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일에 대해서

2010.09.06 22:17

raven 조회 수:5980

 게시판 옮긴 지 한참 지나서야 첫 글을 쓰게 되네요. 글은 되도록 안 쓰려고 하고 있습니다만, 게시판은 종종 들러서 눈구경하고 가곤 하는데, 요즘엔 정성일의 평론에 대해 약간의 이야기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성일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처럼 저 역시 애증이 섞인 감정을 갖고 있어서, 마침 기회 삼아 제 생각을 여러 분들과 나눠보고 싶습니다.


 일단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정성일이 좋은 평론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보기에 그가 쓴 글들은 그리 잘 쓴 글들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정성일씨의 이름을 알고 그의 평론들에 관심을 가진 지는 꽤 오래됐습니다만, 감히 말하자면 그의 평론들 중에서 논지가 명쾌하게 드러나고 절로 공감이 가도록 설득력 있는 글은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그의 인터뷰들이나 단평들은 비할 데 없이 탁월합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 정성일은 잠언적 스타일이나 순간의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이지, 긴 호흡의 글을 건실한 논리로 탄탄하게 엮어내는 문필가는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그의 평론은 여러 다양하고 기발하기까지 한 통찰들이 하나의 전체적인 논리 구조 속에 녹아들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한 데 모여 있는 형세를 취합니다(제가 보기에는요). 때문에, 정성일의 장문 평론들은 읽고 나면 거의 대부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거기에 그의 괴상한 문체의 문제가 덧붙습니다. 문체 문제는 정성일 본인도 예전에 어디에선가 고백한 바가 있습니다. 젊은 시절 생계 때문에 번역 일을 하게 되면서 자기 문체가 망가졌다고 말이죠. 제가 보기에는, 그의 문장들이 이상한 건, 자기만의 일가를 이룬 스타일이 있기 때문도, 배경지식, 교양이 풍부해서도 아니고 그냥 못 쓴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문장 훈련을 제대로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할 정도니까요(가령, 아래에서 제가 다룰 글에는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이 때 이데올로기는 이미 소유한 결론을 내세워서 새롭게 드러난 모순을 단지 낡은 문제틀처럼 보이게 만드는 마스크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종종 문제가 구조로 바뀌는 어떤 난처한 교환 관계에 놓인다." 이런 문장은 그냥 번역투가 남아 있는 안 좋은 문장이지, 스타일이 있는 문장이 아닙니다. 전후 맥락을 보면 이해가 갑니다만, 무슨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어서 안 읽히는 것이 아니라 끊어야 할 문장을 너무 만연체로 쓴데다 '마스크 효과'나 '난처한 교환 관계'처럼 무슨 전문용어도 아닌 그저 생소한 표현을 설명없이 집어넣기 때문에 읽기 어려운 것입니다). 가끔 그가 아도르노를 인용하며, 잘 읽히는 글은 사유를 방해하고, 그래서 독자가 사유하도록 독자를 멈춰세우는 글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긴 합니다. 그런데 안 읽히는 글이 다 독자를 사유하게 하는 건 아니니까, 이런 아도르노의 인용만 갖고는 정성일 본인의 글에 대한 옹호가 될 수 없죠. 부자연스러운 문장들을 구사해놓고 아도르노를 들이대는 건 좀 뻔뻔한 구석이 있습니다. 반면에, 정성일의 라디오 방송을 들었거나 아님 강연을 들은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의 말투, 화법은 상당히 독특합니다. 그의 화법, 어조는 스타일이 분명히 있죠.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보기에 정성일은 글보다는 말을 잘 하는 평론가입니다. 


