없는 장하준에 대한 비판을

1위를 한 라잔의 예로 반박할 수 있다고 믿는 넌센스는 차치하고

라구람 라잔의 논지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하신 얘기인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자세한 논의는 생략하고 장하준과 어윈 간의 핵심 쟁점인 자유무역에 대한 입장만 확인해 보겠습니다.

 

http://blogs.wsj.com/economics/2011/02/10/rogoff-and-rajan-discuss-risks-of-currency-war/

 

흥미롭게도 로고프와 라잔이 Foreign Affairs 를 출판하는 CFR 주최 세미나에 함께 초대되어 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라잔은 … IMF가 유연한 환율 및 자유무역과 같은 좋은 정책의 편익을 강조하는, 보다 강력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장하준이나 그의 독자들이 라잔을 신자유주의 선전가라고 비난하기 딱 좋은 풍경 같습니다.

(라잔이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데에는 그의 책이

골드만 삭스-파이낸셜 타임즈에 의해 2010 올해의 비즈니스 도서로 선정된 덕택도 있죠.)

만약, “서양의 경제학자가 미국 이익 관점에서 얘기한 것이다또는

서양의 신자유주의 신문이 조중동식으로 왜곡 보도를 한 것이다와 같은

반론이 다시 나오면 저는 그냥 패스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저와 주류 경제학의 주요 참고문헌은 아닙니다.

적어도 The Economist와 같은 정도는 분명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위 보도가 로고프와 라잔의 입장을 잘 전달하고 있다고 봅니다.*)

 

위의 기사만 봐도 재정정책, 통화정책, 인플레이션 등과 관련하여

라잔-로고프의 입장이 장하준의 [23가지] 입장과 얼마나 다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만,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관심 있는 분은, 기사들, 로고프와 라잔의 책, 논문들을 참고하시면 될 텐데,

거시 정책 논쟁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글이 길어졌지만

크루그먼과 라잔, 크루그먼과 로고프 사이에 경제 위기 이후 미국의 재정/통화 정책에 관하여

상당한 논쟁이 있었다는 점은 언급해둘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라잔-로고프는 장기-준칙에 더 무게를 두고, 크루그먼은 단기-예외에 더 무게를 둔다고 유치하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것도 정도에 관한 문제입니다.

준칙에 대한 장하준의 입장은 라잔, 로고프, 크루그먼 모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장하준은 75%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고 셋은 통과할 것입니다.

재직 대학, 명성, 수상 경력, 국적 때문이 아니라 장하준의 얘기가 이상하기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1,2위다 보니, 라잔, 로고프 얘기를 쓸 데 없이 길게 한 감이 있는데,

저의 논점을 더 잘 보여주는 사례는 4위인 아이켄그린입니다.

 

제가 두 번째 글 마지막에서 언급한 내용입니다.

 

“(2-2) 에서는 서평자인 더글라스 어윈이 매우 매우 저명한 경제사학자인 베리 아이켄그린 등과 공저한 논문의 한 섹션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원래 계획에는 없었는데, 의미 있는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관심 있는 분은 미리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39~47쪽에 있는 섹션입니다.

링크: http://www.nber.org/papers/w7195

 

위 섹션은 언젠가는 제 블로그에 번역이 올라갈 것이고, 제가 언급한 이유도 부연될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대여섯 번 글을 올린 이후로 듀게에서는 경제학 얘기를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선무당들의 태클에 질렸습니다.)

 

그 전에 구글에서 Irwin Eichengreen 으로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결과가 두 사람이 공저한 논문입니다.

http://www.dartmouth.edu/~dirwin/w15142.pdf

대공황 시기 재앙을 심화시킨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연구입니다.

