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이어폰을 끼고 일을 하는 광경을 목격한 저는 불현듯 제 십 대의 어느 날이 떠올랐습니다.
그 시절, 그곳에는
라디오 시대의 마지막 주자로써 김현철, 혹은 이적의 목소리를 수학 문제 풀이의 길동무로 삼았던 저와
아들 녀석의 방문을 벌컥 열어 갈굼을 행하심에 삶의 소소한 기쁨을 쌍으로 얻으셨던 저의 부모가 있습니다.
문제를 만들지 아니하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음을 일찍이 실천한 저는 휴일에도 불상처럼 방에서 도나 닦는 심심한 소년이었고.
왠지 십 대를 자녀로 둔 부모라 함은 지행합일, 실천하는 갈굼으로 지도를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그들은
폐쇄회로 카메라처럼 문지방을 밟고 서서 고개를 좌우로 돌리다, 결국 늘 그렇듯 라디오나 문제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제목이 '수험생활'인 RPG 에 등장하는 NPC처럼 6년 내내 이 대사를 반복했습니다.
- 라디오를 들으면서 공부가 되니?

그때는 그 질문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공부가 되냐니? 뭐가?
멀티테스킹의 궁극적 단계는 화투와 구라를 병행하면서도, 화투도 구라도 모두 나 하나로 수렴이 되는 몰입의 경지.
멀티테스킹을 하고 있지만, 정작 행하는 당사자는 그것이 멀티테스킹인지도 알지 못 하는 물아일체 아니겠습니까?
당시의 저는 지금은 당연하지 않게 된 많은 것들이 너무나 당연했던 십 대였기에,
지금의 저 보다 한참 나이가 많았던 그들의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 했던 겁니다. 이게 안 된다고? 진짜? 왜?

그러나, 화무십일홍이요, 얼터너티브도 한 철이랬던가?
이제 내일 모레 마흔을 향해 가다보니, 저도 이어폰을 끼고 일 하는 이의 나이에는 당연히 할 수 있었던 여러 가지를 못 하게 되버렸습니다.

우선, 길에서 뭐 먹기.
옛날에는 길에서 하드도 잘 먹고, 심지어 빵도 먹었는데 이제는 테이블과 의자가 갖춰져 있는 곳에서만 뭘 먹습니다.

뭐 그렇게 고급진 생활을 하고 있다고 겉멋만 들어서는 오뎅도 겨우 사 먹어요.

나 엄청 재수 없네! 나 어쩌다 이렇게 됐니?


그 다음은 세종문화회관 계단에 앉아 있기.
20대 때는 세종문화회관 계단에 앉아 만화책도 보고, 사람들 구경도 잘 했습니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괜히 이 분주한 소설 밖의 독자라도 된양 으쓱해지고.
광화문에서 사람 만날 일이 생기면 일부러 접선 장소를 그곳으로 잡기도 했지요. 장소 확실하고 눈에 확 들어오고.

뿐인가요?

한국이란 사회의 중심에 앉아 있다는 근거 없이 밀려오는 뿌듯함을 만끽하고 있으면 어디선가 에너지가 흘러와 충전 되는 기분까지 들곤 했답니다.

돌이켜 보니, 야 나 진짜 중2병이었구나?
하지만, 지난 가을 오랜만에 옛날 기분 내보려 그 계단에 앉았다가 서둘러 일어나야 했습니다.
왠지 남들 눈에 사연 있는 남자 같아 보일까봐서요.

남들은 나한테 전혀 관심 없다는 거 잘 알지만 그래도 왠지 뒤가 당기는 찜찜한 기분.

버스 뒷자리에 타 회차지점부터 종점까지 여행 하기도 있습니다.
273번 회차지점에서 버스를 타면 강북을 횡으로 가로지으며 길고 긴 여행을 할 수 있었어요.

괜히 창에 머리를 박고 고뇌하는 인간처럼 인상 팍 쓰고 있다가 수첩을 꺼내어 오글거리는 한 줄 적기도 하고.
그것도 꼴에 여행이라고 함께 할 엠피쓰리 파일들을 신경써서 선곡하는 게 어찌나 즐거웠는지.
그러나, 이제는 늙고 지쳐서 멀미가 나는 통에 누가 돈을 준대도 못 할 일이 되버렸습니다. 아.. 속상해...

그 외에도, 동네 문방구에서 뽑기 하기, 혼자 한강에서 소주 따라 놓고 노래 듣기, 등등이 있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위에 제가 열거한 것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바로 혼자서 할 수 있지만, 혼자 했다간 별안간 외로움이 날아들어 가슴을 찌르는 일들.

길에서 뭘 먹든,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있든, 누군가와 함께라면 여전히 하나도 두렵지가 않아요.

연대가 빚어내는 용기의 위력을 알기에 저는 누군가 신발끈이 풀려 쪼그려 앉으면 함께 쪼그려 앉아 줍니다. 

그것이 설령 역적모의라 할지라도 함께하는 한 두렵거나 외롭지 않은 거지요.

그 말은 즉, 충분히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었던 일들을 언젠가부터 혼자서는 할 수 없게 되버렸다는 말입니다.

역시나, 이 모든 것의 원흉은 만악의 근원이자, 독립변수인 동시에 종속변수인 괴이한 감정.

외로움인 것이지요.


요즘 들어 생각하는 건데 말입니다.
벚꽃 만발한 사월이면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망원 줌렌즈 마운트 해서 메고 다니는 아저씨들 있지 않습니까?
떼로 다니면서 민폐 끼치지도 않고, 조용히 정찰 나온 scv처럼 슬슬 걸어다니시는.

옛날에는 그 아저씨들이 이해가 안 됐어요.
벚꽃은 떼로 찍거나, 조리개를 열어서 찍어야 예쁘니 광각 단렌즈나 기껏해야 24-70이면 그만일텐데,
저 수염 난 중년들은 왜 저 렌즈 조합을 해서 나오셨을까?

이 캐릭터들들은 무례하게 몰카 스냅을 찍는다든지, 과욕을 부려 있어뵈는 사진에 집착을 하지도 않는다구요.
그런데요. 저, 이제는 그들을 이해합니다.
그들에게 카메라는 외로운 중년의 봄날을 함께 걸어주는 벗이었던 겁니다. 말 없이 꽃을 바라봐 주는 길동무이자, 

그 화려하고 즐거운 봄날에 남들에게 비추어 고독한 스스로를 달래줄 증표였던 거예요.
나.. 사진 찍으러 나온 거라구. 이 렌즈를 보라구. 그러니까 나는 외롭지 않아. 지..진짜라니까?

제가 요즘 슬슬 그럽니다. 카메라가 무슨 방패처럼 의지가 돼요.
이참에 크고 아름다운 70-200 하나 지를까봐요... 허연 거 눈에 잘 띄게.
아.. 눈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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