 뭐 이 정도가 일반론이라면, 이 일반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간단한 사례 분석이라고 할까요. 마침 어느 분께서 그의 글 중 마음에 든다고 링크 걸어놓은 글이 있으니 그 글을 한 번 보겠습니다. (http://php.chol.com/~dorati/web/cine21/cine21-660.htm)


문제의 글은, 정성일이 2008년 여름에 쓴, <씨네 21>에 실린 "강철중이 회피하는 것은 무엇인가?-<공공의 적> 시리즈의 반복과 차이를 통해 강우석 영화를 들여다보다"입니다. 제가 이 글에서 우선 지적하고 싶은 것은 논지와 무관하거나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쓸데없이 들어가 있다는 점입니다. 때로는 너무 부당하게 자기의 논지에 아전인수격으로 끌어다 들이는 이야기도 있고, 때로는 현학을 과시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왜 끼워넣는지 의아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선 첫 부분에서 정성일은 강우석이 원본과 그 원본에 대한 두 가지 이형 판본의 방식, 그래서 삼부작의 방식으로 작업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반복하되 차이를 주면서 항상 작업한다는 거죠. 그러면서 예로 자살하는 학교 이야기인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원본으로 하여 반복되며 차이나는 두 판본 "열아홉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노래"와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따위를 이야기합니다. 평론의 주 대상인 "공공의 적" 세 편도 이런 범주에 들어간다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무리하게 세 개로 도식화함으로써, 중간에 놓여 있는 다른 영화들이 다 빠집니다. "공공의 적"만 해도 이 세 편들 사이에 있는 "실미도"와 "한반도"가 빠지죠. 또 "투캅스" 같은 경우엔 강우석이 제작만 맡은 세 번째 영화까지 포함시키고요. 이런 식이라면 그냥 어느 감독이든 필모그래피에서 비슷한 소재를 다룬 영화들을 세 편씩 추려내면 될 일입니다. 강우석이 항상 이런 식으로 영화 작업을 했다는 건 제가 보기엔 설득력이 떨어지는 일반화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일반화해서 하려는 얘기가 '반복하되 차이를 만든다는 것'에 이르면, 이것은 너무 뻔한 얘기 아닌가 싶어지죠. 대중영화 만드는 사람 중에 반복하면서 차이를 만들지 않는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시리즈물, 장르물 전부 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죠. "반복이라는 행위로 되풀이하고, 그 안에서 차이를 우리가 즐기게 만들고 있다. 그건 한국 대중영화 안에서 그 누구와도 다른 방법으로 대중을 유인하는 전술이다"라고 얘기하지만, 저는 이게 왜 강우석만의 독특한 전술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사소한 트집을 하나 더 잡자면, '반복이라는 행위로 되풀이한다'는 구절도 이상합니다. 반복이란 행위를 되풀이한다? 반복이란 행위를 반복한다? 아니면 반복이란 행위를 통해 되풀이한다? 반복이란 행위를 통해 반복한다?). 


 사실, 정성일의 이하 논의는 강우석의 작업 방식의 독특성을 보여주기보다는, 시리즈 영화의 특성을 논합니다. 그리고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 바르트를 끌어들이는데, 제가 보기에는 이 대목에 현학의 과시와 '비슷한' 어떤 것이 있습니다. 정성일에 따르면 바르트는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것은 반자본주의적 행동이라고 얘기합니다. 새 책을 사고 소비하는 게 아니라 있는 책을 또 읽으니까요. 그런데 이 논의를 바로 영화로 가져오면 안됩니다. 책은 한 번 사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읽을 수 있지만 영화는 두 번 보려면 표를 두 번 사야 됩니다. 영화에서 반복관람 행위는 책을 다시 읽는 것과는 달리 반자본주의적 행동이 아니죠. 글의 논의 초점도 이런 반복관람의 이유, 목적은 더 깊은 이해가 아니라 즐거운 경험의 재현에 있으며, 그를 충족시키기 위해 장르 영화, 시리즈 영화가 생겨난다는 점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르트를 인용한 것은, 제가 보기에는 아예 빼버려도 글을 이해하는 데에 하등 지장이 없을 뿐 아니라, 쓸데없는 논점을 추가해서 외려 방해가 되죠. 반복적 독서가 반자본주의적 행동이라는 감당하기 힘든 큰 얘기부터, 책 읽기와 영화관람의 차이라는 문제까지 독자가 생각하게 만들지만 정작 글에서는 이런 논점들은 아예 스쳐가지도 않습니다.


