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 영국 시골 마을이 배경입니다. 그곳엔 소년과 소녀가 살고 있었죠. 

 소년은 어린 시절 겪었던 어떤 사건의 트라우마로 본인이 싸이코패스라고 믿게 됐습니다. 그러한 본인의 소질을 키우기 위해 작은 동물들만 눈에 띄면 잡아 죽이는 취미가 있었구요. 조금씩 사냥감의 덩치를 키워 나가다가 이제는 사람을 죽여볼 차례라고 생각하며 대상을 물색합니다. 그러던 그의 눈 앞에 같은 학교 다니는 소녀가 나타나구요. 

 소녀는 그냥 자기 삶이 되게 맘에 안 듭니다. 재수 없고 느끼한 새아빠와, 새아빠에게 완전히 눌려 살면서 갓 태어난 쌍둥이에게 신경쓰느라 본인에겐 관심도 없는 엄마 때문에 집에 들어가기도 싫어요. 그래서 어려서 집을 나가 버린, 그 후로 다시는 본 적이 없어서 사실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기억도 안 나는 친아빠에 대한 아련한 감상을 품고 살죠. 그냥 이 동네를 떠나서 어디로든 사라져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그런 꿈도 희망도 없는 일을 함께 저지를만해 보이는 적절한 상대가 눈에 들어옵니다...



 - 시작부터 좀 독한 설정들을 깔고 거기에다가 영국맛 물씬나는 무덤덤 주인공들과 시니컬한 드립들을 끼얹어서 강한 느낌을 주지만... 결론은 그냥 로맨스물입니다. 꿈도 희망도 없이 살던 루저들이 문득 감옥 같은 일상을 벗어나 일탈 여행을 떠나는 로드 무비 형식의 로맨스물이요. 지난 세기말 & 이번 세기 초에 특히 유행이었던 기억인데... 그래서 그런지 보면서 좀 익숙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냥 로맨스물'이라고 적어 놓긴 했지만 뭐 그렇게 말랑말랑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주인공들 입장에만 감정 이입하면서 과도한 절망이나 막나가는 환타지로 빠지지 않고 계속해서 현실감각을 유지하거든요. 주인공들을 짓누르는 시궁창 같은 현실의 무게를 진지하게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시궁창이 그냥 시궁창이 아니라 결국엔 많은 부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살아야할 현실이라는 것, 사실은 주인공들이 아직 좀 덜 자라서 철 없이 구는 중이라는 걸 잊지도 않습니다. 여행길에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겪게 되는 사건들을 봐도 '세상은 전혀 아름답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생지옥도 아님'이라는 어른스러운(?) 태도를 고수하죠. 어찌보면 겉모양과 다르게 꽤 보수적인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 하지만 그 '시궁창 같은' 동네의 풍경은 황량하면서도 낭만적이고 아름답구요. 문득문득 튀어나오는 음악들은 참으로 적절하게 멜랑콜리하면서 듣기 좋구요. 주인공 둘은 안 잘 생기고 안 예쁜 척하는 와중에도 귀엽고 매력적이구요. 자꾸만 멍청한 짓들을 저지르지만 그래도 그런 행동과 감정엔 늘 이해해줄만한 이유가 있어서 더 정이 가구요. 센 척하고 삭막한 척하는 와중에도 정말로 사랑스럽고... 결정적으로 둘이 너무 잘 어울립니다. 뭐가 어찌됐거나 결국엔 낭만적인 로맨스에요. ㅋㅋㅋ



 - 또 한가지 제게 되게 맘에 들었던 점은 시즌 1이 이것만 보고 딱 끝내도 아무 문제가 없도록 깔끔하게 마무리가 된다는 거였습니다. 다음 시즌 떡밥 뭐 그런 거 없어요. 물론 제목에 적어 놓은대로 '다음 시즌'이 나오긴 했습니다만(...)



 - 결론을 내자면.

 '영국맛' 좋아하시고 '로맨스' 좋아하시면 보시면 됩니다. 영국맛과 로맨스를 특별히 좋아하지 않으셔도 그게 싫지만 않으시다면 한 번 시도해 보세요. 저는 로맨스물은 별로 체질이 아닌 사람인데도 재밌게 봤거든요.

