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멸과 동정

2019.04.03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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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에서 프로젝트의 진행 방향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예의와 분별을 아는 사람들인데 어제는 좀 이상했어요. 상대의 의견을 제압하려고 나쁜 방식으로 서로를 자극하더니, 급기야는 일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사적인 감정의 대립으로 치닫고 말더군요.
국적이 다른 A와 B가 있습니다. A는 B를 경멸한다고 했고, B는 A를 가엾게 여긴다고 했어요. 경멸과 동정. 어떤 게 더 견디기 쉽고, 견딜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우울한 의문입니다.

어느 사진집의 평문에서 '초점을 맞출 수 없어 우리는 상처입는다.'는 구절을 본 적이 있습니다. 피사체의 윤곽이 겹쳐지고 흐릿하게 초점이 잡혀 있는 사진들이었는데, 평론가는 그 사진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선명하게 볼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상처받았노라는 감상을 적었어요. 제게 어필한 표현이자 사고였습니다.

(주:  Michal Rovner/Nun )

A와 B의 대립을 관망하노라니 새삼스레 그 사진들이 떠올랐고, 그 표현이 보다 잘 이해되는 느낌이었어요.
바라본다는 행위에 대한 강력한 저지를 내장한 이미지는 얼마나 인식비판적인가요! 더구나 피사체는 인간이었습니다. 아마 사진가는 그 작품들을 통해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를  보여주고자 했을 거에요. 그토록 어둑하고, 서늘한, 인물사진들로 말입니다. 그러니 상처받는다는 표현보다는, 상처를 되살린다는 말이 더 합당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서로 또렷하게 바라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흐릿함이 때로는 관계의 자비로움일 수도 있을 거에요. 제대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우린 또 얼마나 관계들을 원하는가요! 
그러니까 흐릿함 안에 집을 짓고, 길을 놓고, 태양을 띄운 뒤, 비틀비틀 걸어가는 겁니다.  서로 손을 잡거나,  손을 잡지 못한 채.

덧: 두 사람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노라니 어릴 때 할아버지가 선물하셨던 러시아 마트료시카 인형이 생각났어요.  그때 제 눈을 맞추고 남기셨던 이 말씀도.
" 이 인형 시스템은 끝없이 나오는 인형들을 즐기라는 놀이가 아니라 '인간은 깊다'는 적나라한 진실을 보여주는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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