  그럼 정성일은 바르트의 이야기를 왜 넣은 것일까요? 현학을 과시하려고?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한, 정성일은 그 정도의 자기 과시는 이미 졸업한 사람인 것 같으니 말입니다. 차라리, 글을 쓰다가 또는 구상하다가 생각이 꼬리를 물어 연상된 바르트, 쓰다가 논의가 연결되어 떠오른 바르트를 그냥 넣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바르트가 들어간 것은, 이 글이 전체 논지에 따라 잘 퇴고되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정성일 자신의 머릿 속에서 오가는 내적 대화, 독백을 그냥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가설이 좀 더 사태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예 일반화해서, 그의 글 상당수는 이렇게 정성일이 자기 자신과 이리 저리 주고 받은 상념들, 단상들을 옮겨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부터,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자폐성, 분명 대화를 주고 받는 데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질문하는지 모르겠고 어디에서 대답이 되는지 모르겠고 왜 논의가 이렇게 튀어버리는지 이해가 안 되는 그 이상한 사고의 흐름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보통 글을 쓸 때에는 그런 자기와의 대화(이 대화에서는 다 전제되고 생략되는 것들이 많죠)를 거치지만, 그런 독백으로부터 벗어나 타자인 가상의 독자와 대화할 때 최종 원고가 나옵니다. 즉, 혼자 사색할 때에는 설명하지 않았던 것들을 글로 쓸 때에는 다 설명하고 해명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정성일의 글에는 그런 부분이 빠져 있거나 많이 부족합니다.


 여기에서 제 논의를 마쳐도 됩니다만, 조금 더 글을 따라가보죠. 정성일은, 이야기의 원형이 있고 그 이야기의 컨벤션만을 가져온 다음 규칙 안에 변형하는 장르물과 아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시리즈물의 차이를 묻습니다. 그런데, 과연 장르물과 시리즈물이 명확히 구분이 될 것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이에 대한 대답으로 그가 가져온 움베르토 에코의 이야기가 그 차이를 잘 해명해주고 있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에코는, 시리즈물의 재미는 그것이 일종의 게임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뻔한 이야기가 새로운 정보들로 포장되어 반복의 지겨움을 면하게 해준다고 말합니다(정성일에 따르면). 정성일은 이 대목에서 정치적인 논의로 옮겨갑니다만, 그 전에 이런 에코의 인용이 과연 장르물과 시리즈물의 차이를 해명해줄까요? 당연히 시리즈물도 결코 똑같이 반복하지 않습니다. 시리즈물에도 변형이 있죠. 정성일은, "그러나 여기에서 질문하고 싶은 것은 이야기의 모형이 있고, 그 이야기의 컨벤션만을 가져온 다음 규칙 안에서 단지 변형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시리즈물[...]이 등장했을 때 그 어떤 것도 새로울 것 없는 이 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는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그가 에코를 빌어와 이에 대답하는 내용은, 장르물에서 관객이 기대하는 바와 그닥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 얘기는 이렇습니다. 정성일은 방금의 질문 직전에, 성공한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은 장르 영화의 존재론에 대한 고전적 설명이라고 얘기해놓고, 마치 무언가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일 것이 있는 양 방금의 질문을 제기합니다. 시리즈물에서 관객이 기대하는 바는, 장르물에 대한 기대와는 다르다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이후의 내용을 읽어보면 변별점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에코의 이야기도 사실 별반 새로울 것 없이 다들 아는 얘기입니다. 장르물에서 관객이 기대하는 바는 무언가 겉으로는 새로운 것들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 그 구조는 동일하고, 그래서 관객은 차이와 새로움의 표면 하에서 안전하고 또 게으르게 동일한 구조가 반복되는 것을 즐긴다는 것이죠. 이런 이야기는 정성일이 말하는 "장르 영화의 존재론에 대한 고전적 설명"에 이미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그런 고전적 설명(또한 상식적 설명)을 제시하고 자신의 논점(장르 영화 또는 시리즈 영화의 정치성)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 훨씬 좋은 글이 되겠죠. 


