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그 집 앞


 첫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때의 일이군요. 

 경주에 있는 어떤 장애아 복지단체에서 친구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꽤 오래해서

 그 당시 봉사활동을 하러 오는 학생들 중에서도 나름 인지도가 있는 사람 중 한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포항에서 16살짜리 소녀가 봉사활동을 왔습니다. 혼자서 말이죠. 

 표준어를 쓰는 친구였는데, 나중에서야 알았어요. 포항제철 직원들은 대부분 표준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튼 굉장히 갸날프고, 하얀, 그리고 조용한 소녀였습니다.

 전 아무런 연애경험이 없었던, 그냥 평범한 고등학교 3학년짜리 남학생이었구요.

 유일한 대화라고는 그 친구가 조용히 장애우들 방을 닦고 있을 때 건넨 "같이 해요" 이 한마디가 전부였습니다.

 그때까지 별 관심도 없었고, 눈길한번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집으로 가는 길에 그 복지단체의 간사님이 차를 태워주셨어요. 


 마침 그 맞은 편엔 그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잘은 기억이 안나지만, 라디오 방송의 이야기가 나왔던거 같아요.

 전 고등학교 밴드를 하고 있어서, 신해철을 굉장히 좋아하고 있던 그런 겉멋든 락키드였고, 그 친구는 유희열을 엄청 좋아하던 중이었습니다.

 집으로 가는 차안에서는 신해철, 유희열, 윤종신, 윤상 등등의 이야기들이 오고 갔고 그렇게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더랬죠..

 결국 그게 인연이었는지, 고3 소년과 중3 소녀는 풋내기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풋내가 가시지도 않은 말도 안되는 서투른 연애를 시작하면서 서로에게 작은 선물을 했었는데..

 전 받은 것만 기억이 나네요..

 그 친구의 아주 어렸을 적 사진 한장과 바로 유희열씨 삽화집 "익숙한 그 집 앞" 이었습니다.

 그 둘을 건네면서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한장 밖에 없는 사진"과 "가장 좋아하는 책"이라고 굉장히 소중하게 제게 주면서 만약이라도 우리가 "끝나게 되면" 돌려달라구 말이죠.

 저는 무슨 끝이야.. 그런 건 절대 없을거야.. 라면서 첫사랑이 영원할거라고.. 뭣모르는 그런 유치한 위로아닌 위로를 했었던게 기억이 납니다.

 결국 제가 대학교로 진학을 하면서 그 만남은 오래가질 않았어요.

 하지만 그 이후로 제 환상속에서 그 친구는 동화속에서나 살 법한 고운 말투와 착한 생각만을 하는 그런 16살짜리 소녀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연은 참 재밌더라구요.

 실오라기 같은 인연의 끝이 어떻게 남아 있어서, 제가 군생활 하던 시절 그 근처에 살고 있다, 한번 만나자.. 라는 연락을 받게 되고.

 7년만에 헤어졌던 첫 사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너무 예쁘게 자랐더군요. 16살 짜리 소녀가 24살이 되어있으니...

 둘이서 이야기하며 새벽 5시까지, 해 뜰때까지 걸었어요.

 사실 추억이랄것도 많이 남아있지 않은데, 무슨 그런 많은 이야길 했을까...

 

 그리고 나서 찾아온 열병...

 결국 둘이 그 예전의 고등학생과 중학생처럼 다시 돌아가진 못했습니다.

 시간이 둘을 너무 많이 바꾸어놓았더라구요.


 사실 변한게 문제가 아니었죠.

 변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서로 예전의 환상을 가지고 계속 서로를 보게 되는게 문제였어요.


 우리는 이렇게 변했는데, 서로 상대가 변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채 고등학생과 중학생으로 다시 만난거에요.

 결국 추억은 추억일때 가장 아름답다는 교훈을 얻게 된 채 그렇게 7년만의 재회가 끝이 났습니다.

 

 그때 선물받은 사진과 유희열 씨의 삽화집이 지금도 남아있다면, 돌려주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오랫만에 "익숙한 그 집 앞"에 관한 글을 어디서 읽고는.. 옛 생각이 나서 한번 끄적여봐요.


 아.. 유희열씨가 결혼 한 뒤 그 친구는 예전만큼 유희열을 좋아하진 않는다하더라구요..


