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움직인 바보

2015.03.05 15:30

LH 조회 수:2264


대체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랜만의 역사 야그입니다.


세상에는 가끔 바보가 있지요.
그냥 세상 살다가 가끔 마주치는 - 착하지만 좀 모자란 사람들이 아니라 사건을 크게 만들고 세상을 뒤집어지게 하는데 특출난 능력이 있는 바보들 말입니다. 비유하자면 인간 태풍, 혹은 재해. 아무 것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컴퓨터가 고장나고 악성코드가 절로 깔리며 제 3자들끼리 머리채 잡고 싸우게 만드니, 진실로 이능력자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지요.


그들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순수한 머리와 넘치는 행동력입니다. 연필 자국 하나 없는 순백의 종이처럼 빤-한 머리는 하나 이상의 생각이 들어가질 않고, 이게 정말 옳은 건가 심사숙고하는 건 있지도 않으며, 그런 채로 달려가는데 그 끝에 절벽이 있는지 콘크리트 벽이 있는지 보질 않아요. 아주 생각도 하지 않지요. 그런데 솔직히 그러다 죽거나 다치면 자기가 자초한 일이려니, 하는데 엉뚱한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휘말리니 문제입니다.


사라예보에 총 쏴서 세계 1차대전을 일으킨 사람들이 여기 들어가려나요?
일본인은 초식동물이니까 풀만 먹어도 싸울 수 있다라고 한 무다구치 렌야라던가. 얼마전에 IS로 날아간 터키로 날아간 총각도 있겠고.



일단 지금 생각나는 대표적인 바보는 증정입니다. 청나라 옹정제 때 사람이지요. 이 사람은, 아주 전형적인 자신이 봉황이라 착각한 뱁새였습니다.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근근히 살다가 과거 시험에 몇 번 떨어지고, 학생들 가르치며 밥벌이를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만주족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족의 나라를 세우게- 따!"


하며 분연히 일어섭니다.


왜, 라고 한다면 누가 알겠어요.

그가 한 주장을 간단히 정리하면 지금 황제는 무지무지 나쁜 놈이니까, 훌륭한 한족을 황제로 세우면 알아서(...) 멸망하고 짱 좋은 한족의 나라가 세워질 거야! 라는 거였는데 물론 당시의 황제가 나쁜 놈인건 맞긴 하지만 이게 참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내용이지요.
그나마 증정이 완전히 바보는 아니라는 증거로, 북경에 가서 황제 얼굴에 칼침을 박아넣는 대신 군사를 일으켜줄 사람을 물색해 찾아갔으니, 이게 바로 악종기. 그는 한족 출신이지만 청나라에서 장군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성씨를 보면 감이 오겠지만 악비의 후손이었습니다. 네, 바로 송나라의 충신으로 억울하게 죽었으며 한 마디로 중국의 이순신이었던 사람의 머언 후손이었지요.


그래서 증정은 자신의 제자를 시켜 (주변의 멀쩡한 사람들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게 이능력바보의 놀라운 재능입니다) 악종기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당연하지만 악종기는 어디서 웬 강아지가 달밤 아래 스쿼트하는 소리냐 하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냥 씹자니 이것도 찜찜한 게 당시 황제가 옹정제였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옹정제. 첨엔 군림천하로 시작했지만 이제 보보심경이나 후궁견환전 덕분에 절라 나쁘고 호색한인 이미지가 굳어져버린 듯도 합니다만. 아니 뭐 나쁜 사람은 맞지만. 완벽주의자에 비밀 경찰을 수족으로 부리고 하루 4시간만 자댄 워커홀릭으로 진시황이나 제갈공명이 친구하자고 달려들 것 같은 인물입니다. 실제로 지정은제의 기틀도 마련하고 관리들의 부패도 근절하는 등 많은 성과를 이루기도 했고요.

그래서 악종기는 옹정제에게 싸그리 자진납세를 했고 옹정제는 증정을 잘게 썰어 고기밥으로 주는 대신 불러다놓고 "너 나더러 뭐라고 했어?" 하며 따집니다만...
물론 증정은 옹정제를 만나자 배 납작 깔고 우리 황제 폐하 쵝오! 하는 발바리가 됩니다만. 그러나 말했듯이 증정은 세기의 바보. 옹정제는 증정을 이겼으나 그 바보력을 이기지 못하고 멍청한 짓을 하고 맙니다.


그게 뭐냐하믄 이제까지 있었던 모든 뻘짓들을 책으로 만들었는데, 오히려 옹정제의 나쁜 소문만 온 동네방네 퍼지게 되었고. 신하들이 이건 좀 아닌데요... 해도 옹정제는 '그 답지 않게' 고집을 피웁니다. 증정도 처벌을 받기는 커녕 잘 먹고 잘 살았고요. 그렇게 될 줄 알았는데... 옹정제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건륭제가 즉위하자 11일만에 증정을 죽여버리고 책을 모두 불태우며 가진 자를 처벌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런 명령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어익후 이거 한정판이구나 하며 몰래몰래 숨겼고 덕분에 지금까지 잘 남아있으니 그게 대의각미록입니다.


대체, 그 바보 때문에 죽은 사람이 몇이고 불타버린 책은 또 몇인지...


하나의 개인은 참으로 힘이 약하기에 시대의 격류 앞에서 속절없이 떠내려가기 마련이지만. 가끔 이런 바보들은 하나의 짱돌이 되어 온 몸을 던져서 파문을 일으키고 때로 청류의 흐름을 뒤틀어버리기도 하니.
오늘의 바보는 과연 어느 쪽일까요.


너무 오랜만에 듀게에 들어와 후달립니다.

저 이거 왜 쓴 걸까요.
그럼 또 언젠가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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