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21 22:29
작년 하반기부터 예고편이 돌다가 얼마전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브라이트(Bright)'를 봤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스러웠어요.
세계관 자체는 매력적입니다. 마법이 있고 판타지 종족들 - 엘프, 인간, 오크, 요정(fairy) 등이 공존하는(드워프나 호빗 종족은 없는 듯) 현대세계죠. ...다만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나 이 매력적인 세계관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어보입니다. 각 종족은 계층의 스테레오타입일 뿐 상상력이 빈곤하기 짝이 없습니다. 긴 수명과 아름다움+마법능력까지 지닌 엘프들은 그냥 베버리힐즈에 모여사는 백인 상류층 이너서클의 스테레오 타입이고, 인간들은 그냥 평범한 중류층입니다. 힘은 세지만 낮은 지능에, 사회의 법보다 혈족문화를 더 중시하고 2,000여년 전 마왕을 도운 원죄로 차별받는 오크들은 힙합 대신 하드코어를 듣는다는 것 빼면 흑인 갱문화+특유의 호미(homie) 문화+60년대 수준의 인종차별이 결합된 흑인 하류층의 스테레오타입일 뿐이죠. 하다못해 온몸에 문신하고 마약에 찌들어 슬랭 지껄이는 엘프라든지, 말쑥하게 정장 차려입고 전문직에 올라있는 오크처럼 고정관념을 깨는 캐릭터라도 나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딴 건 없었어요.그나마 판타지 설정 걷어낸 경찰 버디물로는 볼 만...할 뻔 했지만, 파워밸런스가 엉망이라 역시 별 재미가 없습니다. 칼 한자루만 가지고도 갱단과 SWAT팀을 순식간에 몰살시키는 스피드와 사람을 몇 미터나 던지는 괴력을 가지고 있던 악당들이 이상하게 주인공과만 얽히면 평범한 인간과 레슬링을 벌이고, 날아오는 물통 하나 못 피하는 잡몹이 되거든요.
개인적으론 '섀도우 런' 세계관의 영화화 버전 정도를 기대했는데, 기대가 너무 컸나봐요.
...사실 이 글을 쓴 건 '섀도우 런'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정말로 세계관이 매력적인 작품이거든요. 판타지 종족들과 마법이 등장하는 사이버펑크 세계라니 꽤나 흥미롭잖아요. '섀도우 런'은 1989년 개발된 TRPG이며, TRPG 원작의 개발진들이 주도하여 2013년 컴퓨터 게임 '섀도우 런 리턴즈'를 내놓으며 다시금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가상현실을 뜻하는 '매트릭스', 캐릭터의 성장타입을 뜻하는 '아키타입'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마법이 돌아왔다.'
'섀도우 런'을 상징하는 문구입니다. '섀도우 런' 세계에서 마법은 새로 생긴 것도 아니고, 늘상 함께 해온 것도 아닙니다. 아틀란티스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던 마법이 마야력에 기록된 멸망의 날(2012년 경)을 기점으로 다시 돌아온거죠. 그리고 마법의 힘이 돌아오면서 그동안 인간 뿐이었던 세계에 트롤, 오크, 엘프, 드워프 등 새로운 종족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변이죠. 이 종족들이 어디 외부에서 넘어온 게 아니라, 인간들 중 일부가 갑자기 변이를 일으킨 거거든요. 어제까지 같이 일하던 직장동료가 갑자기 오크가 되고, 집에 있던 동생이 엘프가 된 거죠. 여기에 인간에서 변이된 종족들 외에도 마법이 없던 시대 동안 인간들 틈에 섞여 숨어지내다가 마법이 돌아옴과 함께 진짜 힘을 회복하게 된 고룡들이나 극소수의 엘프들도 있고요. 물론 이로 인해 한동안 극심한 혼란이 있었지만, 원래 평범한 인간이었던 사람들이 변이를 일으킨데다 이 변이가 무척 무작위적이다보니(부모 양측 모두 멀쩡한 인간이었는데 태어난 아이는 오크라든지), 다행히 종족간 전쟁이나 대규모 유혈사태는 피해 어찌어찌 각 종족이 공존하게 된 2060년대가 '섀도우 런'의 배경입니다.
