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티비가 전국을 장악하기 전에는 동네마다 지역유선방송들이 있었습니다. 국가에서 유선방송을 장려했던 게 난시청지역을 자기네들 힘 안들이고 땜빵해보자는 수작이었다던데, 애초에 난시청하고 인연이 없는 대도시지역에서는 유선방송이 굳이 있을 필요가 없었죠. 규모도 거의 구멍가게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유선방송들은 시청자를 끌만한-지상파에서는 볼수없는 컨텐츠-를 보여주려고 나름 애썼는데 일부에서는 해외 위성방송을 틀어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위법이었겠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그런거 신경 안썼죠.


우리동네에는 NHK에서 하는 위성방송이 나왔습니다. BS-1, BS-2였는데 BS-1은 NHK답게(?) 수면제 수준의 교양프로그램만 나왔던 것 같고...(실은 재미없어서 거의 안틀어봤기 때문에 기억도 잘 안나는...) BS-2가 그나마 일반 시청자(?)대상의 나름 오락적인 프로그램들이 방송되었는데 그래봐야 KBS-1 수준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전 이 BS-2를 즐겨봤었습니다. 영화를 보려고요.

이 채널을 담당한 높으신 분이 영화오타쿠였던게 분명합니다. 하루에 영화를 최소 한편 이상, 때로는 두세편 쯤 방송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나오는 영화들은 몇가지 원칙이 있었어요.


일단 NHK니까, 광고가 일체 없습니다. 중간에 끊길 일이 없죠.


그리고 가능한한 무삭제 방영. 일본이기 때문에 국내와는 비교도 안되게 심의 기준이 느슨하기도 하고, 일본법상 용납이 안되는 부분은 블러처리를 했습니다. 엔드 크레딧도 끝까지 다 나옵니다.
[피아노]에서 하비 카이틀의 전면이 다 나오는 장면을 우리나라 극장에서는 잘랐는데 전 여기서 봤습니다. 극장에서 봤을 때는 그때 하비 카이틀이 뭔 일을 했는지 이해를 못했었어요. [양들의 침묵]에서 버팔로 빌이 혼자 스트립쇼 하는 장면도 우리나라 비됴에선 잘랐었던걸 전 여기서 봤습니다.


글고, 외국영화라면 무조건 자막방송입니다. NHK의 지상파 채널에서는 영화를 더빙해서 방송했지만 BS-2에서는 무조건 자막방송이었습니다. 그러니 저같은 외국인 시청자는 일본어 더빙의 압박을 받지 않고 편하게 볼 수 있었죠. (장국영 나오는) [백발마녀전]을 여기서 광동어판으로 처음 보기도 했습니다. 그때까지 국내에서는 홍콩영화라면 무조건 북경어 더빙이었기 때문에 처음 듣는 광동어 음성에 살짝 당황하기도 했었습니다. 드물지만 한국영화가 나올 때도 있었고, 내용을 아는 영화는 일본어 자막과 한국어 번역을 비교해볼 수도 있었는데 그당시 한국어 자막도 참 개판이었지만 일본이라고 그렇게 수준이 높은 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글고, 가능한한 원본 화면면비율을 유지합니다. 100% 다 그랬던 건 아닌것 같긴 해도 화면을 잘라서 티비에 맞춰서 방송한 건 제가 기억하는 중에선 딱 한편 뿐이었고 어지간하면 와이드였습니다. 심지어 [벤허]도 원본비율 그대로 방송했습니다. 극장에서조차 보기 힘들었던 2.75:1 화면으로... 이게 지금 와이드 티비로 봐도 좀 많이 허전하다고 느껴지는 화면인데 1.33:1 브라운관 화면으로 보면 화면 가운데다 리본을 쳐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보면서 [벤허] 화면이 이렇게 길었던가...?하고 놀라기도 하고 아무리 그래도 이건좀 아니지 않은가 싶기도 하고 그랬었네요.


지금까지 말한 특징들을 종합하면 시판되는 비됴테입에 비해 떨어지는게 1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위성방송이라 화음질은 더 나았고 시판비됴는 와이드스크린을 찾아보기가 힘들었죠. 그러다보니 일본에서 여기서 나오는 영화들을 녹화해서 파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느날인가부터 화면에 워터마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녹화물을 판매하는 건 위법이라는 안내와 함께...


글구, 뭔가 테마 하나를 설정하면 그걸로 죽 달립니다. 일주일 내내 홍콩영화만 틀어준다든가, 한 감독 작품만 틀어준다든가... 한번은 2주에 걸쳐 그때까지 나왔던 007 영화(브로스넌 나오기전)를 전부 틀어준 적이 있는데... 그 이전까지 전 007 영화를 재미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별 관심도 없었는데 그렇게 한번에 '정주행'을 하고 나니까 하나씩 띄엄띄엄 볼 때와는 다른게 보이고 더 재미있어지더군요. 그 뒤로는 007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스타워즈] 3부작(그때는 깔끔하게 3부작이었습니다)을 사흘에 걸쳐서 틀어주기도 했는데, 그때 전 [스타워즈]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TV나 비디오로 여러번 봤던 영화였지만 제대로된 스코프 화면으로는 그때 처음 봤거든요. 잘 아는 영화이지만 그때까지 알고있던 것과 전혀 다른 영화였습니다.


국내에서는 좀처럼 보기힘든 영화를 볼수 있다는 것도 좋은 점이었죠. 시내 비됴샵을 돌고돌아도 볼 수 없었던 영화. [2001년]이라든가...
호금전의 [산중전기] 3시간짜리 완전판은 아마도 BS-2에서 세계최로 공개되지 않았었나 싶네요. BS-2에서 방송된 뒤에도 20년도 넘게 좀처럼 볼 방법이 없는 레어였던 것 같습니다(지금은 대만영화기구에서 복원한 블루레이가 나와있음)


방학기간이면 오전에 아니메도 하루에 서너편씩 몰아서 방송했습니다. 아동용->비디오아니메>극장판아니메 순으로. 그걸 보고 일본에서 오시이 마모루와 오토모 카츠히로의 위상차이를 알게되기도 했습니다. 오시이의 [공각기동대]는 아동용과 묶음 패키지로 평일 낮에 방송했지만 오토모의 [메모리즈]는 무려 주말 저녁 영화시간대에 방송했습니다.


뭐... 그렇게 몇년정도 열심히 봤었는데... 대형케이블 업체가 지역유선방송을 전부 먹어버리고 통합되면서 BS-2 송출은 중단되었고 그후 한번도 다시는 본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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