 세월이 흐르긴 흘렀나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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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그 집 앞 - 굳히기 단계

135번 버스는 우리 집 앞에 선다. 그리고 그녀의 집이 있는 성산동이 종점이다.
어느날 압구정동에서 거나하게 술을 먹고 길을 가는데 영양센터 통닭이 눈에 밟혔다. 집에 혼자 있을 형에게 사다 줘야지.
집에 가려고 서둘러 버스를 탔다. 그런데 깨어나 보니 내가 탔던 135번 버스는 한 바퀴를 돌아 성산동 종점에 서 있었다.
시간이 늦어 차도 끊겼고 통닭을 사 버린 탓에 차비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나 희열인데, 차비 좀 줘." 거리 쪽으로 창이 나 있는 2층 방이 그녀의 방이었다.
작은 돌맹이를 던지자 그녀의 창은 톡톡 소리를 냈고, 잠시 후 드르륵 와일드하게 창문이 열렸다. 그런 모습의 그녀는 처음이었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굵은 테 안경을 끼고 머리는 뒤로 훌떡 깐 모습, 너무 예뻤다.

그녀가 나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받아보니 키세스 초콜릿 봉지였다. 초콜릿은 사랑의 표시라던데.....

벌렁거리는 심장을 자제 시켜며, 초콜릿 봉지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1만원짜리 지폐가 한 장 들어 있었다.
나도 무언가 주어야만 하 것 같아서 담을 딛고 올라섰다.

가까스로 창문으로 손을 뻗어 통닭을 전하며, 로미오와 줄리엣도 이렇게 했겠구나 생각했다.

 

 




뒷이야기.


나중에 들었는데 그때 그녀는 다이어트 중이었다고 한다.

통닭을 방에 두고 소 닭 보듯이 바라 보다가 무를 한 조가 먹었다.그러자 갑자기 입맛이 돌면서 닭다리를 물어 뜯게 되엇다.

그때 처음으로 '희열이는 참 좋은 아이구나'생각했다고 한다.
나는 당시 밴드를 하느라 긴 머리에 가죽잠바를 입고 다녔는데,

그 날은 우연히 머리를 단정하게 자르고 무테 안경을 쓴 얌전한 학생 스타일이었다.

그럼 내 모습을 보고 그녀는 '희열이도 사람이구나' 했다고 한다.

 

 





더 뒷이야기.


그녀와 사귀기 전 나는 성산동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했다.

지나가면서 보았다면 '변두리구나' 할 만한 성산동의 풍경들. 작은 구멍가게, 허술한 호프집, 게다가 서울에 웬 기찻길......
그런 풍경들이 그녀를 사귄 후부터 모두 낭만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성산동만 좋은 게 아니라 버스로 두 정거정 떨어진 모래내까지 좋아졌다.
성산동의 옆에 옆에 옆에 동네에만 가도 그녀 생각이 난다.

 






어머니

 


아버지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평가되지만, 어머니는 아니다.
그저 어머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께 곧장가지못하고 돌아가는길을 택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은 것들 : 뒷머리가 위로 뻗치는 것.
즉흥적인 것. 돈에 대한 감각이 희박한 것.
사고 치는 것(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것).
현실과 타협하다가도 '순수'가 발을 내밀면 그 자리에 서고 마는 것.
살과 피.

만일 어머니가 내 곁을 떠나신다면
나의 꺅꺅거리는 웃음은 영원히 멈출 것 같다.

 

 






우리가 가진 수많은 것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수많은 것들.

하루를 보내면서 내가 지니게 되는 것들은 나에게서 선택받은 것들이다.

여러 안경 중에서 자주 손이 가는 안경.

여러 스킨 로션 중에서 유난히 자주 바르게 되는 스킨 로션.

또 여러 양말 중에서도 너무 자주 신어 구멍 날 지경이 된 양말.

"당신은 왜 그것만 입고 다니죠?" "당신은 왜 그 사람하고만 다녀요?" 하고 묻는다면 글쎄, 뭐라 대답할 수 있을까?

그것들은 내 자신과 나란히 있기 때문이다.

내 내부를 닮아 있고, 그래서 나를 드러내 주기 때문에 한없이 편안한 그 '무엇'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궁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인연?

아무튼 우리는 그 '무엇' 때문에 살 수도 있고 또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이렇게 묻는지도 모른다.

어떤 색을 좋아하느냐고, 어떤 스타일의 사람을 좋아하느냐고, 또 뭘 하는 걸 좋아하느냐고.

