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잡담] 오성과 한음의 유언비어

2011.12.01 15:51

LH 조회 수:2873

 

요 근래 FTA 때문에, 그리고 광우병 때문에 많은 말들이 오가지요. 그런 와중 이런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저거 다 유언비어라고, 몽땅 거짓말인데 어떤 나쁜 사람이 퍼뜨리고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거기에 속는 거라고.

음, 그럴지도 몰라요. 사실 유언비어만큼 진실을 왜곡하고 사람들을 속이는 것도 찾기 드물지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아는 가장 대표적인 유언비어를 이야기해보지요.

 

바로 오성과 한음입니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어째 덜 익숙해도 오성 한음은 입에 착착 붙지요. 아직까지도 많은 분들이 오성과 한음이 어릴 때부터 친구로, 죽은 참새를 위해 제문을 짓기도 하고 같이 말썽을 다 부린 단짝으로 알고 있겠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어요.

그렇다고 믿고 있는 분들은 모두 속고 있는 겁니다!

 

둘은 같은 나이도 아니어요. 오성 쪽이 5살이나 위니까요. 게다가 고향도 달랐습니다.

오성의 어릴 때 친구는 따로 있고(한준겸이나 이호민 등) 무엇보다 한음의 성격이란... 개구장이이기는 커녕 한까칠 왕까칠 더까칠한 성격이지요, 맨날 오성에게 "형, 난 친구 없어요."라고 징징징징 대며 자기 힘든 거만 이야기하는 민폐인간이었으니까요. 만약 장가가기 전에 만났더라면 자기 같이 돈 없고 못 생긴 남자를 어느 색시가 좋아하겠냐고 신세한탄 왕창했을 게 틀림없습니다. 오성은 얼굴 뽀얗고 잘생겼다는 주변인들의 증언이 있지만, 한음은 진짜 무능하게 생겼다고 하거든요. 집이야 둘 다 가난했고.

 

응? 이게 유언비어냐고요? 맞잖아요. 전혀 사실도 아닌 게 널리 퍼지고 믿어지잖아요.

민담의 역사 쪽을 본다면, 조선시대 중기 이후 난립하던 "어리지만 영특한 아이"의 설화들에 오성과 한음의 이름이 넣어지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이후로 무진장 우려먹어졌어요.

 

그래서일까요, 고종임금이 한음의 5대쯤 후손 이병교을 만나 "오성과 한음 어릴 때 부터 친구였지?"하고 묻자 후손은 아닌데요, 하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았는지 고종이 캐묻자 다시 아니라고 하는데... 임금 앞이니까 꾸물꾸물 기어나오는 짜증을 꾹 참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얼마나 짜증났겠어요. 꼬꼬마시절 놀러나가면 친구들이 물어봐, 술자리 나갈 때 마다 사람들이 캐물어, 과거 급제해서 취직하니 임금님마저 물어보잖아요. 눈까지 초롱초롱 빛내면서.

그 심정 잘 알아요. 마치 새 사극 드라마가 시작한 뒤 "조선시대 때 비밀기지를 아지트라고 불렀어?"라는 질문을 받는 사학과 학생의 심정이지요. 상대가 왕만 아니었다면 성질 빡! 냈을 겁니다. 선조님 성깔도 그랬거든요.

 

아무튼.

일부의 현명한 사람들은 이 헛소문을 의심하곤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정조 임금님이지요. "오성 이야기, 그게 다 어떻게 사실이겠어." 라고 말하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그보다는 철썩같이 날조된 헛소문 - 오성과 한음 *알친구설을 믿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지금까지도요.

 

그런데요, 왜 이렇게 헛소문이 널리 퍼지게 된 걸까요.

저도 처음에는 진실의 복음(?)을 전파하고자 힘을 쏟았지요. "사실은 이랬어!"하고 사방팔방 알렸건만, 영 효과가 없더군요. 모두들 처음에는 "그랬어?" 하더니 그 뿐이어요. 나중에는 농담섞인 항의까지 들었어요. 나의 오성과 한음은 그러치 아나-! 라고. 어릴 때의 추억을 망가뜨리지 말아달라는 부탁까지 있었어요.

조금 지난 다음에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은 ‘굳이’ 진실을 원하지 않았어요.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듣고 그걸 그대로 믿을 뿐이지. 사실 오성과 한음이 친구든 아니든 어차피 서로 죽고 못사는 사이였던 건 맞으니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기도 하고. (응?)

이런 과정을 겪고 생각하니 유언비어라는 게 이전과는 조금 달리 보이더군요.

한 번 생각해봄직하지 않나요. 왜, 유언비어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지를.

사람들이 원하기 때문일거여요.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를 보며, 옛날 옛적 뛰어놀던 내 어린 시절이 기억나기도 하고, 그런 친구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도 들게끔 하고요. 그러니 사실이 어떻건 오성과 한음의 이미지는 어린 악동 그대로 남는 겁니다.

 

그러니까, 소문에는 사람들의 '바램'이 있는 거지요.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라는.

 

사람의 역사를 보면 아주 많은 유언비어들이 있었지요. 훨씬 더 위험하고 자극적이며, 위험하고 정치적이었던.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이 살아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세계의 역사로 범위를 넓혀보자면 진시황이 여불위의 자식이래더라, 라는 말도 있었지요.

이처럼 사실과 별 상관없는 이야기건만 나름의 근거를 두고, 혹은 근거 없이도 끈질기게 살아남고 또 전해지지요.

사람들은 때로, 진실이 어떻든 상관없이 자기가 믿고 싶어하는 것을 믿을 때가 있습니다. 갑자기 세상을 떠난 정조가 사실은 노론의 악당들에게 독살당한 것이라는 소문은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정약용에겐 그냥 헛소리로 들리진 않았을 겁니다. 이를 갈면서 들었겠지요.

그러니 유언비어가 퍼져서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불안해하니까 유언비어가 깃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힘있고 높으신 분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고 이런 유언비어만 때려잡으면 만사형통이라 믿고 무던히도 애를 썼지요. 효과가 있었는지는 아리송하지만요... 다음에는 언론탄압으로 적어볼까 합니다.

 

p.s : 모 님에게 답변할 글 적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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