 아무튼 이로부터 정성일은 시리즈 영화의 정치성을 논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시리즈 영화는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더라도 결국 동일한 구조 속에 들어가며 이 구조는 모든 문제를 자동으로 해결하기 때문에 새로운 문제가 아예 제기조차 안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거죠. 이건 그냥, 새로움의 포장 속에 있는 불변의 구조라는 장르 영화(또는 시리즈 영화)의 고전적 설명의 다른 판본입니다. 저는 여기까지, 그 전체적인 논지에 있어서 정성일의 글이 별반 새로운 통찰은 보여주지 못하는 대신, 자꾸 논점을 벗어나는 인용들, 쓸데없이 주의를 분산시키는 문제제기들 등으로 인해 읽어내기는 고역스럽다는 점에서, 그닥 좋지 못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의 글이 가진 비경제성을 지적하는 것은, 단지 논술문 형식으로 깔끔하게 잘 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들인 노력에 상응하는 대가 즉 통찰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그의 해석이 얼마나 설득력 있느냐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해두겠습니다. 그의 글 후반부에서 하는 얘기는 간단히 추리자면, 강우석의 "강철중1-1"(또는 "공공의 적")이 어떤 대의, 정의의 명분으로 민주주의적 절차를 무시하며 폭력을 행사할 때, 민주주의의 거추장스러운 절차들에 대한 불만이 표출되고 파시즘의 그림자가 드리운다는 것입니다. 정성일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면서 추가적인 논점을 제시합니다. 강철중은 체제를 대표해서 체제가 낳은 악과 싸우기에, 악과 싸우면서 체제를 유지하려 할 수록 점점 더 악은 체제에 의해 확대재생산된다는 점을 놓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사실 지적할 만한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사소하게는 <리쎌웨폰>이 왜 "흉기"가 아니라 "법의 무기"인가부터해서, 왜 강철중이 법치주의, 절차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대립한다고 이야기하는지 등을 거쳐, 어떻게 영화들과 그 영화들이 나온 시기들의 정치적 상황을 무리하게 도식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정당화되는지까지 말이죠. 그 밖에도 도대체 강우석의 반복 속에서 우리가 즐기는 차이는 뭐고, 그의 독특한 전략은 무엇인지(<더티 하리> 같은 선례가 이미 있죠. 그러니까 제가 보기에, 여기에서 이야기되는 강우석의 차이와 반복은 그냥 안티 히어로 시리즈물의 관습 안에 고스란히 들어가 있습니다) 같은 질문은 다 읽고 난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또 이런 대목은 어떻습니까. "만일 더 역겹게 만들기 위해서 조규환이 아버지를 죽인 다음 알리바이를 내세우기 위해 어머니를 살려두는 대신 이 광경을 본 그녀의 입을 다물게 만들기 위해서 섹스를 한다면 어떨 것인가? 말도 안된다고? 그렇다면 오이디푸스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정성일이 상상하는 상황은 오히려 오이디푸스의 정반대가 아닙니까? 오이디푸스는 친부살해 및 근친상간을 모르고 했고 그 행위에 대한 죄의식을 명확히 인식한 사람인 반면 조규환은 그렇지 않은데 왜 오이디푸스가 그런 상상의 개연성을 뒷받침해줄 사례로 언급되어야 할까요? 오이디푸스가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님은 둘째치고라도, 오이디푸스의 예는 오히려 모르지 않고는 결코 존속살해 및 근친상간을 범할 수가 없다, 인간이 본인의 의지로 그런 일을 행할 수는 없다는 주장의 예가 되어야겠죠. 여기에서 정성일의 사고는 너무 성급하고 엉성하게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적할 것들을 다 지적하자면 이 복잡한 글을 더 복잡하게 파헤쳐야 하니 그만두고, 이 두 논점 자체에만 집중하겠습니다. 사실 이 두 논점은 상이한 것입니다. 전자는, 정당한 명분은 있으되 실질적으로 무력한 제도, 절차, 법에 대한 불만의 문제이고, 후자는 작은 악과 그 악을 낳는 더 큰 악 사이의 갈등이라는, 명분 없는 대립의 문제입니다. 저는 이 두 개가 잘 연결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강철중이 민주주의적 법 절차를 무시할 때, 그는 더 이상 체제의 대표자가 아니라 그 체제가 근거해 있다고 믿는 보다 상위의 차원(정의나 선 같은 추상적 명분)을 대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체제 자체가 바로 형식적 절차의 무력함이란 측면에서 비판당하고 거부당하는 것이, 안티 히어로 영화들의 관습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안티 히어로는 단순히 체제를 대표하여 악과 싸우는 게 아니라 체제와 악 양자를 초월하는 선과 정의의 입장에 섭니다. 강철중은 명분 없는 대립 속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명분 하에서 싸우고 그래서 그가 초반에 보여주는 비리들은 영화 후반에 이르면 사소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건 그저 무력한 절차주의 내부에서나 문제가 될 것들이니까요. 그러므로 정성일은 강철중보다 "추격자"의 엄중호가 더 나아갔고 더 실재에 다가가 있다고 말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강철중은 사실상 비리 경찰로 체제 외부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엄중호는 체제가 악을 확대 재생산한다는 통찰에 이르지 못합니다. 엄중호는 여전히 안티 히어로로서 체제 외부에서 어떤 절대적 명분을 위해 악과 싸우니까요. 이런 안티 히어로 영화의 구조상, 작은 악들을 확대 재생산하는 체제의 악 속에 사로잡힌, 강력해보이지만 꼭두각시에 불과한 집행자의 문제는 제기될 수 없습니다. 그 문제가 제기된다면 그 영화는 더 이상 안티 히어로 영화가 아니겠죠. 정성일은 아마도, 강우석이 안티 히어로 영화의 경계에 서 있고 그 경계의 애매함이 그의 영화들에 주목하게 만든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강우석은 여전히 안티 히어로 영화의 경계 "안에" 있을 뿐입니다. 그가 아무리 그 경계에 가까이 다가간다 하더라도 말이죠. 어쨌든 이쯤에 이르면 이제 제 논의는 강우석의 강철중 연작에 대한 입장 차이, 해석 차이의 문제가 되어 버리니까 여기에서 멈추겠습니다.


