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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커드는 레플리컨트인가 인간인가. 이 질문은 [블레이드 러너]를 둘러싼 오래된 갑론을박이다. 파이널 컷의 편집으로 본다면 데커드의 정체는 하나로 좁혀진다. 데커드는 레이첼에게 타인의 기억이 이식된 레플리컨트라고 그의 정체를 드러내고, 이후 레이첼이 데커드의 오래된 사진들을 보고 있을 때 데커드는 누워서 유니콘 꿈을 꾼다. 레이첼은 왜 하필 '레플리컨트를 속이는 수단'으로서의 사진을 보고 있으며 (이 오래된 사진들은 데커드와 큰 관련이 없어보인다) 왜 그 다음 장면에서 데커드는 '누군가에게 이식받은 기억'일 수도 있는 유니콘의 꿈을 꾸고 있을까. 특히나 유니콘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라는 점에서, 누군가의 조작이나 의도적인 디자인으로 조형된 존재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꿈은 더욱 더 의뭉스럽다. 이 수상한 씬을 개프의 알 수 없는 대사와 유니콘 종이접기 씬과 붙여본다면 데커드는 레플리컨트가 맞을 것이다. 이것은 해석의 차이가 아니라 영화가 직접 그렇게 화면으로 규정하고 있으니까.


데커드의 정체성은 그렇게 추론하면 끝나는 이야기일까. 나는 이 질문이 결론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전제로서 작동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면 그의 정체를 퍼즐맞추듯이 계속 추리하는 의미가 있을까) 만약 데커드가 레플리컨트라면, [블레이드 러너]는 무슨 이야기가 되는가. 자신이 인간인줄 믿고 있던 레플리컨트가,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이야기다. 이것은 영화 속에서 나오는 레플리컨트들이 거치는 깨달음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데커드가 뒤쫓던 레플리컨트들의 불우한 전철을 그 역시도 밟을 수 밖에 없을까. 여기에서 계급적 운명론을 믿는 정도에 따라 자신만의 후속편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어떤 미래를 더욱 강하게 지지할 것이다. 나는 데커드의 미래가 로이 배티의 미래와는 달랐을 것이라고 믿는다. 타이렐은 이제 죽었고 거의 유일한 지배자가 부재한 산업의 제국은 과연 이전처럼 강력한 독점적 태도로 유지될 수 있을까. 어떤 레플리컨트들은 함께 봉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이야기는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세계관에 포함시키지 않은 채로 하는 주장이다)


데커드가 레플리컨트라면 이 깨달음의 순간만이 아니라 깨달음에 도달하기까지를 더 곱씹을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심드렁한 은퇴 경찰이 레플리컨트들을 쫓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레플리컨트의 정체성을 폭로한다. 그 레플리컨트는 자신이 인간인줄만 알고 있었다. 레이첼이라는 이름을 지닌 이 레플리컨트는 자신의 정체성에 절망하며 이내 도피자의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러나 은퇴경찰조차도 자신이 레플리컨트였음을 깨달으며 같은 신세가 된다. 데커드가 늘 해오던 것은 타자를 규정하거나 배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끝에 가서는 자신이 그럴 권력이 없었다는, 레플리컨트라는 피지배층으로서의 자각에 도달한다. 즉 이 영화는 데커드가 자신이 레플리컨트임을 "모르는" 것을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내게 반문의 여지를 던진다. 데커드의 정체성이 인간이라면, 혹은 끝까지 자신을 인간으로 알고 있었다면, 레이첼을 포함한 레플리컨트들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었냐는 것이다. 이 해석은 피지배계급으로서의 자각과 연대라는, 동질성에 의존하는 정치적 행위이다. 그래서 나는 데커드의 정체성을 인간으로 놓고 이 이야기의 해석을 밀고 나아가고 싶어진다. 왜냐하면 데커드는 자신이 인간이라는 확신을 가진 채로 레이첼과 도피를 실행하기 때문이다. 그 도피를 실행하는 도중에 개프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유니콘 종이접기를 남긴다. 즉 이 행위의 선후는 데커드의 정체성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진다. 혹은 인간으로서 (자신을 믿는) 데커드가 레플리컨트 레이첼에게 실천하는 행위이다.


데커드가 인간으로서 레플리컨트 레이챌을 포용하려고 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그는 종의 한계를 초월해, 혹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당연한 역학관계를 초월해 움직이는 것이다. 데커드가 레플리컨트로서 레이첼을 포용한다면 이 경우 자기연민의 혐의가 씌워진다. 레플리컨트라는 태생적 동질성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동족보존의 본능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레플리컨트를 구하려는 것은 보다 심오한 차원이 된다. 레플리컨트들을 향한 인간으로서의 시혜적 시선일수도 있지만, 데커드의 동반도피는 종을 초월한 생명의 연대로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멸시받는 이를 포용하며 지켜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영화 상 데커드가 레플리컨트임을 깨닫는 그 순간에 그대로 직결된다. 자신이 인간임을 믿으면서 레이첼을 구하는 도중에, 자신이 레플리컨트라는 걸 깨달았다면 이 정체성의 혼동은 데커드에게 어떤 질문을 던질까. 어쩌면 이 순간이야말로 유니콘이 던지는 진짜 의미일 수 있다. 다른 이를 돕는다고 하지만 사실 그 구원은 우리 자신에게도 직결되어있다는 것. 혹은 우리가 다른 존재의 고통을 깊숙히 이해하고 나서야 자신을 비로서 직면할 수 있다는 것. 우리는 내면의 유니콘을 찾아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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