'섀도우 런'의 세계에는 짙은 음울함이 배어있습니다. 사이버 펑크 특유의 세기말적 분위기, 치안마저 민영화되어 사기업에 이양된 극단적인 기업국가의 모습, SIN(시스템 등록번호)에 의해 모든 개인정보가 감시당하는 빅브라더 사회의 모습 등은 전형적인 근미래 디스토피아인데, 여기에 마법과 판타지 요소가 더해지며 코스믹 호러적인 요소까지 섞여있거든요. '섀도우 런' 세계관에서 마법이 돌아온 2012년 이후를 6시대라고 칭합니다. 아틀란티스가 가라앉은 때부터 마법이 돌아오기까지 약 5,200년 간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문명은 5시대고, 아틀란티스가 건재하고 마법이 당연하던 시절이 4시대입니다. 1~3시대는 뭐냐고요? ...기록이 없어요. 3시대의 기록은 극히 일부가 남아있지만, 이를 접한 것만으로도 미쳐버립니다. '호러'라 불리는 강대한 이세계의 존재가 지구를 침략해 멸망한 시대거든요. 3시대의 멸망에서 살아남은 극소수가 땅속에서 숨어지내다가 가까스로 다시 지상에 올라온 게 4시대에요. 마법의 힘이 돌아왔을 때 부작용 중 하나는 세계 간의 경계가 흐릿해진다는 겁니다. 마나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예전 3시대를 멸망시켰던 코스믹 호러적인 존재들이 넘어올 가능성이 커지는 거죠. 5시대 인류가 번영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마나 농도가 낮아 이계의 존재들이 넘어오지 못했고, 또 용들도 마법의 힘을 잃어 숨어지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6시대가 되며 마법의 힘은 돌아와 용들은 자신들의 힘을 되찾았고, '섀도우 런' 세계에서 대기업이나 정부의 배후에는 용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사실상 베일 뒤에 숨어있는 용들의 지배 아래 다른 종족들이 놀아나는 세계죠. 그리고 더 절망적인 건 이 악당같은 용들이 그나마 이 세계를 멸망으로부터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사실입니다. 앞서 얘기했다시피 마나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이세계의 침략가능성도 높아지는데, 그나마 강대한 용들이 마나를 물쓰듯 써대는 덕에 마나의 농도가 일정수준을 넘지 않게 유지되는 거거든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뒤에서 세계를 주무르는 용들이지만, 이 용들마저 사라지면 당장 이계의 코스믹 호러들이 넘어와 세계 자체가 멸망해버립니다.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나는 상황이랄까요;; 아니, 심지어 용들이 있는 지금도 마나의 농도는 조금씩 짙어지고 있으며 어느 순간에는 용들조차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섀도우 런' 세계의 용들은 사실 무지막지하게 강합니다. 크툴루 급이라 어지간한 호러들조차 명함을 못 내밈. 다만 마나의 농도가 더욱 짙어지면 드래곤들도 어찌할 수 없는 아우터 갓 급 호러들이 넘어올 수 있습니다;), 언제가 될진 몰라도 멸망이 예정된 세계죠. 좋든 싫든 용들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멸망하게 되는, 꿈도 희망도 없는 암울한 세계관입니다. 그리고 이 음울함은 '섀도우 런'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듭니다.