그 사람을 둘러싼 모든 것들, 그 사람이 가진 수많은 것들을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그 사람을 지우거나, 아니면 외우거나 한다




 




피아노가 있던 방

 

 

그 방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그 방은 영화 '겨울 나그네'에서처럼 하얀색 이층집에 창살이 예쁜 베란다가 있는 낭만적인 장소가 아니었다.

피아노 한 대가 들어가면 꽉차는, 낡고 허름한 아파트였다.
마침내 학교에서는 서울대 작곡과에 도전하라는 허락이 떨어졌고, 우리 집은 경사 났네 하는 분위기였다.

합격잔치를 미리 치르는 기분으로 어머니께서 피아노를 사 주셨다. 하지만 피아노는 우리 집에 어울리지 않았다.

우리 식구가 잠을 자던 어머니의 가게 뒷방에 들어가기에는 놈의 덩치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결국 피아노를 위한 방을 따로 얻어야 했고, 피아노는 나와 함께 그 방으로 내쫓긴 셈이다.

나는 고3 시절을 피아노가 있는 그 방에서 혼자 보내야 했다.

피아노가 없어서 종이피아노로 연습할 때에도, 피아노와 함께 집을 나왔을 때에도,

어린이 피아노 학원에서 코흘리개들과 함께 레슨을 받을 때에도 나는 무섭게 집중했다.

누구보다 절실했다. 만약 떨어지면 나이트 밴드에 취직해 돈을 벌자고 생각했기 때문에.

구로동, 화양리, 개포동, 그리고 집이 있는 효자동까지 레슨을 받으러 매일 다녀야하는 그길이

비쩍 말라 가는 내게는 지구 반 바퀴만큼이나 멀었다. 버스안에서는 항상 졸았다. 박카스 건네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는 중에 딱 두번 땡땡이 쳤는데 그때 봤던 영화가 '가을날의 동화'와 '겨울 나그네' 였다.

혼자 봤다.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되도록 엉엉 울었다.

나는 두 편의 슬픈 영화를 보는 동안 피아노가 있는 방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내 눈물에 익사해서.

 




 

 

흔적



서울 스튜디오에서 그녀와 함께 녹음을 하다가 나는 그녀를 위해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 주었고, 그 밑에 '만난지 600일'이라고 써 놓았다.

그 사진, 아직도 집에 있다.

어딘가에. 때로는 그 사진을 붙여 놓기도 한다. 벽에.

때로는 에잇! 하면서 버리기도 한다. 쓰레기통에.

그러다가 어떤 때는 그걸 찾아 온 방안을 헤맨다.

그 사진은 아직도 내 방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한 달 동안 계약연애를 하기로 하고 만났다.

그 기간에 나는 많은 일을 했다. 하루는 그녀의 다이어리를 뒤져서 쇼핑 리스트를 훔쳤다.

넘버 어쩌고 하는 향수, 어디어디 메이크업 베이스, 어느 백화점에서 파는 무늬 스타킹....

하루에 그걸 다 사서 그녀에게 갖다줬다.

집 앞에 가서 그녀를 불러내 아이만큼 큰 인형을 안겨 주며

"네가 보고 싶어서 왔어"하고는 그대로 돌아오기도 했다. 유치한 수법이긴 하지만.

나 오늘 월급 탔거든 (내가 무슨 월급을 타?), 내가 봐 둔 식당이 있거든...

그녀를 불러내기 위한 이유도 많았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고 결정의 순간. '그때'가 되었다.

우리는 밤 11시 30분에 통화를 하면서 이렇게 약속했다.

사귀고 싶으면 호출기에 0을 찍고, 그만두고 싶으면 1을 찍지고.
둘다 0이 나오면 다음날 하얏트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둘다 1이 나오면 포장마차에서 밤 10시에 만나 술먹고,

한쪽만 1이 나오면 저녁에 만나 로바다야키에서 술 먹자고.
전화를 끊고 자정이 되기를 기다렸다. 호출기가 울렸다. 0이 다섯 개였다.!

시간을 봤더니 밤 11시 57분이었다.우리는 다음날 하얏트에서 조식을 먹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한 장의 폴라로이드 사진이 되어 내 방 어딘가에 남아 있다.

