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언더 더 스킨》 출간 기념 이벤트를 목적으로 쓰였습니다.

- 안 읽으신 분들은 이벤트 글을 읽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잘못 파악한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읽는데 방해가 되는 사전지식을 세 번이나 얻을 수 있도록 출판사에서 배치한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먼저는 언더 더 스킨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나와 있는 이벤트 내용, 두 번째는 띠지 내용, 마지막으로는 맨 앞에 배치된 서문이 바로 그겁니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나중에 배치된 역자 서문은 직접적으로 그 내용을 제시하진 않지만 책의 3분의 1동안 작가가 무언가를 암시할 거라는걸 전해줍니다. 전 그걸 보고 바로 서문을 넘겼지만 그걸 보지 않고 넘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또는 이미 늦어버리지 않았나 싶었죠. 그리고 띄지에는, 또한 이벤트 설명에는... 어쨌던 이런 불쾌함에 소설 중반까지 몰입이 불가능했습니다. 과연 이게 블랙 코미디로 부르기에는 아주 격식차린 SF에다 묘사도 하드보일드 하지 않은가 싶기도 하고, 그 많은 사전 설명들로부터 독자들에게 도망가! 라고 소리지르고 싶은 마음이 욱신욱신 들었죠. 띄지를 벗겨낸 책을 도서관에서 만나게 된다 하더라도 서문을 꼼꼼히 읽는 독자를 구해낼 수 없을꺼라고 생각하고. 이후 부터는 정말 [내용있음]이니 불필요한 사전지식을 얻기 싫으신 분들은 그만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어쨌건간 작가가 의도치 않은 식으로 내가 읽을 수 밖에 없지 않았나 싶은 강박관념이 절 중반 내내 괴롭혔고, 이미 알아버린 사실로 책을 읽어나가는 걸 모른체 하며 읽을 수는 없는 것 아니니 복잡하기 그지 없다, 등의 이마에 범인이라고 적혀있지만 추리만화를 끝까지 다 읽어야만 되는 독자의 심정으로 계속 읽었고 그런 신경증이 책을 몰입해서 읽지 못하도록 만들더라구요. 그렇다고 책 한 권을 읽는데 한달은 너무 길었다 싶기도 하고. 몰랐으면 더 재미있었을텐데 하며 입맛을 쩝쩝 다시며 읽는건 못할 짓이죠. 으으! 이제 저 문제에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도록 하죠.


SF 작가들 중 인간이 고기라는 사실을 관심있게 지켜보는 사람들은 생각해보면 꽤 많습니다. 그 작품 목록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읽는 재미를 어느 정도 훼손시킬테고 기억력이 좋지 않아 전부 기억이 나지도 않지만, 새삼스러운 이야기군, 이란 생각도 들긴 했습니다. 다만 이 작품에서 그 소재는 충격을 주기 위해 배치된 것만은 아니죠. 논리적으로 납득이 잘 되지 않는 문제들, 신세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좁아터진 곳에서 고생을 하면서 사치품을 위해서만 사람들을 보낸다는 설정, 같은 것도 신경 쓰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제 생각에 그 [인간]들 세계에는 채권이나 어음이 없는게 아닌가, 적어도 신대륙을 발견하던 시점에서 돈이 부족했던 유럽 국가들은 국가 채권을 무작위로 발행해서라도 사람들을 등떠밀었는데 고작 천문학적인 돈이 든다고 신세계를 그대로 내버려두는게 가능하기는 한가? 싶었죠. 정보불균형이 어떤 식으로 이뤄져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왜곡이 그들을 멸종시킬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더군요.


뭔가 앞뒤가 들어맞지 않은 거시 설정에서 벗어나면, 상당히 세밀한 묘사와 분위기가 뒷받침되며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초반에도 세계에 대한 이상한 묘사들은 그녀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님을 짐작하게 하죠. 이런 정밀한 설정에서 읽어낼 것은 무엇인가 하는데, 노동조합은 커녕 노동조건에 맞춰 착취를 당하는 소수자에 대한 안타까움? 고기와 지성체를 가르는 자의적인 판단에 대한 비꼼? 세세하게 그려진 인간 고기 축산과 도축 과정을 보며 감탄하기? 쁘띠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겉핥기 식 만남? 음, 뭐 하나 마음이 가는건 없군요. 작가가 철저하게 외계인에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그 깔끔함이 마음에 들긴 했지만 과연 페미니즘 노동환경 다큐멘타리를 보는 것과 이 책을 읽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제 나름대로는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인간과 보드셀만큼 차이가 난다는게 아닌가, 남자가 히치하이킹 하는데 받아줄 여자는 당신을 납치해서 고깃덩어리로 만들 인간 밖에 없다거나 그런 이야기로 읽었어요. 여성 혐오 같은건 아니고, 제목에서 처럼 살갗 아래에 뭐가 있는지는 양쪽 다 모른다는거죠. 서로에게 어떤 생각을 하든 말로 꺼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건 당연하고, 이 글에서 남의 생각은 히치하이커들이 이설리를 보며 생각하는 과정에서 밖에 나오질 않는데 그게 전부 전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뭐, 같은 보드셀끼리도 서로 동감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힘든데 인간과 보드셀이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겠죠.


사실 작가가 뭐라고 하더라도 제 멋대로 오독하는 편인데, 이 소설은 읽으면서 이렇게 공력을 들었으면 뭔가 전할 말이 있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무언가로 확정짓기에는 너무 아쉽단 생각이 들었단 말이죠. 이 소설은 이러이러한걸 이야기하고 있어, 라고 못을 박는 순간 그 나머지 것들이 쓸려 나가버릴테니까요. 그러니 교훈적인 의미로는 더 해석하진 않을 거에요. 그렇다면 재미있었던 부분을 떠올리자면, 악취미겠지만 암리스 베스가 보드셀들을 풀어준 부분부터 였죠. 그 전까지는 이미 알고 있는 비밀을 숨기느라 수고가 많다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더 이상 그런데 묘사를 허비하진 않을꺼라는 안정감이 들었으니까요. 이설리 네가 고생이 많다 싶으면서도 묘사가 숨김이 없는게 참 대단하다 싶었죠. 그 외는 이설리의 남성 혐오를 그리는 부분 부분들이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TV를 보는 부분도 묘하게 어긋난 듯한 묘사가 평범한 프로그램들을 약간 괴이하다 싶게 만든다는게 대단하다 싶었죠. 


광합성을 할 수 없는 이상, 생물이 다른 생물을 먹는건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고 거기서 나오는 문제들의 해결은 현재로선 마땅히 없죠. 한 100년 후면 줄기세포로 배양한 소고기를 나무에서 따듯 얻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래도 다른 분들의 서평을 읽어봐야 이 책이 어떤 종류의 책인지 감을 잡을 수 있겠군요. 그래도 책 전체 종일 느슨해지지 않는 장면 기술은 참 대단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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