두 번째 결과가 두 사람이 같이 쓴 기고문입니다.

http://www.voxeu.org/index.php?q=node/3280

금융위기 후 기고문인데, ‘보호무역주의의 유혹을 거부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윈과 아이켄그린은 프로젝트 신디케이트에 공동 필자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아래 글을 보면 미국의 통화정책에 관한 한, 라잔-로고프보다는 크루그먼 쪽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http://www.project-syndicate.org/commentary/eichengreen23/English

어찌됐든 보호무역 조치 도입은 절대 피해야 한다는 얘기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저는 보호무역 조치에 힘입었다고 볼 수 있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신흥국)의 고속 성장 경로가 예외에 속하며,

그 예외는 지금의 다수 저개발국에서 재현될 수 없다는

취지의 댓글을 호레이쇼님께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아이켄그린의 [글로벌 불균형]을 참고하시면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구글에 Eichengreen Temin 으로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네이버에 테민 페인스틴으로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MIT의 테민, 옥스포드의 페인스틴, 로마의 토니올로. 이 책이 학부생들의 교과서입니다.

 

구글에 Irwin Temin 으로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http://www.dartmouth.edu/~dirwin/docs/COTTON.PDF

The Journal of Economic History 에 실린 두 사람의 논문입니다.

1826~1860년 동안 미국의 면섬유 산업 보호관세에 관한 논문입니다.

 

어윈은 아이켄그린과도 논문을 같이 썼고, 테민과도 논문을 같이 썼습니다.

기본 입장은 동일합니다.

혹시 페인스틴과도 같이 쓴 논문이 있는지 심심풀이로

구글에서 douglas irwin charles Feinstein 로 검색해봤습니다.

어윈과 페인스틴이 같이 논문을 쓴 적은 없는 것 같지만,

첫 번째 결과에 경제사학자 Kevin O’Rourke 가 편집한 책이 나옵니다.

위의 테민-페인스틴-토니올로의 교과서 제 2장이 실려있고,

어윈의 논문은 총 4개가 실려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어윈과 바그와티가 함께 썼습니다.

 

세간티니님이나 겨자님이

아이켄그린, 테민, 페인스틴 등이 쓴 교과서나 논문, 그것도 안 되면 이들을 인용한 경제사 논문을

하나라도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어윈도 처음 들어 보시니 만만하게 느끼셨겠지요. 어떤 학자인지 찾아볼 필요도 못 느끼셨겠죠.

본인의 경제학 지식이 얼마나 짧은지 상상도 못 하실 테니까요.)

이들이 제가 말한 상호인용체계이고, 주류 경제학, 주류 경제사이며

경제학과 학생들은 이들의 교과서와 논문, 이들을 인용한 논문을 과제로 읽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예외 없이 장하준과 어윈 중 어윈을 지지할 것입니다.

이들 중 누구도 Hill 과 같은 관점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Journal of Economic History 나 경제학 교과서나 The Economist 에서

자유무역이 미국에 불리하다

그리고/또는/그래서

미국 이익을 위해 (선택적) 보호무역 조치를 도입하는 것이 좋다고 얘기하는 것을

단 하나라도 찾을 수 있는지 한 번 찾아 보세요. 단 하나라도.

 

따라서

Hill의 교과서를 잘 읽어보면, 보호무역과 자유무역에 대해서 서양의 경제사학자들이 어떤 모순된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가 잘 드러납니다

라는 겨자님의 언급은

hubris님 식으로 국어를 사용하면

데이타를 임의로 만들어 조작한 것입니다.

저는 국어를 그런 식으로 후지게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겨자님이

Hill Peng 간의 모순된 입장(?), 국제경영학 교과서 저자들의 견해를

주류 경제학-경제사 내부의 모순된 입장으로 착각하셨다고 봅니다.

주류 경제학-경제사에 대해 잘 모르신 나머지 그러셨겠지요.

 

저는 경영학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진심입니다.

무시하고 말고 할 만큼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냥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세요.

범용성 있는 주류 경영학의 정의가 제시된 상태에서

대다수의 주류 경영학자들 사이에 합의된 내용에 대해

구글 검색 결과도 별로 나오지 않는 경제학자를 인용하며

경영학자들의 모순된 입장을 얘기하는 것이 얼마나 후진 텍스트인지..

