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진스 Ditto 뮤직비디오를 보고

2022.12.19 22:05

Sonny 조회 수:1226




이번에 뉴진스의 두번째 앨범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뉴진스는 과연 뉴진스 자신의 전작인 Attention과 Hype Boy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가. 뉴진스의 가장 강력한 적은 르 세라핌도, 짱원영의 아이브도 아니고 소포모어 징크스를 예견하는 뉴진스 자신의 성공이었습니다. 제가 프로듀서는 아니지만 아마 민희진은 아이브나 르 세라핌, 그리고 블랙핑크나 트와이스나 레드벨벳을 크게 심려하진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이들은 민희진이 새로 구축하려는 이미지의 '반례'로 활용될 수 있겠지 큰 위협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이브가 아무리 큰 히트를 친다고 해도 좋다는 느낌 이상으로 뉴진스만큼의 음악과 이미지의 충격을 새로 주진 못할테니까요. 


이번 Ditto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민희진의 야망에 대해 꽤나 일관되는 단서를 하나 얻은 것 같습니다. 민희진은 케이팝 아이돌 씬에서 '소녀'의 이데아를 재정립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박찬욱이 '아가씨'란 단어를 재정의하려고 했던 도전과도 살찍 궤가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민희진의 경우 그 야심은 꼭 정치적이라고는 할 수 없겠으나 이 사람은 '소녀'라는 개념을 훨씬 더 신비하고 아련한 무엇으로 구체화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걸 역으로 증명하는 사태가 바로 Cookie의 미성년자 성적 착취 논란일텐데, 평소에 프로듀서로서 자신의 의중을 드러내지 않는 민희진이 그 때만큼은 정말 발끈해서 조목조목 반박문을 써놓았죠. 어떤 사람들은 창작자가 자신의 의도를 그렇게 밝히는 게 별로 현명하지는 않은 것 같다는 지적을 했지만 그걸 민희진이 모르진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그것은 민희진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당한 곡해이면서 기획자로서 자신의 숙원에 완전히 반대되는 해석이기 때문에 민희진이 참을 수 없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가 생각하는 '소녀'에는 도발적이면서 앙큼한 캐릭터도 당연히 포함이 됩니다. 민희진의 세계에서 '소녀'는 신비한 존재이거든요. 우리가 섣불리 상상할 수 없고 일반적인 욕망의 틀을 깨버리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현재 남성의 욕망에 복무하는 편한 알리바이로 팔려나가더라도 아직까지 사회 통념 상 소녀는 감히 성적인 주도권을 쥘 수 없는 존재입니다. 민희진의 '소녀'들은 감히 어떤 남자를 tantalizing하면서 희롱의 권력을 쥔 존재를 묘사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cookie는 은밀할지언정 남성청자의 입장에서 성적만족감을 일으키는 노래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남초에서도 '뉴진스 섹시하다' 따위의 감상이 유행하지 않았습니다. 민희진의 그 '역정'이 그가 현재 소비되는 소녀의 이미지를 얼마나 초월하고 싶어하는지를 보여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번 Ditto의 뮤직비디오는 아직 10대들인 뉴진스를 90년대의 시간대로 날려버립니다. 뮤직비디오 속에서 이들은 아무도 스마트폰을 쓰지 않습니다. 이들은 뻔뻔하게도 '피크닉'을 마시고, 90년대 스타일의 옷을 입고 누군가의 캠코더 화면 안에서 춤을 춥니다. 가끔씩 깨져버리는 이 저화질의 화면 속에서 뉴진스는 과거 속의 애상을 획득합니다. 유튜브에서 어떤 사람들이 조금 짓궂게 '탑골공원'이라고 부르는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의 아이돌들 무대를 보면서 떠올리는 그 애상을, 이 뮤직비디오를 통해 현재진행형으로 현재 세대에게 불러일으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뉴진스는 끽해야 2집을 내놓은 신인인데도 아주 오래된 기억속의 존재인 것처럼 그립고 아련한 느낌을 주게 됩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혹은 언젠가 사라져버렸던 존재인 것처럼 그리움을 품게 되는 거죠. 이것은 단순히 기획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의 성공이 중요한 부분이겠지만 어쨌든 민희진의 이 컨셉은 분명히 먹혀들어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요즘 들어 거의 모든 노래가 나르시시즘의 테마로 뒤덮여있습니다. 그건 단순히 가사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과시적인 음악 스타일 자체의 관점이기도 할 것입니다. 걸그룹의 뮤직비디오에는 항상 자신을 찍는 카메라나 자기가 찍는 셀피 속의 자신이 등장합니다.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자신의 모습과 남이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의 나열 속에서 이 자기애의 테마는 거의 무한반복되다싶은 피로까지 일으키는데, 여기에서 뉴진스의 Ditto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갑니다. 그건 자신들을 과시하는 게 아닙니다. 과시는 만인에게 자신을 사정없이 전시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뉴진스는 반대로 자신과 특정한 개인과의 독단적인 관계를 만들려고 합니다. 인스타그램, 틱톡, 트위터 등 자신을 모르는 수많은 낯선 이들에게 자신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미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이 자신들을 볼 수 있고 자신들을 느낄 수 있다고 배타적인 관계를 형성하려고 하는 거죠.