만약 이 세계에 흥미가 생기셨다면 아무래도 가장 쉬운 방법인 컴퓨터 게임을 추천드려요. 전설적인 TRPG 개발진이 직접 참여한 CRPG이자 오랜만에 제대로 된 사이버 펑크물라는 의의가 있지만 좀 아쉬움이 있었던 '섀도우 런 리턴즈'에 이어 훨씬 더 나은 후속작인 '섀도우 런 : 드래곤 폴', '섀도우 런 : 홍콩' 도 내놓았거든요. '섀도우런 : 드래곤 폴'은 앞서 설명한 용들의 아이러니(분명 쳐죽일 나쁜놈들인데 어찌어찌해서 진짜 죽이면 마나 폭주 & 호러 강림으로 세계가 멸망함;;)를 다루고 있어 어떻게 엔딩을 맞아도 찝찝함이 남는 암울한 분위기가 돋보이고, '섀도우 런 : 홍콩'은 그나마 가장 친절하면서 해피엔딩에 가까운 작품이라 가장 접근하기 쉽습니다. 이 세계를 배경으로 드라마가 나온다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뭐 기대하긴 어렵겠죠...=_=;
2018.01.21 22:37
2018.01.21 23:35
정확히 말하자면 톨킨을 카피하는 수준의 안이함조차 없습니다. 판타지 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판타지에 전혀 관심이 없어요. 종족과 관계없이 다들 인간과 똑같이 먹고 입고 생활합니다. 그냥 디트로이트 뒷골목에서 마주칠 것 같은, 오버사이즈 힙합 야구잠바 입은 흑인 갱단 멤버가 얼굴에 얼룩덜룩 색칠한 뒤 오크라고 우기고, 쫙 빼입은 채 람보르기니 끌고 다니는 패리스 힐튼이 엘프라고 우기는 세계입니다. 엘프 사는 동네는 좀 나무가 많고 자연주의적이라든지, 오크들은 여전히 생고기 뜯어먹고 산다는 수준의 차이조차도 없어요 =_=;
'섀도우 런 : 홍콩'은 유머도 꽤 있고, 착실하게 발품 팔아 충분한 정보를 모은 뒤라면 최종보스를 말로 구슬러(아니 계약의 맹점을 이용해 협박해서;;) 이계에 끌려간 영혼들까지 돌려받는 진해피엔딩이 가능합니다. 보너스 시나리오에선 삼합회를 돕고 계속 어둠의 삶을 살건지(이 경우 어릴 때부터 동생처럼 지냈던 동료 던컨이 반발하여 탈퇴한 후 생사불명이고 나머지는 삼합회 시애틀지부에 정착), 아니면 SIN을 되찾아 평범한 사회인으로 복귀하는 대신 본편 내내 뒤를 봐줬던 삼합회를 배반할 것인지(이경우 주인공+던컨은 시애틀에서 새출발하지만 기타 동료들은 홍콩에 남아 생사불명), 양자택일이라 어느쪽이든 찝찝함이 남는데 본편만 즐기면 찝찝함이나 암울함 없이 깔끔해요.
2018.01.22 20:41
2018.01.22 21:24
기본적으로 레벨노가다가 거의 불가능한 게임이고, 또 회복이 굉장히 짠 시스템이라 기본적인 난이도는 좀 있습니다. 1편인 '섀도우 런 리턴즈'는 일단 스토리나 자유도가 별로라 비추입니다. 복잡한 TRPG 룰을 CRPG에 어떻게 적용시킬까 좀 헤맨 느낌. 전투 난이도도 높은 편인데 이건 도전적인 게 아니라 그냥 게임 밸런스가 안 좋은 거에요;; '섀도우런 : 드래곤폴'은 원래 DLC다가 스탠드 얼론으로 독립된 녀석이다보니 전편이었던 '섀도우런 리턴즈'와 시스템이 거의 같아 전투가 어려운 편입니다. '섀도우 런 : 홍콩'의 경우 시리즈 치고는 전투 난이도도 낮은 편이고, 또 메인스토리나 동료 퀘스트의 경우 착실하게 발품 팔면서 정보수집을 미리 하면 최대한 전투를 피하면서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미션이 많습니다. 난이도로나 스토리로나 '섀도우런 : 홍콩'을 가장 추천드려요.
2018.01.22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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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트>는 아주 약간 기대했었는데, 말씀하신 걸 보니 톨킨에서 한 걸음도 안 나간 안이함으로 가득 찬 드라마로군요. 믿고 거르겠습니다. 쩝.
<섀도우 런> 시리즈는 언제나 해보고는 싶지만 손을 대기는 조금 무서운 그런 이미지였습니다. '홍콩'은 그래도 덜 괴멸적이고 덜 암울하다는 말씀인가요... 흠, 만약 시리즈에서 하나 플레이한다면 홍콩이 되겠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