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짐승' 읽고 잡담

2023.04.11 20:22

thoma 조회 수:281

1996년에 발표된 소설이고 우리는 문학동네에서 2010년 나왔어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이 책 크기도 좋고(민음사는 가로가 짧아서 저는 좀 불편하거든요) 표지 삼분의 이를 차지하는 검은 색 디자인은 처음 봤을 때 세련된 거 같기도 하고 새로운 거 같기도 한 듯, 이러며 좋게 봤어요. 그런데 각 작품마다 다르게 들어가는 윗 부분 삼분의 일이 가끔 취향에 넘 안 맞는 사진들이 있는데 이번 소설의 표지도 안 맞는 쪽이었어요. 책 내용과 연관된 무슨 의미가 딱히 있는 것 같지도 않고...누구 작품사진인가 싶어서 찾아봐도 적혀 있진 않네요.


저는 다른 서술방식에 비해 1인칭 주인공 화자의 소설을 어려워하는 편인 것 같아요. 다 그런 것은 아니고요, 이 서술방식의 소설 중에 사건 따라가기 보다는 심리 위주인 경우에 독자 자신의 자아를 어느정도 비우고 화자에게 일단은 자리를 내 주면서 믿고 들어가야 하는 입장이 돼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읽을 때의 컨디션이 안 좋으면 자리를 비켜 주려는 여유가 없어지고 이야기를 들어주기 지겹거나 극히 드물게는 속으로 비아냥거리며 읽게 될 때도 있습니다.(나쁜 독자!) 과거에 비해 그런데 아마 사람이 완고해져서 그런가 봅니다.

이런 이유로 예전에 '슬픈 짐승'을 시도했다가 1인칭 화자의 내밀한 사랑이야기라 초반 조금 따라가다 그만 둔 것이겠습니다. 이번에도 그리 수월하게 완독한 것은 아닌데 비염과 싸워가며 꾸욱 참고 한줄한줄 넘어가다 보니 뒤로 가며 재미도 붙으면서 끝을 봤습니다. 200페이지도 안 되는 이렇게 짧은 소설을 오래 끌며 읽은 것은 페이지마다 뭉그적거리며 읽게 하는 종류의 책이라서입니다. 발을 걸고 멈추게 하는 문장들이 많네요.      

자신의 나이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늙은 여성이 현재와 같은, 외부와 차단된 채 수십 년 삶을 살게 만든 이유가 되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소설입니다. 그 사랑의 시작 부분인 과거의 일을 기억해 내는 것이 이 소설의 내용입니다. 

책 사진 아래는 내용이 조금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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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는 죽음과 결부되어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생물학적인 의미의 죽음이 대표적이지만 죽음과 버금가는 이별 상황도 끼워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사랑'이라고 짧게 표현하는 것일 뿐이지 남녀의 사랑이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의미상 맞는 것이겠습니다. 


이 소설의 화자는 아마도 구십이나 백 살일 것이라고 본인 나이를 추측하고 있으며 사랑하는 이의 이름도 잊었기 때문에 그이의 이미지에 가장 가까운 '프란츠'라는 이름을 지어 부릅니다. 많은 기억들을 날마다 지어낸다고 얘기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과 희망 사항과 꿈 같은 것이 마구 뒤섞여버린 상태라고 말합니다. 백 살에 이르기 직전 수십 년을 타인과 접촉없이 생각 속에서만 살았다면 가능한 일일 것 같아요. 화자는 연인이 떠난 후로 인생에 더 이상의 에피소드를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그래서 사람들과의 만남도 연락도 끊고 은행과 시장만 오가며 고립되어 살아왔어요. 본인은 '나의 인생을 끝나지 않는, 중단 없는 사랑 이야기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연인 '프란츠'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화자가 일하던 동독 박물관에 파견을 오게 되어 둘이 만나게 됩니다. 둘 다 기혼인데 화자만 가족들과 어느새 분리되고 오직 프란츠를 바라면서 만나는 시간을 이어갑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 이런 처지에 놓인 다른 이야기의 인물들처럼 화자는 질투, 의심, 소유욕의 고통으로 미치는 상황이 됩니다. 

비슷한 많은 이야기들과 변별되는 점은 회고의 주체가 어느 시점 이후로 사회와의 교류를 단절해 버린 백 세에 이른 노년 여성이라는 것과 동서독으로 분리되어 있다가 장벽 붕괴 후에 각각의 지역을 배경으로 한 남녀의 만남을 통해 그 시대의 변화와 혼란을 반영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시대의 영향을 받는 커플들이 화자의 지인들 비롯해서 몇 커플이 더 소개됩니다. 

사랑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만한 상황과 그에 대한 비유를 한 문장들이 빼곡하게 들어 있는 작품입니다. 사랑이라는 이 정신병적인 상태를 상황으로든 말로든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친구에게서 사랑이 믿음의 문제, 일종의 종교적 광기일 것이라는 말을 들은 후에 생각해 봅니다. 사랑은 우리 안에 남은 마지막 자연성이며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세울 것은 자신의 소망과 믿음밖에 없다고. 그러니까 사랑은 믿음의 문제고 결단의 문제라는 것이고 소설 속의 화자는 자신의 남은 삶을 그렇게 정리합니다.

참, 화자는 자연사박물관에서 브라키오사우루스라는 거대한 공룡의 뼈대를 관리하는 고생물학 전공자인데 멸종한 공룡에 대한 관심이 그 구조물 아래에서 만난 (군집생활을 하는)개미연구가인 한 남자에게로 옮겨갔다는 것도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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