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라는 신

2023.01.02 11:42

Sonny 조회 수:439

20221231-213041.jpg


연말에 가족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옹알이만 하던 조카는 훌쩍 커서 이제 여기저기 쿵쾅대면서 마구 걸어다니고 소리로나마 의사소통이란 걸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손가락을 가리키면서 자기가 원하는 걸 딱 고를 줄도 알게 되었고 자기가 맞춘 레고를 가지고 와서 자랑을 할 수도 있게 되었죠. 작년 추석에 봤을 때만 해도 낯가림이 심해서 제가 조금만 다가가면 울기에 바빴는데 그 짧은 시간에 언어와 사교성이 늘었습니다. 인간의 성장속도가 이렇게나 빠를 줄이야.


혹시 신의 정체는 아이가 아닐까? 조카를 보면서 엉뚱한 상상을 했습니다. 아이는 그 자체로 숭배받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가와서 환하게 웃고 기뻐하며 축복을 건넵니다.  아무 것도 안해도 그가 주는 행복에 감사해합니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신을 낸다? 그러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울렐렐레~ 하면서 함께 신을 냅니다. 아이의 기분이 좋은 것은 그 자체로 축제가 됩니다. 반대로 아이의 기분이 나쁘면? 아이를 달래주기 위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동원되어 그 언짢은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를 씁니다. 아이가 기분을 풀 만한 것을 제공하려고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어떤 사람은 인형이나 장난감을 들고 옵니다. 모두가 제각각 공물을 들고 오는 거죠. 


그 중에서 제일 잘 먹히는 건 요상한 표정으로 내는 요상한 소리입니다. 조카가 울고 있을 때 제가 일단 뿌르르르 입술 터는 소리로 주의를 돌리고 얼굴을 변검처럼 마구 바꿉니다. 그러면서 조카님의 찡그려진 얼굴이 계속 그 상태에 머무르지 않도록 제 얼굴을 마구 바꾸면 조카님은 이게 일단 슬퍼해야하는 상황인지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리고 계속 들리는 엉뚱한 뿌드르드르드르 소리에 웃기 시작합니다. 제 동생도 감탄하더군요. 이런 걸 보면 신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정성스러운 기도인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도 '방언'이라는 형태로 신에게만 들리는 자신만의 언어를 계속 말하지 않습니까? 신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보다 독창적인 리듬과 플로우의 기도가 필요한 것인듯 합니다. 


신을 인격화된 존재로 생각한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점들이 생기죠. 생로병사와 갑작스러운 재난은 도대체 왜 멈추지 않는 것일까... 신이 아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설명이 됩니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극히 순수한 상태이지만 그 무지로 온갖 파괴적인 행위도 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아주 기초적인 애정과 선량함이 있으되 타인과 세계에 대한 책임까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바로 아이 아니겠습니까. 아이는 인격체이지만 자신의 행위에 어떤 책임도 안집니다. 그릇을 깨도, 누군가를 때려도, 옷에 국물을 흘려도,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마구 소리내며 울어도 다들 그러려니 합니다. 신을 찾게 될 정도의 불행과 재해가 아이의 변덕이나 무의미한 손짓이라면, 인격체로서의 신은 그나마 이해가 가지 않을까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스타 차일드도 떠오르구요.


사진 속 조카는 블록을 쌓다가 무너트리길 반복했습니다. 잠이 오는데, 어른들이 자고 있질 않으니 자기도 잠을 참아가면서 놀려고 하다가 집중할 수 없는 상황에 짜증을 내던 거죠ㅋ 원래대로라면 블록을 10층정도까지는 쌓을 수 있을텐데 집중이 힘드니까 세개쯤 쌓으면 아이야이야~! 하면서 무너트리고 다시 쌓고... 어쩌면 이게 세계의 구축과 철거 같아서 무섭기도 했습니다. 2022년이 유난히 신의 변덕과 짜증이 기승을 부렸다면, 2023년에는 신의 집중과 평온이 온 세상에 깃들기를 바래야겠지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396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954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555
122276 프레임드 #330 [4] Lunagazer 2023.02.04 109
122275 남아있단 말이 [2] 가끔영화 2023.02.04 130
122274 봄날씨 예고(입춘) [2] 왜냐하면 2023.02.04 200
122273 [티빙바낭]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의 강렬한 성취감(?), '예스터데이' 잡담입니다 [19] 로이배티 2023.02.04 432
122272 역대 대세 여자 아이돌의 계보 [4] catgotmy 2023.02.04 415
122271 [초잡담을 빙자한 탑골] 슬램덩크에서 비롯된 만화책 및 애니 이야기 [8] 쏘맥 2023.02.03 407
122270 저질러 버렸습니다. [4] Lunagazer 2023.02.03 483
122269 프레임드 #329 [4] Lunagazer 2023.02.03 109
122268 용서받지 못한 자 (1992) catgotmy 2023.02.03 214
122267 월급은 마약이다. [6] 무비스타 2023.02.03 603
122266 올겨울 올봄 올여름 올가을 가끔영화 2023.02.03 119
122265 [영퀴] 위아더월드 녹음 망중한 중 나온 노래 [4] 무비스타 2023.02.03 295
122264 [티빙바낭] 이번 옛날옛적 충무로 야심 무비는 '화산고'에요 [18] 로이배티 2023.02.03 570
122263 [듀나in] 예전 곽재식님이 연재하셨던 괴담 시리즈 다시 보는 법 [5] 한동안익명 2023.02.02 421
122262 일본 교토 료칸 겁없는 충동소비 여행^^ (드디어 예약 성공!!!!) 답글 좀!!!! [5] 산호초2010 2023.02.02 543
122261 '이마베프'(1996) 봤습니다. [4] thoma 2023.02.02 408
122260 프레임드 #328 [6] Lunagazer 2023.02.02 91
122259 헐리우드 역사를 쓴 초 특급배우들 [3] 무비스타 2023.02.02 461
122258 스타워즈, 다쓰몰은 죽지 않음 [2] 무비스타 2023.02.02 234
122257 [왓챠바낭] 그래서 순리대로 은행나무침대2! '단적비연수'입니다 [13] 로이배티 2023.02.02 501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