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포즈 논란 중간 정산

2014.04.15 23:09

commelina 조회 수:3751

애초에 평화로운 게시판에 망글하나 올려서 파이어를 불러온 장본인으로, 몇몇 분들이 감정상해 하시는 것을 보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또 별 것도 아닌 걸로 쟤들 왜 저러고 치고받고 싸우냐고 느끼실 분들께는 죄송한 마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겠지만 나름의 소영웅주의의 발로로 논쟁을 생산적인 방향으로 이끄는게 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지금까지의 논쟁을 제 나름대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최초의 제 문제제기는 (어떤) 프로포즈는 결혼이 결정된 뒤에 하는데, 시기상 이상하고 프로포즈하는 남자로 하여금 거짓에 가까운 '진심'을 강요한다, 이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부는 공감을 표시하셨습니다만, 일부는 사생활이므로 제3자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사후 프로포즈가 그다지 보편적이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문화 현상 일반에 대한 비평은 제3자에 대한 간섭이 아닙니다. 댓글로도 단 바 있지만, 제가 만약 장동건의 고소영에 대한 프로포즈를 특정하여 그 프로포즈의 이상함을 주장했다면, 할 수는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오지랖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사후 프로포즈가 상당히 널리 퍼진 문화인 것으로 보이고, 많은 예비 신랑이 원하지 않는 사후 프로포즈로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후 프로포즈는 충분히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고, 그 문화에서 논쟁거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 입장에서는 '제3자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라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후 프로포즈가 제 생각과는 달리 일부의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 주장은 허물어질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이 문제와 관련한 신뢰성 있는 조사는 없는 듯 하므로 어쩔 수 없는 약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후 프로포즈의 맥락에 대하여 설명하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의외로 결혼하는 커플들이 결혼의 결정이라는 부분은 두루뭉술 넘어가고, 바로 바쁜 결혼 준비 단계로 넘어가 버린다는 겁니다. 따라서 프로포즈의 기원과 어원을 생각하면 좀 이상하지만, 결혼의 결정 단계를 확실하게 하고 둘의 애정과 다짐을 확고하게 하는 차원에서 사후 프로포즈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프로포즈의 기원과 어원에 집착하기 보다 의식의 취지를 강조합니다.


저는 일리있는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위의 취지라면 약혼식이라는 지금은 잘 보이지 않는 형태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분들이 말씀하시는 취지에 더 부합합니다. 그러면 현재에 약혼식은 약화되고(제가 보기에는 거의 없어진 것으로 보이고), 프로포즈가 주도적인 의례로 나타났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몇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제 생각에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아마도 "프로포즈가 예비신부의 판타지에 더 잘 부합하는 이벤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 근거는 직관에 의존하기는 하는데, 제 생각에는 많은 남자들은 약혼식이든 프로포즈이든 (심지어 결혼식이든) 이러한 의례에 큰 관심은 없어 보인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남은 상대방이 원한다가 답이 될 거라는 겁니다. (이 주장에 최근 격화되고 있는 여성비하나 "무개념" 논란은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결국 사후 프로포즈라는 의례는 이 지점에서 예비 신부가 원하는 "연극"이 됩니다. 부연하자면, 프로포즈의 주된 형식이 "우리는 사랑하고 앞으로 결혼할거야"가 아니고, 일방의 "(이미 결혼하기로 했지만) 나랑 결혼해 줄래"와 그에 따른 승낙과 정서적 동요이기 때문에 연극이라는 겁니다. 많은 의례가 있고 대부분의 의례들은 특정 감정을 강요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사후 프로포즈는 유독 명시적으로 거짓말(도덕적 판단을 필요로 하는 거짓말이 아니고, 결혼이 결정된 상태에서 결혼의 승낙을 묻는다는 의미에서)을 해야한다는 특이점이 있습니다. 사후 프로포즈가 이상하다고 하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위화감을 크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후 프로포즈가 여전히 필요하다고 주장하려면, 프로포즈 특유의 남다른 유용성을 제시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많은 의례와 마찬가지로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방법은 내가 프로포즈를 원한다는 감정을 솔직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너무 나가지 않았나 하는 걱정은 들지만, 아무튼 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그러면 프로포즈를 원하는 감정이란 무엇일까요? 아마도 우리의 결혼이 지구상의 수많은 결혼 중 단지 하나가 아니라, 둘의 사랑으로 특별해지고 유일해지는 결혼을 원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고, 프로포즈는 그 사랑을 확인하는 가장 극적인 형태라는 점이 있을 것입니다. 내 결혼에는 극적인 순간이 필요하고, 그것이 어렵다면 그야말로 연극으로라도 극적인 순간을 만들고 싶은 감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극적인 형태가 하필 (일반적으로) 남자의 구혼 - 여자의 승낙인지에 대해서는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또다른 주제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898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4413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3250
126162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을 보았어요. [2] jeremy 2024.05.07 183
126161 드레이크 자택 주변에서 총격 daviddain 2024.05.07 221
126160 뉴욕 미니트 (2004) catgotmy 2024.05.07 63
126159 프레임드 #788 [4] Lunagazer 2024.05.07 50
126158 던전밥 만화책 완결. [10] 잔인한오후 2024.05.07 295
126157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가 디즈니 플러스에 올라와 있습니다. [3] 조성용 2024.05.07 263
126156 닥터 드레,스눕,50센트,메리j.블라이즈,에미넴,켄드릭 라마 수퍼 볼 공연 daviddain 2024.05.07 77
126155 삼식이 삼촌 메인예고편 상수 2024.05.07 160
126154 [웨이브바낭] 스릴러인 줄 알고 봤더니 드라마였던. '공백' 잡담입니다 [2] 로이배티 2024.05.07 215
126153 자기중심적 사고의 폐해(내가 옳다는, 그 환상) [1] 상수 2024.05.06 355
126152 프레임드 #787 [2] Lunagazer 2024.05.06 56
126151 켄드릭 라마 ㅡ 드레이크 [6] daviddain 2024.05.06 258
126150 '쇼군' 잡담 [4] thoma 2024.05.06 345
126149 Bernard Hill 1944 - 2024 R.I.P. [2] 조성용 2024.05.06 144
126148 이런저런 잡담...(도파민, sk 조카 유튜브) 여은성 2024.05.06 175
126147 [넷플릭스바낭] 한국 교포 영화 3부작(?)의 마무리는 순리대로 '미나리'입니다. [16] 로이배티 2024.05.06 386
126146 시간 순서대로 기사를 정리해 본 하이브 대 민희진의 갈등 정리 [2] Sonny 2024.05.05 310
126145 민희진에 대해 떨치면 좋을 편견들 [2] Sonny 2024.05.05 512
126144 민희진 기자회견 두시간 풀로 시청한 소감 [8] Sonny 2024.05.05 661
126143 New Order - The Perfect Kiss (Official Music Video daviddain 2024.05.05 5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