  어쨌든, 그가 강철중 연작에 대해 제시하는 해석도 제가 보기에는 그리 명확하지도 설득력 있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강철중 연작에 대해 이런 정도의 이야기라면 이게 과연 그렇게 통찰력 있는 이야기인지 저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다들 느끼고 있는 이야기라고 해서 평론가가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읽는 데 상당한 수고를 들인 결과 얻어진 이야기가 그런 것이라면 그 때는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처럼 저 역시 정성일의 영화를 대하는 진지한 태도, 그의 변함없는 영화 사랑과 열정을 존중하고 존경합니다. 그 태도 면에서 그는 독보적이고 귀감이 될 만합니다. 그에 더해, 그가 영화에 대해 보여주는 미학과 윤리의 관계에 대한 근본 성찰들은 매우 값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그의 글 속에서, 그의 분석 속에서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기보다는 그의 강연이나 인터뷰에서 보다 잘 드러나는 것들입니다. 정성일의 평론들 중에서, 과연 고전적 전범을 보여주었다고 할 만한 영화 분석이나 어떤 독특하고도 체계적인 영화 이론이 있을까요? 정성일은 어쩌면 영화란 무엇이고, 영화 평론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다루는 이를테면 메타 평론에는 탁월하나 구체적인 작품 평론에서는 그보다 못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물론 그의 영화 안목이 뛰어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가 글을 그리 잘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한계를 넘어선 지점에 정성일 이후 평론가의 자리가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한 미디 빠뜨릴 뻔했습니다. 이상의 이야기들은 당연히 제가 그의 글을 보고 이해한 한계 내에서 판단하고 추론한 것들입니다. 제가 그의 글의 진면목을 몰라보고 완전히 오독했을 가능성은 항상 있습니다. 본문에 다소 과격할 수도 있는 표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 모든 것들은 어쨌든 "제가 보기에는"이란 구절의 한계 안에 온전히 놓여 있는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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