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스카이 스크래퍼)

2023.04.20 16:54

Sonny 조회 수:281

어렸을 때 제가 살던 곳은 여러 작은 호들이 모여있는 '3단지' 아파트였습니다. 언덕을 한참 올라가야 아파트가 나왔고 아파트 정문 입구 주변으로는 봄이면 철쭉과 개나리가 많이 피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꽃들을 배경으로 제 사진을 찍어줬는데 정작 사진 속의 저는 햇살 때문에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습니다. 여러개 단지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아파트의 제일 높은 층은 5층이었고 저희 집은 3층이었습니다. 어린 제가 오르기에 계단은 가팔랐고 시커먼 철창 난간을 꼭 잡아야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아파트 문이 열리는 공간은 좁아서 집에서 여러 명이 나갈 때는 문을 열고 계단 아래에서 옹기종기 기다리곤 했습니다. 문 옆에는 네모난 초인종 버튼이 있었지만 급한 경우에는 문을 쾅쾅 두드리곤 했습니다. 단지가 여러개 있다보니 놀이터가 제법 컸는데 전 그곳에서 집 열쇠를 잃어버려서 공포심에 휩쌓이곤 했습니다. 한번은 사막에서 바늘찾기를 하는 심정으로 모래더미를 파헤치다가 오색줄에 묶어놓은 열쇠를 찾아내고는 서러움이 복받혀서 울기도 했죠. 끝내 못찾을 경우에는 부모님의 열쇠를 복사하러 다녀야했습니다. 


맞벌이가 흔치 않던 시절 저희 어머니는 보험영업을 시작하셨고 그 덕에 저희 가족은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새로 옮긴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저희 집은 12층 꼭대기였습니다. 제일 높은 집에서 산다는 기분에 어쩐지 우쭐해졌죠. 베란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보는데 사람들과 차들이 너무 작게 보여서 괜히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어릴 때는 늘 조수석에서 운전자의 기분을 내듯이 꼭대기 층에 사는 특권은 옥상을 점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의 3단지 아파트에서는 옥상을 거의 가보질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아파트에서는 12층 꼭대기라 한층만 더 올라가면 바로 옥상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우유구멍에 열쇠를 넣어두는 걸 부모님이 깜빡하면 울적한 기분으로 옥상에 올라가 멍하니 누워있거나 지상을 구경하곤 했습니다. 날이 좋으면 이불들이 널려져있었고 말린 생선들이 대나무 소쿠리 안에 누워있었습니다. 대신 12층은 풍경은 좋았지만 수압이 약하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 저희집은 유아용 욕조를 큰 욕조 위에 비스듬히 세워놓고 거기에 물을 받아서 쓰곤 했습니다. 지금도 저희 부모님은 어지간히 땀을 흘리지 않으면 집에서 샤워를 하는 대신 목욕탕에 가버립니다. 


딱히 부모님이 의도한 바는 아니셨겠지만 12층 아파트에 둥지를 꾸린 후 저희 가족은 딱히 이사한 적이 없습니다. 몇십년을 한 집에서 살다보니 그만큼 정착이 일상화되었습니다. 이게 제 생활양식에도 자리를 잡았는지 저는 집을 옮기는 걸 극도로 귀찮아하는 성격이 되었습니다. 호주 워킹 홀리데이 때에는 3개월에 한번씩 이사를 하느라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습니다. 12층 아파트에 저희 가족이 뿌리를 내릴 동안 제 초등학교 친구네 아버지의 마트는 망했고 새로운 마트가 자리잡았습니다. 수많은 옷가게와 치킨가게와 음식점과 다른 상가들이 자리를 잡았다가 떠났습니다. 집에서 가까이에 있던 아버지의 근무처도 새로운 곳으로 옮겼고 종종 집열쇠를 받으러 쭈뼛쭈뼛 아버지 직장을 가던 학생 시절의 기억은 이제 도어락으로 교체가 되었습니다. 주기적으로 경적이 울리던 기찻길은 이제 관광지로 흔적만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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