 기본적으로 재밌게 잘 만든 드라마이고 또 회당 20분 남짓 & 8개 에피소드 구성이라 한 시즌 다 보는데 세 시간 정도 밖에 안 걸리니 부담이 없어요. 자, 아직 안 보신 분들 어여어여... ㅋㅋㅋ




 - 쏘맥님께서 시즌1을 다 보신 입장에서 도대체 시즌2가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다는 글을 적으셨었는데... 시즌1 결말을 보신 분들이면 아시겠지만 시즌2에 대해선 내용과 전개에 대해 무슨 말을 해도 스포일러가 됩니다. =ㅅ= 그래서 뱅뱅 돌려서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왜 황순원의 '소나기' 있잖습니까. 시즌 1이 '소나기'라면 시즌 2는 그에 대한 후일담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근본적으로 사족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 시작부터 한계가 분명하죠. 게다가 시즌 1을 재밌게 본 사람들이라면 아무도 기대하지 않을 이야기가 꽤 큰 비중으로 끼어들구요.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보고 나면 또 대부분 만족하실 겁니다. 사족이지만 꽤 고퀄 사족이구요. 또 마지막 부분에선 나름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사족이고 그렇습니다. ㅋㅋㅋ



 - 번역 제목 맘에 들어요. 원제는 The End of the F***ing World 인데 이걸 그대로 직역하는 것보단 이렇게 바꿔 놓은 게 훨씬 자연스럽기도 하고, 또 딱 보는 순간 뇌리에 팍! 하고 꽂히지 않습니까. 보기는 이제야 봤지만 넷플릭스에서 저 제목을 첨 보는 순간부터 계속 기억하고 있던 제목이에요.

 물론 원제도 맘에 듭니다. 이 노래 제목 중간에다가 훡힝(...)을 추가한 건데 되게 적절하다는 느낌. 드라마에 정말 이 노래 같은 정서가 있거든요. ㅋㅋ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45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800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304
123253 외국 국적을 가진 교포들 말입니다 [12] 빛나는 2010.07.14 4372
123252 미나리에 삼겹살 싸드셔봤나요? [19] 푸른새벽 2010.07.14 4337
123251 [소식] 앰버 연대기 재출간 [6] 날개 2010.07.14 3537
123250 이전투구 [2] 알리바이 2010.07.14 1983
123249 쌈사진 [17] 가끔영화 2010.07.14 4171
123248 [포탈 바낭] 바닐라 크레이지 케이크 먹었어요. [6] 타보 2010.07.14 4880
123247 (바낭) 고기글 보니까 갑자기 새송이버섯이 먹고 싶어졌어요. [9] hwih 2010.07.14 2540
123246 외계인의 귀여움 [4] 2010.07.14 4538
123245 동성애자의 비율 [16] 현재 2010.07.14 7085
123244 이상하게 배가 안고파요 [5] 사람 2010.07.14 7924
123243 [듀나인] 지난 게시판에서 본 역사서 제목이 기억이 안나요. [2] @이선 2010.07.14 1853
123242 [영화제] 제천국제 영화제 프로그램이 나왔어요~ [2] 서리* 2010.07.14 2858
123241 [질문] 저한테 자꾸 시비를 겁니다. [22] 愚公 2010.07.14 5071
123240 LSE에서 공부하고 있는 석사생입니다. 간단한 설문조사 부탁드립니다. :) [5] 말리지마 2010.07.14 3431
123239 듀나인] 장마철 빨래에서 냄새가 계속 날 때 [17] 산호초2010 2010.07.14 4251
123238 피자 주문하는 법 [9] setzung 2010.07.14 4524
123237 [bap] 체코사진가 이르지 투렉 '프라하를 걷다' [1] bap 2010.07.14 2808
123236 안기부에 끌러가 고문받고 간첩이란 누명을 쓴채 16년동안 옥살이를 했다면? [18] chobo 2010.07.14 3673
123235 KT웹하드 UCLOUD 맥용 클라이언트 나왔습니다. 왜가리no2 2010.07.14 2697
123234 연애하는 인간은 왜 낙타,사자, 그리고 아이가 되는가 [1] catgotmy 2010.07.14 342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