그리고 그런 후진 텍스트를 쓰는 사람에게

주류 경영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것 같다라고 말하는 게 타당한지 부당한지..

 

제게 주류 경제학에 대해 잘 모르신다는 평가를 받지 않으려거든 최소한

경제사학자들의 의견은 어떤지 모르지만, 국제경영학 교과서 저자들은 다르게 얘기하고

나는 주류 경제학보다 국제경영학을 더 신뢰한다.”

라고 텍스트를 기술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술해야 할 것을 경제사학자들의 모순이라고 대책 없이 후지게 기술하셨을까요?

자신이 주류 경제학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보입니다.

겨자님의 텍스트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보다 자세히 비판하겠습니다.

 

세간티니님이든 겨자님이든 누구든

, 한 두 학기만이라도 이 상호 인용체계 속에서 뒹굴며

이 줄기를 추적하며 교과서와 논문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제가 했던 얘기를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동의는 하지 않았을지언정.

 

그들의 방법론 규범은 무엇인지,

이론과 실증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어떠한지,

그들이 왜 그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그들의 철학이 무엇인지

등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와 고민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주류 경제학자들이 누구인지, 그들의 기본적 입장-결론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한 두 학기 동안 예닐곱 과목만 공부해도 알 수 있습니다.

 

 

0.4

 

주류 경제학자들의 정치적 지향에 대해 간략히 논의하겠습니다.

여기서 정치적 지향은 지지 정당을 말합니다.

 

그레고리 맨큐와 폴 크루그먼은 널리 알려진 경제학자입니다.

 

그레고리 맨큐는 공화당 지지자입니다.

http://gregmankiw.blogspot.com/2006/08/my-party-affiliation.html

맨큐가 자신의 지지 정당을 밝히고 있는 위의 글을 보면

경제학과 정치적 입장의 관계에 대한 오해가 얼마나 보편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폴 크루그먼은 가장 널리 알려진 민주당 지지 경제학자일 것입니다.

 

공화당 지지자인 맨큐와 열렬한 민주당 지지자인 크루그먼은 가장 널리 알려진 케인즈주의 학자들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놀랍겠지만, 저는 하나도 놀랍지 않습니다.

케인즈주의 방법론과 정치적 지향은 엄밀한 의미에서 어떤 인과관계도 없기 때문입니다.

관측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케인즈주의자들 중에 민주당 지지자가 많고 통화주의자들 중에 공화당 지지자가 많다는

상관관계입니다.

 

0.42

 

위의 맨큐 글에 따르면 주류경제학자가 민주당 지지자인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사뮤엘슨이 언급한 사람들 중에서는,

바그와티는 민주당 지지자, 그린스펀은 공화당 지지자이고

사뮤엘슨 본인은 민주당 지지자였습니다.

 

(http://www.ratio.se/pdf/wp/dk_ls_diverse.pdf

얼마나 신뢰할 만한 자료인지는 모릅니다만, 위 조사에 따르면

경제학자들 중 민주당 지지 / 공화당 지지 비율은 3 / 1 이며,

이는 다른 사회과학자들에 비해서는 상당히 낮은 비율입니다.)

 

저는 세간티니님과 달리 그런 주제(경제학자들의 정치적 지향)에 관심이 없어서 아는 바가 없습니다.

관심이 없는 이유는 제가 정치적, 윤리적 토의의 장을 삭제하려거나

정치가 경제학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통화주의자의 경제학 텍스트와 케인즈주의자의 경제학 텍스트를 평가하는데 있어

저자의 정치적 지향은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이의 정치적 지향과 그 주장의 타당성을 평가하는 것과

그 사람이 경제학 연구를 하면서 어떤 방법론을 택했는지 여부도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 저의 정치적 지향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정치학자, 철학자, 페미니스트들, 기타 필녀필부들의 의견, 그리고 해당 정당의 주요 인물, 정책들을 보면 됩니다.