뮤직비디오의 질감과 큰 줄기의 서사를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익숙한 레퍼런스들을 떠올렸을 겁니다. 제가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은 이와이 슈운지의 [러브 레터]와 [하나와 앨리스]였습니다. 이 90년대의 감성은 수많은 타자를 이미지의 권력으로 굴복시키는 요즘 세대의 감성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나만 아는 당신, 혹은 내가 몰랐던 당신을 파고들며 더 깊고 은밀한 이해로 이끄는 감성이죠. (일찍이 민희진은 핑크 테이프로 에프엑스에게 신비감을 부여한 적이 있습니다) 혹은 2000년대에 나름 인기를 끌었던 대만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도 떠오릅니다. 핵심은 은밀함입니다. 유튜브의 시청횟수 혹은 인스타그램의 좋아요 숫자로 표현되는, 그 양적인 파괴력과는 완전히 반대의 방향으로 민희진은 뉴진스를 이끌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레트로 작품들과 동일선상에 놔둬야할지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민희진은 1990년대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2020년대의 10대 아이돌들을 1990년대에 이식하려는데 진심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90년대의 풍경을 한 여중생의 유년기 기억으로 복원했던 영화 [벌새]의 주인공 박지후를 뮤직비디오 속 카메라걸로 등장시키면서까지 그 때의 질감을 재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보통의 레트로는 현재 시간대의 누군가 과거의 무언가를 완전히 재현하는 것을 포기한 채 일종의 패러디 개념으로 그걸 구현합니다. 그러니까 레트로에는 항상 일정한 '구닥다리'의 느낌이 있습니다. 그 구닥다리 느낌은 현재의 트렌드와는 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음입니다. 그러나 Ditto의 뮤직비디오에는 그 불협화음이 거의 없습니다. 민희진은 마치 뉴진스가 1990년대의 아이돌인것처럼 착각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엄청난 효과가 생깁니다.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우리가 뉴진스를 그리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뉴진스가 1990년대에 활약했고 지금은 은퇴든 뭐든 어떤 이유로 사라져버린 뉴진스를 다시 보지 못하는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킵니다. 뉴진스는 이제야 두번째 앨범을 내는 신인입니다. 심지어 예능 활동도 거의 안해서 노출도도 그리 높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뉴진스를 민희진은 아주 오래된 존재이고 기억 속에서만 살아있는 존재인 것처럼 노스탤지어를 자극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말하면 미래 시점의 팬심을 자극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제로 10년후, 혹은 15년 후쯤 뉴진스가 지금처럼 푸릇푸릇한 모습을 완전히 탈피했을 때 되돌릴 수 없는 2022년의 이 모습을 그리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민희진이 그리는 '소녀'의 이미지입니다. 소녀의 소小는 불멸의 속성이자 영원한 상징입니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것은 절대로 늙거나 퇴색되지 않습니다. 기억 속에서, 흘러간 시간 속에서 소녀들은 영원히 앳되고 빛납니다. 왜냐하면 그 때 그 모습 그대로 과거에 박제되어있으니까요. 소녀는 영원히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마 Ditto의 뮤직비디오 속에서 관찰자를 맡고 있는 주인공이 다시 한번 비디오 테이프의 먼지를 털어내고 그것을 재생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화면 속의 소녀들은 다시한번 관찰자의 시점 안에서 완벽한 현재형으로 되살아납니다. 


민희진이 소녀의 이데아를 완성하기 위해 내딛은 발걸음은 '앞'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여자아이돌들이 더 짜릿하고 새로우면서 트렌드에 앞서나가는 이미지를 지향할 때, 뉴진스는 과거로 회귀합니다. 그런데 그 과거가, 본인들이 태어나지도 않았던 과거입니다. 이것은 민희진이 써내려가는 일종의 자해에 가깝습니다. 잃어버린 적 없는 뉴진스를 우리가 마치 잃어버린 것처럼 전제하고 그걸 되찾게 만들게끔 하고 있습니다. 아마 큰 팬이 아닌 저에게도 충격적인데 뉴진스의 팬들에게는 엄청나게 아릿한 이별로 다가오겠죠. 


A면과 B면이 따로 있는 이 뮤직비디오의 형식은 라틴어 Ditto의 언어적 형식을 반복하려는 형태일 것입니다. 이 형태가 어떤 감흥을 일으키는지는 뮤직비디오를 몇번 더 보고 써야할 것 같습니다. 이 뮤직비디오는 지금 당장이 아니라, 10년 후 혹은 20년 후에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정말로 이 시절의 뉴진스를 잃어버린 미래의 사람들이 다시 볼 때서야 본격적으로 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특유의 덕후감성은 '소녀'라는 특정한 시기에 유난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민희진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기획일 것입니다. 


@ 90년대를 수놓는 커다란 상실의 사건들이 있었지만 저는 일단 서태지의 은퇴가 떠오릅니다. 아마 2022년 현재까지 다 통틀어봐도 한 아이돌 스타와 팬이 경험했던 가장 파격적이고 갑작스런 이별이었으니까요. 


@ 두서없이 막 갈겨서 좀 중구난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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