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2019.09.26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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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인생에 속하는/속했던 어떤 장면이 다른 인생에서 언뜻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상해할 일이 아니죠. 장면이란 서사의 일부인 거니까요. 장면은 부속과 같은 것이어서, 하나의 서사에서 쓰인 장면이 얼마든지 다른 이야기에서 사용될 수 있는 거죠 . 인생이 아니라 예술에서라면 그럴 때 '모티프'나 '기능'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어제 동료의 어떤 행동을 보면서 가졌던 감정이에요.

이를테면 '남과 여'가 있습니다. 둘이 다른 의견으로 격렬하게 대립하던 중, 한 사람이 커피를 내리고 무심히 상대에게도 한 잔을 권합니다,  그리고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비가 창에다 만드는 물방울을 나란히 서서 바라보며 같은 정서를 나누는 거에요. 그와 흡사한 장면이 다른 영화에 나온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는 거잖아요. 그건 '장면'이고, 다른 서사에 속하는 중일 뿐이니까요. 다만 그런 장면들은 눈부시지 않고 그저 코드로 바라보게 됩니다.
제게 속했던 장면이 다른 인생에서 보인다고 해서, 그의 삶이 제 삶과 같은 흐름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나는 이제 그 장면이 바라보이는 위치에 서 있구나'라는 생각이 스치며 약간 착잡할 뿐이에요.

타인의 인생에도 정서적으로 저의 지분이 있고, 제 인생에도 타인의 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 혹은 서사에서 서로의 지분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죠. 그런 상대를 발견할 때 가끔 혼란이나 불균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렇게 말해야만 바둑판의 선분처럼 선이 똑바르게 그어지는 셈일 것입니다.

'긴 언덕' 같은 하루를 걸어서 오르는 동안 어제도 어김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또한 그들이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가로등이며 나무들도 봤어요. 그 너머엔 하늘과 구름과 노을이 있었습니다. 마치 <세상>이라는 질문에 어떤 표정으로든 답을 주어야 하는 과제에 붙들린 사람처럼, 저는 거기에 서 있었죠. 어제보다 나아진 것 없는 자신을 슬퍼하지 말아라. 불안하지 않은 자에겐 '얼굴'조차도 없는 것이다는 말로 자신을 토닥이며.

2. 일주일 째 토막잠을 자고 있습니다. 새벽 세시에 다시 들어간 꿈 속.
인적 없는 서늘한 호수에서 수영을 했어요. 밤이었고 적막했습니다. 물풀 같은 게 점점 몸에 휘감겨와 불쾌해졌으므로 호숫가의 기숡으로 기어오르려 했어요. 그러나 왠지 몸에 힘이 빠져서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어릴 때 이웃에 살았던 할머니가 나타나서 제 몸에 손을 대었고, 저는 풍선처럼 가벼워져 손쉽게 뭍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할머니가 독일어로 이런 질문을 던지시는 게 아니겠어요!
"Hast du dich geweint? 넌 너를 울었니?"
저는 조금 고개를 숙인 채 슬픔에 잠겨 할머니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이 '넌 자신의 일로만 울고 있느냐'는 힐책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 Ja...네. (이어서 황급히) Nein, ich weiss nicht.  아니오. 모르겠어요.

호수에서 나와 벗은 몸으로 몇 걸음 더 걷자, 갑자기 환한 불빛들이 아름다운 옛도시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프라하인 것 같았어요. 아, 할일이 태산인 제가 순간이동으로 그곳에 가 있었습니다.          

3. 백만년 만에 야근을 했던 어제 퇴근 길. 어느 빌딩의 럭셔리한 간식점들 앞을 지나다가 Jhon dowland 의 <I saw my lady weep>을 들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P5rKwHvhQ0
102 번째 애인이 제게 마음을 고백할 때 선물한 음반이어서 '사랑가'쯤으로 각인되어 있는 곡이에요. (주: 저와 연이 닿았던 이들은 순번 없이 모두 102 번째 애인으로 자리매김되는 게 룰입니다. -_-)

헤어지고 나서 제가 서유럽 쪽에서 업무를 볼 때, 그는 때없이 인천공항으로 달려가 전화를 하곤 했습니다. 반드시 공항에 가야만 제게 전화할 용기가 생긴다는 설명을 했었죠. 공항의 소음 속에 서면, 힘겹게 치러낸 이별은 멀리에 있고 둘 사이에 어떤 그리움의 안개지대 같은 게 생성 되는 것 같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를 댔어요.  '그 안개 너머로라면 너에게 현명한 말을 보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라는 역시 이상한 설명을 들었던 게 기억납니다. 
물론 지금은 때없이 공항으로 달려가는 일 없이, 잘 살고 있어요. 열달 전쯤 그의 첫아이가 세상에 왔는데, 가끔 아이의 사진/동영상을 보내줍니다. 

새벽에, 몸을 가누기 시작한 아이가 벽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처음 보고 신기해 하며, 그림자를 만져보려고 벽에 손을 대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냈더군요. 뭔가 뭉클해지는 사진이었습니다. 그걸 포착해낸 그의 감각/주의력도 대견했고요. 그 사진 아래 붙인 이 설명도 좋았습니다. 
"존재에겐 햇빛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림자가 있어야 한다는 걸 아들이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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