물론 경제학자들의 의견도 참고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경제학 연구성과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녀가 어느 대학의 교수든, 그녀가 수상경력이 얼마나 화려하든,

저와 정치적 윤리적 입장을 같이 하는 동료 시민의 의견보다 그녀의 의견을 더 존중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런 설명이 필요한 상황 자체가 웃기는 겁니다.

백종현, 정명오의 칸트 해석/번역에 대한 평가와

그들의 정치적 지향에 대한 평가가 어떤 식으로 연결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야당 지지자의 칸트 이론이 한나라당 지지자의 칸트 이론보다 나은 것도 아니고

칸트를 더 정확하게 번역한 사람이 한나라당을 지지하면 따라서 한나라당을 지지할 것도 아닙니다.

이론, 연구 성과, 학술 논쟁에 대한 평가와 연구자의 정치적 지향에 대한 평가가 별개인 것은

자연과학이나 경제학만 그런 게 아니라, 인문학, 정치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책의 효과에 대한 분석과 정치적 지향이 다르다는 것을 굳이 언급해야겠네요.

전자에 있어서는 경제학자의 의견에 더 큰 비중을 둡니다.

경제학자들의 분석, 추정값이 정치적 지향에 따라 상당히 다른 경우도 있을 것이고

거의 차이가 없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추정값에 대해서는 제가 정의한 주류 경제학의 테스트 결과를 신뢰합니다.

투표 결과가 어느 한쪽을 지지하지 않으면, 현재 인류의 지식으로는 결론 내릴 수 없는 것이라 봅니다.

beer inside님이 말씀하신 장기적이고 불확실한 결과와 관련된 분석에 대해서는 일단 지금은 논하지 않겠습니다.

언론에서 인용하는 G20 개최, 한미 FTA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주장들이

주류 경제학의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굳이 덧붙일 필요도 없겠습니다.

 

0.41

 

케인즈주의 - 민주당 지지

통화주의 - 공화당 지지

라는 관측된 상관관계로부터 어떤 인과관계를 도출, 확립, 검증하고자 한다면,

절대적으로 피할 수 없는 작업이

각각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다른 변수들을 통제하면서 한계적으로(marginally) 측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회귀분석 결과와 관련된 모형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해당 모형은 기존에 널리 받아들여진 모형과 가급적 모순을 일으키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종류의 작업은 제가 고집하는

형식 언어 수준의 일상 언어 사용,

즉 각 문장의 엄밀한 형식화와 문장 단위의 추론 규칙 적용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해수파, 담수파, 정치적 저널리즘에 투신, 신화적 방패와 같은 언어로 접근해서는

하버드의 어떤 학장이 그랬듯, 맨큐에게 당신이 공화당 지지자라는 것이 가능한 일이오?”라고 묻거나

누구 어쩌고, 누구 저쩌고 식의 딱지 붙이기밖에 할 수 없습니다.

 

주류 경제학은 케인즈주의냐, 통화주의냐, 해수파냐, 담수파냐

정치적 지향이 무엇이냐 하는 것들에 의해 정의될 수 없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세간티니님이 메타(?) 비평가를 자처하며 들이미는 관점일 뿐입니다.

 

전세계의 경제학 전공자, 연구자 중 절대 다수가

맨큐와 크루그먼의 정치적 지향,

케인즈주의자와 통화주의자의 정치적 지향

해수파 담수파의 정치적 지향에 아무런 상관없이

양쪽 모두를 검증된 주류 경제학의 준거 텍스트로 받아들이는 데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메타 비평(?)은 메타 비평 고유의 역할이 있겠습니다.

그것을 하고 싶은 분은 잘 하면 됩니다.

하지만 세간티니님의 메타 비평은 전혀 기대가 안 됩니다.

제 기준으로 텍스트 해석/기술이 후지고, 주류 경제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류 경제학, 정치적 지향을 얘기하면서

대뜸 해수파/담수파를 꺼내는 것부터가 얼치기 메타 비평을 하겠다는 빵빠레입니다.

 

(이 점에서는 크루그먼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크루그먼은 엄밀한 의미에서 거시경제학자는 아닙니다.

저도 거시를 전공하지 않아서 잘은 모릅니다.

