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의 먼지'

2023.04.30 21:08

thoma 조회 수:240

에벌린 워(1903-1966)가 1934년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이 소설에도 '집'이 주제와 잇닿아 있는 매우 중요한 재료로 등장합니다. 

줄거리가 민음사판 책의 뒷표지에 왕창 다 적혀 있습니다. 중요 사건이 다 적혀 있어서 신경 쓰는 분들께선 뒷표지를 보지 마시고 바로 본문을 읽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아래에 인물들의 갈등 배경을 조금, 뒷부분에는 이 소설의 특이했던 점을 조금 적으려고 합니다. 중요한 사건들을 직접 나열하진 않으려고요.


브랜다와 토니 라스트 부부는 상류층 사람들 치고는 경제적인 여유 없이 쪼들리며 삽니다. 이들의 소유이자 거주지인 헤턴 저택은 지역의 명소로 군 안내서에도 소개가 들어가 있는 고딕양식의 대저택인데 이 저택을 유지하고 끊임없이 요구되는 보수를 하기 위해 수입을 거의 쏟아 붓고 있어요. 저택을 유지하자면 집 안에서 일하는 하인들 15명, 그외 정원사 비롯 고용인이 6명 내외가 있어야 하고요, 상시 수리비도 많이 들거든요. 아침이면 하인이 가져다 주는 식사나 신문을 침대에 누워서 받아드는 일상이지만 어쩌다 브랜다가 런던에 갈 때는 기차표 할인하는 요일을 선택해 갈 정도이니 말하자면 우리집은 가난해, 우리집 정원사도 가난하고 가정부도 가난하고 보모도 가난하고 운전기사도 가난하거든, 이라는 말이 우스개가 아닌 상황입니다. 


여기서 자라고 이 집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남편 토니는 저택이 상징하는 전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저택이 요구하는 삶이 자연스러우며, 지역 목사를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드러나듯(이 목사는 수 년 전 식민지에 나가 있을 때 쓰던 강연문을 상황이 전혀 안 맞음에도 재탕삼탕 씁니다) 세상 변화에 무관심한 것도 당연하고, 외통수의 습관적 일상을 유지하면서 만족스러워 합니다. 저택을 관리한다기 보다 저택에 관리되는 인생 같습니다. 집 구석구석의 금이 간 부분들은 늘상 눈에 들어오지만 아내의 결혼생활에 대한 만족감이 어떤지에는 무딘 사람입니다. 젊디젊은 나이에 사교계와 멀어진 채 취향껏 대화도, 소비생활도 할 수 없는 브랜다의 정신에 균열이 조금씩 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익히 보아 짐작하다시피 브랜다가 그리워하는 런던 사교계의 생활이라는 것도 얄팍한 것이지 않습니까. 여기저기서 열리는 파티에서 얄팍한 연애와 뜬소문으로 유지되는 거품같은 것인데 브랜다는 그런 게 필요한 가벼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택의 융통성 없는 무거움 때문에 더욱 그런 거품같은 생활이 그리웠는지 모르겠어요. 뭐 그리하여 브랜다는 한량에다 마마보이 모씨의 조악함을 애초에 알고 있었지만 그를 통해 런던 생활로 나가게 되고 남편과는 파국을 향해 갑니다. 


소설은 100페이지 정도를 남겨둔 삼분의 이를 지난 지점부터 분위기가 확 바뀝니다. 토니가 다른 환경에 가 있거든요. 워낙 분위기가 달라져서 브랜다 쪽 사정과 교차해 가면서 내용을 잇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작품을 읽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이 부분도 저는 나름 재미있었어요. 

자, 다 읽었거든요. 여기서 특이한 점을 알게 됩니다. 소설이 끝난 뒤에 작가인 에벌린 워가 쓴 글이 '서문'이란 뜬금없는 표현을 달고 또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결말'이 10페이지 붙어 있었습니다. 미국의 한 잡지사에서 연재를 원하면서 제가 위에서 분위기가 확 바뀐다고 했던 뒷 부분을 빼달라고 했다 합니다. 그래서 작가는 거기에 실을 다른 결말을 썼고 그 다른 결말 부분인 10페이지 분량도 수록하였다는 것이었어요. 저는 삼분의 이 지점부터도 나름 재미있게 봤다고 했으나 출판사의 요구도 이해가 되었어요. 삼분의 이 지점인 5장부터는 좋게 말하면 상당히 이색적이지만 냉정하게 보자면 전반부의 작품 흐름이나 기대감을 파괴하는 감도 있습니다. 출판사가 원한 제목은 '런던의 아파트'였다고 하니 더욱 그들이 원하는 내용의 방향을 잘 알 수 있었어요. 에벌린 워가 다시 쓴 '또 다른 결말' 10페이지는 급마무리의 느낌도 있고 냉소적인 결말이긴 하지만 출판사가 원하는 제목에 충실하게 정리됩니다. 

원작의 후반부 100페이지는 그 10페이지에 비해 멜랑콜리가 있으며 안타까움 가득한 기이한 마무리입니다.

저는 두 결말 부분을 연달아 읽으면서 소설의 세계를 창조하는 작가라는 신의 손을 새삼 느꼈습니다. 작가가 직접 한 권의 책 안에 인물의 전혀 다른 인생 행로 두 가지로 결말을 짓는 것을 보는 건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페이지도 잘 넘어가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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