 

 

 

 

 



덤덤한 그러나 숨길 수 없는 상처

 


이 글을 준비하면서 친구들과 상처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 때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녀가 만날 때에는 이런 우연이 겹쳐서 신비감을 만들지만 헤어지고 난 후에는 이런 우연이 다 상처가 된다.
헤어진 직후에는 오히려 덤덤하다.
하지만 이 경우처럼 전화라든가 어떤 음악, 향기(그녀의 냄새에 나는 집착한다), 또 소식을 전해 듣는 것에 의해

내 상처는 소금 뿌린 지렁이가 되어 대낮의 태양 앞에 드러난다.
그런 날엔 말을 거의 안하고 밥을 잘 안 먹는다. 참, 밥은 원래 잘 안 먹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상처를 너무 잘 숨겨서 그런 왜곡과 그 안의 진실이 하나의 덩어리가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나도 이젠 더 이상 숨길 수 없다. 나가 떨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상처도 즐거움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까.
간혹 가슴이라는 느낌을 그리워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가슴 부위의 통증에 중독됐을 지도 모른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헤어지는 그 순간은 연애의 추억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그녀를 만났던 수백 수천 일중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날도 희미해지고, 그녀의 얼굴조차 희미해지고, 그녀와 내 뒤에 있던 풍경만 남는다.
시간이 지난 후에 두 남녀는 서로의 추억에 대해 다르게 말한다.
연애는 하나였지만 연인은 두 명이므로.

 

  


 

  



'영웅본색'이 우리를 이렇게 망쳤다.




1. 여자를 챙겨 주면 남자가 아니다. 

-여자친구에게 매정하게 대하면 다른 친구들은 '멋있다, 죽인다'를 연발하곤 했다.


2. 의상은 바바리와 청재킷. 단 깃을 세울 것.


3. 8:2나 7:3 가르마가 유치함의 상징이 됐다.

-'영웅본색' 이후 남자들은 가운데 가르마를 하고 다녔다.


4. 친구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해야 한다.

-만일 한 번 만난 적 있는 녀석이 어딜 가다가 돈을 빼앗겼다면 그건 장국영이 죽임을 당한 것과 같았다. 모두 싸우러 간다. 

이기면 그들은 바로 영웅본색이 된다.


5. 도박을 잘 해야 남자다.

-'지존무상'을 보고 난 후 남자아이들은 포커를 치며 놀았다. 

포커 규칙도 제대로 모르는 아이들끼리 "속이지 마" 하면서 눈을 부라리곤 했다. 

그런데 영화와 다르긴 달랐다. 영화에선 먼저 카드 깔면 백발백중 지고, "잠깐" 하는 사람이 결국 이긴다.

하지만 우리가 포커칠 땐 "잠깐" 이란 없었다.그때 누구나 이길 수 있는 상대가 하나 있었다. 

좋은 패가 들어오면 콧구멍이 먼저 벌렁벌렁 움직이던 기용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기용이에게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

6. 약간 웨이브진 직모 유행. 남자들이 핑컬 퍼머를 하기 시작했다.


7. 지포 라이터가 있어야만 했다.


8. 괜히 성냥개비를 입에 물고 다니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9. 담배를 입에 넣었다 뺐다 하는 기술을 연마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남들이 홍콩 누아르에 빠져 위와 같은 행위를 하고 있을 때 

나는 '사운드 오브 뮤직' 을 보며 집에서 커튼으로 옷 만들고 있었다.


 






내 생각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TV에서 '고교생 일기' 라는 드라마를 했다.

어느 날 그 드라마를 보는데 주인공 손창민이 수영하고 나서 은테 안경을 꺼내 떡 하니 끼는게 아닌가.

안경만 끼만 나도 손창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전영록 선배가 끼고 나오던 잠자리 안경도 너무너무 멋져 보였다.

그러나 우리 집 식구는 모두 눈이 좋았고, 나도 당시에는 시력이 1.5였다. 

그럴수록 나의 투지는 불타 올랐다. 나는 안경을 끼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물구나무서서 TV 보기, 한쪽 눈 감고 다니기, TV 화면에 얼굴 비비기, 손가락을 코 위에 올려놓고 시선 모으기, 

컴컴한 방에서 TV만 켜 놓은 채 잃어버린 바늘 찾기,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눈동자는 반대 방향으로 굴리기...


결국 한 달 만에 나는 안경을 쓰게 되었다. 곧 소풍을 갔다.
나는 잠자리 안경을 썼고, 양말이 보이는 짧은 빽바지를 입었다.
장기 자랑 시간에 '그대 우나 봐'를 불렀다. 그날 이후 내 별명은 '전영록' 이 되었다.

가끔 내 코에 걸린 안경을 보면서 반성한다.
내 생각이 항상 옳지는 않다고.






 

이별

 



이별에는 징조가 있다.

