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첫 극장)

2023.04.18 18:54

thoma 조회 수:222

이 집은 큰길 뒤편에 있었습니다. 

큰길에는 극장이나 가게들이 있었는데 이 집은 극장과 가깝지만 바로 연결되는 통로는 없어서 도로를 따라 걷다가 골목으로 들어와서 공터를 지나면 집이 나왔어요. 극장과 큰길에서 돌아 앉은 위치의 집이었습니다.

동네 양복점 딸, 만두겸찐빵집 딸과 어울려 잡기 놀이 같은 걸 할 때 극장 앞을 오고 갔고 극장 건너 편에는 설탕뽑기를 하는 국자아저씨가 영업을 하고 있어서 거기 앉아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물고기나 세잎클로버도 아니고 삼각형이나 전나무 모양 같은 쉬워보이는 것들도 왜 성공 일보 직전에 귀퉁이가 똑 부러지고 마는지 약이 많이 올랐었네요. 그 아저씨한테 바친 동전이 그 얼마였던가. 놀다가 더워서 벗어놓은 겉옷을 맡아주기도 했던 뽑기 아저씨. 왠일인지 아직도 희미하게 인상이 기억납니다.  

놀다 지쳐서 극장 매표소 앞의 줄세우기용 철봉에 매달려 몸을 꼬고 있으면 표받는 아저씨가 심심하면 들어가서 봐라,고 손님 없는 낮시간에는 선심을 쓰며 입장시켜 주기도 했었어요. 참 좋은 분. 우리는 손오공이 나와서 도술을 하거나 탐스런 복숭아가 나오거나 중국 무협으로 시선을 혹하는 영화는 앉아서 보기도 했으나 지루해지면 텅 빈 일층, 이층 휘젖고 다니며 놀이터처럼 뛰어다니기도 했네요. 이곳에서 의자와 구석진 바닥이 뿜는 눅눅함과 곰팡이 냄새를 '이것이 극장의 냄새로군'하고 기억하게 됩니다. 어쩐지 극장은 살짝 더러운 냄새가 나는 곳이며 숨을만한 외진 귀퉁이가 많고 게다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어두컴컴한 곳이라고 입력이 됩니다. 첫 극장이지만 여기서 본 영화는 일관된 내용이 생각나진 않습니다.


살던 집의 이층에는 주인이 살고 일층에는 우리 식구가 살았어요.

여름 방학을 며칠 앞두고 태풍이 왔습니다. 학교 가는 길이 흙탕이네 어쩌네 말을 듣고 막네 삼촌이 업어줘서 학교를 갔더니 도로 집으로 가라고 합니다. 집에 왔는데 부엌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해서 엄마와 할머니는 옷을 둥개둥개 걷고 부엌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내고 있습니다. 마루에 앉아 구경하고 있자니 물이 점점 차오르네요. 두근두근 흥분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부연 물이 마루까지 찰랑거리자 물을 퍼내던 어른들이 윗집에 말해서 올라가 있게 했습니다. 

이층에도 또래가 있어서 함께 테라스를 통해 물구경을 합니다. 집 옆 공터가 온통 물로 찼네요. 집의 좁은 마당에도 물이 가득합니다. 마당 화단의 식물들이 안 보입니다. 안전한 이층에서 빗자루나 주전자, 포대자루 같은 가벼운 물건들이 둥둥 떠내려가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 재미나기도 하고 밑에서 식구들이 뭘 하고 있을까 걱정도 될 즈음 뭔가 쿵 소리가 났습니다. 어디서 난 소리인가 더듬어 보니 마당의 담장이 앞집 쪽으로 무너졌어요. 앞집은 마당이 넓었습니다. 물이 빠질만한 여유가 되었는지 땅이 경사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담이 무너지자 우리 집 물이 그쪽으로 쫙 빠져나가네요. 후련하고 안도의 감정이 들었습니다. 때맞춰 빗줄기도 가늘어졌어요. 나중에 듣기로 앞집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일부러 담을 쳐서 무너뜨린 거 아니냐고.


얼마 후 이사를 했는데 그 집에서의 여러 가지 기억 중에 극장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홍수의 기억은 선명한 기억으로 남았고 앞으로도 영영 지니게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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