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한 피아노의 세계...

2022.12.21 06:12

여은성 조회 수:470


 1.사실 피아노에 대해 잘 몰라요. 학생 수준에서도 피아노를 잘친다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죠. 그리고 피아노를 쳐본 경험에 의하면, 피아노는 한달만 안 쳐도 손이 완전히 굳어버려요. 바이올린은 한 15년만에 잡아도 어느 정도는 뭔가 되거든요. 



 2.바이올린은 학생수준에서는 잘한다는 말을 들어봤고, 바이올린은 완벽하게 컨트롤이 될 수 있는 악기라고 생각해요. 연습만 제대로 하면 곡을 100번 돌리든 200번을 돌리든 한 음도 나가리되지 않고 켤 수 있죠. 내가 바이올린에 자신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바이올린은 컨트롤할 정보량이 그렇게 많지 않은 악기니까요.


 한데 최고수준의 프로들도 어느 정도는 틀리긴 하잖아요? 다른 분야는요. 메시도 드리블하다가 헛발질이 나오고 김연아도 가끔은 넘어지고요. 그야 상대가 있는 경쟁이고 매번 상황이 갱신되니까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완전히 멈춘 상태에서 던지는 커리의 자유투도 빗나가곤 하죠. 커리라면 임윤찬급을 훨씬 넘은 농구의 거장인데, 완전히 제어된 상황에서 던지는 자유투도 빗나간단 말이예요. 타이거 우즈같은 골프 거장의 짧은 퍼팅도 빗나가곤 하고요. 



 3.그림도 그래요. 아무리 손의 힘과 섬세함이 최고조의 작가라도 선을 잘못 긋거나 터치가 잘못 들어가는 경우는 있어요. 그러한 '헛손질'을 보완하는 도구들이 있고, 컴퓨터로 그릴 때는 컨트롤 제트로 되돌릴 수 있죠.



 4.휴.



 5.그런데 내가 보기에 피아노의 세계는 실수에 대한 기준이 너무 가혹하단 말이죠. 연주회를 하면 몇 시간동안 피아노를 쳐야 하는데 그 중에 음이 하나라도 삑사리나는 게 용납이 안되잖아요? 물론 중간중간에 일반인이 알 수 없는 수준의 삑사리는 늘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음이 벗어나는 사고가 단 한순간이라도 일어나면 그 연주는 실패로 규정돼요. 


 피아노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이건 진짜 이상해요. 연주자들이 치는 곡은 거의 고속이거나 초고속 곡들이 많고, 양손을 고속으로 돌리는 이상 몇 시간동안 몇 번 정도는 확실하게 삑사리가 나야 하거든요. 다른 분야였다면요. 피아노란 건 단 한순간만 집중력을 잃거나 잠깐 뇌가 꼬여버리면...아주 느린 곡을 치고 있지 않은 이상, 인간의 반응속도로는 수습할 수가 없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피아노 선수들은 거의 틀리는 걸 못봤어요. 다른 분야는 거장 수준의 플레이어들도 꽤 실수가 잦거든요. 피아노처럼 양손으로 완벽한 컨트롤을 해내야 하는 분야가 드물어요.



 6.그리고 피아노가 가혹한 건, 노쇠화가 용납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림의 경우에는 전성기보다 더 거칠고 투박해진 표현력으로도 '이게 거장이다!' '더욱더 진화한 거장의 표현력이 보이지 않나!'라고 이빨을 까잖아요? 한데 사실 그건 포장이예요. 기술적으로나 피지컬적으로 투박해져서 그림이 그렇게 된 것도 '거장의 진화'라고 포장하는 게 가능하니까요. 


 축구도 그래요.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공을 몰고 달리던 선수들이 늙어버려서 괜히 롱패스를 날리면 '축구 천재가 축구 도사가 되어가는 중이다'라고 팬들이 포장질을 하죠. 사실은 뛸 체력도 안 되고 속도도 떨어져서 축구도사인 척, 미래를 보는 척 하면서 롱패스를 날려대는 건데 말이죠. 늙은 스타플레이어가 무책임한 롱패스를 날려도, 그걸 받지 못한 젊은 선수에게 야유가 쏟아지곤 해요. '축구천재의 의중을 읽어내지 못한 평범한 놈'이라면서 말이죠.



 7.한데 피아노라는 건 그런 식으로 속일 수가 없어요. 기본적으로 표현해야 되는 음과 내어야 하는 속도가 있으니까요. 늙은 피아니스트여도 음 하나하나를 분명하게 강약조절하면서 속도도 전성기 못지 않은 속도로 손가락을 놀려야 하죠. 그게 내겐 35살의 로벤에게 22살의 로벤이랑 같은 속도로 뛰라는 거랑 같아 보이거든요.


 그런데 피아노는 그림처럼, 추상적인 표현이 용납되지 않아요. 도는 도고 미는 미. 포르테는 강한 것이고 포르티시모는 아주 강한 것. 아첼레란도는 점점 빨라져야만 하죠. 강한 건 강한 거고 빠른 건 빠른 거니까요. 아무렇게나 연주해 놓고 '어떠냐? 진화한 거장의 연주가?'라고 얼굴에 철판을 깔 수가 없단 말이죠. 피아니스트는 그냥 악보에 써진 대로 잘 치는 게 기본이니까요.


 피아노 영상들을 보다가 예전부터 궁금했던 점을 한번 써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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