이런 쪽으로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 제 수준에서 소개할 자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e. http://www.economist.com/node/14031376

f. "최근 거시경제학의 흐름 (나라야나 코철라코타)”을 복사-붙여넣기로 구글에서 검색해 보세요.

g. http://newmonetarism.blogspot.com/2011/03/disagreement.html

 

e는 이번 금융위기를 계기로, 거시경제학의 문제점, 전망 등에 대해 논의한 The Economist 기사입니다.

재무-금융 경제학에 대한 관련 기사도 링크되어 있으니 같이 읽어보시면 됩니다.

The Economist 가 너무 방어적이라고 느끼는 분,

더 시원하게 주류 경제학을 까는 주류 경제학자의 글을 원하시는 분은

아래의 크루그먼에 더 공감하실 것입니다. (e도 크루그먼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http://www.nytimes.com/2009/09/06/magazine/06Economic-t.html?ref=paulkrugman

개인적으로 크루그먼이 언론에 쓰는 글들이 케인즈만능주의처럼 느껴질 때가 가끔 있지만,

(기계적) 균형을 위해서라도 같이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몇 차례 쓰는 글을 통해 제 입장이 더 잘 전달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f는 다른 여러 주목할 만한 논점과 함께 6번에서

현재는 해수파/담수파의 구분이 무의미하며

과거에 있었던 해수파/담수파 구분을 기준으로 보자면 담수파가 우세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2학년 때 거시를 배우면서 들었던 얘기도 저것입니다.

어떤 학생이 선생님께 선생님은 케인즈주의에요, 통화주의에요?” 물었을 때 선생님의 대답은

그런 게 어딨어. 지금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에 대해 더 적실한 모형을 갖다 쓰는 거지.” 였습니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f의 서술방식입니다.

먼저 자신이 검토한 자료의 범위와 기준을 명시하고

6번에서 미네소타, , 하버드, 프린스턴을 적시하며 얘기하고 있습니다.

f가 최신 거시경제학 동향을 정의한 방식은 제가 주류 경제학을 정의한 방식과 유사합니다.

 

g는 크루그먼의 해수파/담수파 구분 및 정치적 지향 구분을 비판하며

실제 거시경제학자들이 어떻게 작업하고 있는지에 대해 묘사하고,

현실 정치에서 정당 지지는 차악의 선택일 수밖에 없음을 얘기하고,

다수의 (굳이 그렇게 구분하자면) 담수파 학자들이 민주당 지지자임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위의 미국 사회과학자들의 정당 지지에 관한 조사도 g의 댓글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g도 구체적인 학교, 학자를 거명하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0.5

제가 세간티니님을 선무당으로 생각하는 이유.

 

세간티니님의 첫댓글입니다.

 

우선, 주류경제학이 무엇인가라는 정의와 주류경제학이 어디까지인가라는 범위에 대해서 보다 정확하게 설명하셔야 할 듯 싶습니다.

그래야 김리벌님이 장하준과 우석훈을 비판하는 정치적 포지션이 어디쯤 되는가를 금방 알 수가 있기때문이죠.”

 

하도 답이 안 나와서 저는 대응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답변을 피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저의 정의와 범위를 이해 못 하신 것 까지는 이해해 드릴 수 있습니다.

주류 경제학의 정의/범위와 정당 지지가 상관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이해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은 한심하고 무례합니다.

저의 장하준 비판의 타당성이 정치적 포지션이 어디쯤 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얘기이고,

어찌됐든 이런 식으로 대뜸 정치적 사상 검증을 하겠다는 것 자체가 참 부끄러운 노릇입니다.

이것이 자유주의보다 왼쪽에 있는 분들의 정치적 윤리입니까?

 

정치적 열정과 정치적 위치 때문에 장하준을 깐다면 그건 어떤 정치적 열정과 위치인지 궁금합니다.