헤어질때가 되면 그녀는 까닭도 없이 많이 운다. 

새벽에 통화를 하다가도 갑자기 울고, 식사를 하다가도 갑자기 운다.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 그녀의 울음 앞에서 불안해진다. 


한번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요즘 왜 그렇게 우느냐고.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 좋은 가사 많이 쓰라고 그러는 거야." 

그녀가 비행에서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때 나는 서울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고 있었다. 

밤 10시까지 녹음실을 사용하기로 계약되어 있었는데, 그녀가 8시경에 전화를 걸어 나와 달라고 했다. 

나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그녀가 짜증을 섞어 가며 지금 당장 나와 달라고 하자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같이 있던 친구와 함께 나갔고, 배고픈 그녀를 위해 신촌에 있는 돼지 갈비집에서 고기를 구웠다. 

하지만 그녀는 입에 대지도 않았고, 짜증만 냈다. 

나는 친구가 있으니 나중에 얘기 하자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그날 집 앞에서 그녀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더 이상 힘들고 싶지 않아" 

나는 무릎 아래가 없어진 사람처럼 풀썩 주저 않을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나도 그녀처럼 울게 되었다. 

택시 기사 아저씨가 "왜 그렇게 우십니까?" 하고 물었다. 

"여자 친구가 죽었어요"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여자친구가 죽었다는데 좀 심하게 운다고 나무라는 사람은 없지 않겠는가. 

기사 아저씨는 걱정되어 죽겠다는 눈길을 보냈다. 


그녀의 소원은 비행에서 돌아올 때 내가 차를 갖고 나가서 마중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차가 없었다. 

그녀는 어느 상점에서 본 값비싼 목도리를 갖고 싶어했다. 

너무 비싸서 그녀 자신도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나는 그걸 사 주기 위해 돈을 모았다. 

헤어지던 날 내 가방 속에는 그 목도리가 들어 있었다. 

목도리나 받은 후에 헤어지자고 하지 그랬니?

 

 




 

우린 수다가 필요한 사람들


누군가 옆에 있어 주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그 바람이 너무나도 절박한 경우엔 사실 그 누군가가 아무나여도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굳이 말을 걸어 주지 않아도 좋다.
아무 말이 없어도 그냥 나를 이해해 준다는 표정을 지울줄 아는 사람.
어쩌면 횡설수설 두서 없을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을 정도면 된다.

왠지 무슨 말인가 하지 않으면 내 속에 쌓인 말이 부글부글 끌어 올라 터져 버릴 것 같은 기분.
우리가 그 감정을 사우나 시킬 수 있는 방법은 "수다"다.
수다는 적어도 외롭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래서 수다를 자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느껴지고 또한 정겹다.
그렇게 우린 누구나 수다가 필요한 사람들이기에 누구의 수다든 들여줄 여유가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언젠가 나도 그 사람의 눈치를 안보고 속 편히 수다 떨 수 있게끔 그 기회를 저금해 두어야 한다

 

 

 

 

 

그녀에게 반할 때

 


 

내가 그녀에게 운동화를 사 주었다.

그걸 머리맡에 두고 흘끔흘끔 쳐다보느라 잠을 못잣던 그녀

나는 그녀에게 반했다.


전화기 속 그녀는 나한테 화가 나 있었다.

그녀는 쉬지도 않고 계속 따졌다.

그런데 스윽 연습장 넘기는 소리가 났다.

"너 적어놨니?"물었더니 맞다고 했다.

그녀의 준비성에 반했다.


늦은 시간 집 앞에 찾아갔을 때 그녀는 집에서 입던 옷차림 그대로 화장기 없는 맨송맨송한 얼굴로 나왔다.

나만 볼 수 있는 그녀의 모습에 반했다.


작업하느라 밤을 꼴딱 새우고 다음날 눈을 떴더니 그녀가 있었다.

그녀의 눈부신 모습에 반했다,


이주일 아저씨가 된 그녀, "콩나물 팍팍 무쳤냐?:"

나는 한번만 더 해달라고 무릎 꿇고 빌었다.

그녀의 원초적 유머에 반했다.


노천 까페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을 흉보는데, 그녀와 내가 똑같은 걸 지적할 때 그녀의 독설에 반했다

예쁜 발에 발찌가 매달려 찰랑거릴 때 그녀의 발에 반했다.

그녀와 설렁탕을 먹으러 갔다.깍두기를 국물에 타 먹는 그녀를 보면서 그녀의 식탐에 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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