한나라당, 민주당,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지지여부랑 장하준 까는 거랑 대응이 되는지

주류 경제학 입장에서 장하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사람한테 정치적 사상검증이 선행되어야 한다니,

결국 세간티니님이 본인의 정치적 지향과 얼마나 가까운지를 기준으로

장하준 비판에 이중 잣대를 적용하겠다는 것을 실토한 셈이라고 봅니다.

너 한나라당 알바지?”하는 것과 뭐가 다른지..

조중동-한나라당의 윤리와 닮은꼴이군요.

너 빨갱이지? 너 좌파지?” “너 한나라당 알바지?”

 

세간티니님의 댓글입니다.

게다가 님은 님께서 생각하시는 주류경제학의 정의와 범위에 대해서는 아직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김리벌님께서는 주류라는 말을 혼용하고 계십니다. 장하준이나 비정통주의 학자들이 말하는 주류경제학은은 애덤 스미스부터 기원한 고전경제학을 말합니다.

그런데, 김리벌님은 주류 경제학을 경제학자들의 소사이어티學團 집합체라고 정의내리는 듯 싶군요.”

 

아니오, 저는 제가 생각하는 주류 경제학의 정의와 범위부터 얘기하고 시작했습니다.

아니오, 고전경제학이라는 말을 한 적 없습니다.

세간티니님이야말로 개념을 혼용하고 계십니다.

제가 말한 적도 없는 고전경제학 (도대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 단어인지도 모르겠지만..) 얘기를 하시다가,

라잔과 루비니에 대해 얘기할 때는 동료 경제학자들” “동료 학계의 신뢰를 준거로 들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학계와 (신뢰 받는) 동료 학자들의 상호인용체계만 얘기했고요.

그러니 혼동은 세간티니님의 머리 속에, 그리고 장하준을 둘러싼 언론 현상에 존재할 뿐,

저의 텍스트, 주류 경제학의 텍스트, 비주류인 Dani Rodrick의 자기인식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간티니님은 정치적 포지션, 정치적 열정, 정치적 위치, 정치적 파토스등에서

 정치적의 의미도 혼용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크게 봐서 정당 지지와 연결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적인 인정 투쟁의 의미로요.

두 번째 의미의 정치적 파토스를 문제 삼는 것은 넌센스 상대주의입니다.

제가 그것을 감춘 적도 없고 애초에 감추는 것이 불가능하거니와 감출 필요도 없습니다.)

 

장하준이 고전경제학을 어떻게 정의하고 그것을 어떤 맥락에서 얼마나 사용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장하준이 주로 사용하는 용어는 신자유주의입니다.

([사다리 걷어차기] 색인에 고전경제학 없음. 신자유주의 4개 페이지,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 색인에 고전경제학 없음. 신자유주의 5개 페이지

[나쁜 사마리아인들] 30쪽부터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 경제학 계속 나옴

[23가지] 서론부터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 자유 시장주의, 자유 시장 경제학,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주류 경제학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언론 용어에요.

본인이 옹호하고자 하는 장하준의 중심 용어도 정확하게 식별-기술하지 못하는

이런 기본의 기본도 안 된 댓글 논평이 바로 제가 말하는 후진 텍스트입니다.

그러면서 쓸 데 없는 이슈들에 대한 의미부여와 너스레는 어쩜 그렇게 열심히 개진하시는지

정말 대단한 일관성입니다.

 

어찌됐든 장하준은 신자유주의를 비판합니다.

그가 신자유주의=집합 2 (제가 정의한 주류 경제학)”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는 약간 모호합니다.

그의 텍스트 기술이 후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류 경제학자들의 장하준 비판은

(1) 주류 경제학은 장하준이 비판하는 신자유주의가 아니며

(2) 신자유주의에 오류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3) 장하준도 신자유주의 못지 않게 오류가 많다.

(3.1) 만약 신자유주의로 볼 수 있는 어떤 명제에 대해 주류 경제학과 장하준의 의견이 다르다면,

   주류 경제학이 옳고, 장하준이 틀린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3.2) 장하준이 정말 옳은 얘기를 한 것이 있다면, 그가 한 틀린 얘기와는 별개로, 집합 2 75% 테스트를 통과할 것이다.

     그런데 통과 못 하는 여러 얘기를 줄기차게 하니 크게 봐서 아웃이다

입니다.

 

이 컨텍스트를 애덤스미스부터 기원한 고전경제학이라는 불분명한 용어로 번역하는 것은

세간티니님 혼자 열심히 해보시기 바랍니다.

(힌트를 드리자면, 위의 (1)

장하준은 신자유주의의 지적 토대가 고전경제학이라고 (인과관계) 고발을 하고 싶겠지만,

애덤 스미스 이래 고전경제학(?)의 지적 유산을 거듭 현대적으로 계승하여 작업하고 있는

대다수 주류 경제학자들의 규범은 장하준이 의미하는 신자유주의가 아니다정도로 바꾸면 될 것 같습니다.)

 

고전경제학의 의미는 잘 정의되어 있지 않고, 그것을 정의하더라도 이 맥락에서는 쓸모가 없습니다.

장하준이 사용하는 신자유주의의 의미는 비교적 잘 정의되어 있고 (언론인 토마스 프리드먼의 텍스트?)

신자유주의는 자주 워싱턴 컨센서스와 혼용되기도 하는데, 그것의 의미도 검토∙논의되고 있습니다.

(더글라스 어윈이 이 용어를 택해서 장하준을 비판하고 있음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용어에 관한 논의는 다음 다음 글에서 스티글리츠와 함께 살펴볼 예정입니다.)

 

 

제가 임의로 주류 경제학을 경제학자들의 소사이어티學團 집합체라고 정의하는 게 아니라

주류 경제학은 그런 식으로밖에 정의될 수 없습니다.

제가 친절하게 알려드렸잖아요.

주류 물리학, 주류 화학, 주류 천문학은

공통적으로 보는 교과서와 주요 학술지의 상호 인용 체계, 학자들의 소사이어티라고.

 

루비니든, 장하준이든, 제도주의든, 맑스주의든, 고전경제학(?)이든 다 주류가 될 수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요?

그것이 학자들의 소사이어티에 의해 승인되었을 때, 그 때만요.

필요충분조건이죠.

A가 주류다 혹은 비주류다라는 주장을 어떤 다른 근거로 할 수 있는지 모르겠네요.

주류라는 단어의 의미를 국어 사전에서 찾아 보세요.

 

엄격한 객관성과 학문적 중립성”, ”학문적 중립성과 객관성

저는 이런 말 한 적 없습니다. 이런 거 맹신하지도 않고요.

[주류 경제학 입장에서의 장하준 비판 소개]가 제 글의 제목이었습니다.

편을 가르고 한쪽 편에 서있다고 명백히 밝히며 시작했습니다.

주류 경제학의 편에 서서 제가 하던 얘기들, 요구들이

세간티니님이 느끼기에도 객관적이고 중립적이긴 했나 봅니다.

이렇게 엄살을 떠시는 것을 보면요.

 

상관관계, 시간적 선후관계가 인과관계를 보장하지 않는다

“X Y의 인과관계는 제3의 변인을 통제한 뒤 한계적(marginal) 효과의 분석을 통해서만 평가할 수 있다

와 같은 완전 생기초 논증 규범에 대한 지적에

엄격”, “신화적 방패라고 하시면서 엄살을 떠시는 모습은

세간티니님의 장하준 읽기가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웅변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관심 있는 것, 자신이 더 잘 알거나 안다고 생각하는 것 등에

과도한 가중치를 두고 논의에 참여하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얼마나 잘못 이해할 수 있는지, (후진 텍스트 해석)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충고를 하게 되는지, (후진 텍스트 기술)

, 어디까지 유치해질 수 있는지에 심심찮게 볼 수 있죠.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아니, 이 경우는 애초에 아는 게 아는 게 아니었겠죠..

둘 다 모르는데,

자신이 모른다는 걸 아는 사람은 잘 이해하고

자신이 모른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끝까지 폐쇄회로를 도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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