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를 매긴 것 중 3번만 스포입니다.





1. 혹시 운동을 해보셨거나, 지인 중에 그런 분이 있으신가요. 

 초등부 쇼트트랙 새벽 훈련을 보러간 적이 있습니다. 깜짝 놀랐어요. 그 어린 아이들을 몰아세우고 때리고 크게 쌍욕을 해대는 코치라는 이상한 인간종들을 보면서 놀랐고, 암묵적으로 그걸 감내해내는 아이들과 엄마들의 조용한 분위기에 또 놀랐습니다. 정해진 몇 바퀴를 돌 때마다 순위권 안에 들지 못한 아이들은 호되게 후려 맞았고, 모욕적인 비속어들을 들었고, 다시 또 돌고, 또 맞고. 

 '못' 하는 아이들에게 그게 과연 좋은 훈련인지, 그리고 '잘' 하는 아이들의 마음은 또 얼마나 불편하고 미안할지. 내가 안 맞기 위해선 열심히 해야 하지만 그로 인해 내 친구들은 저렇게 맞는 상황이 정말 어이가 없고 잔인하고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계속 성적이 부진했던 아이의 어머니는 늘 '죄인처럼' 기가 죽어있었고, 애는 우울함으로 간신히 영혼을 지켜냈는지 모릅니다. 그런 야만적인 훈련에도 불구하고 코치에게 음식을 갖다 드리고,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수고하셨다고, 죄송하다고, 감사하다고, 잘 부탁드린다고, 어려워하며 깍듯이 대하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참 이해하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습니다. 



2. 어쩌다보니 계속 미루다가 뒤늦게 <4등>을 봤어요. 극장에서 봤으면 아름다운 장면들을 더 잘 볼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생길 정도로 황홀한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아이가 주눅드는 모습, 폭력에 겁먹는 모습 등은, 화면 너머로 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끔찍해서 화도 나고 안타깝고 말리고 싶고.. 입술을 깨물게 되더라구요.





3. (스포)

영화가 끝나갈 무렵, 마지막 시합 결과가 공개되지 않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어요. 만약 1등으로 해피엔딩을 하면 지금까지 차곡차곡 잘 쌓아온 진정성이 무너질 것 같았거든요. 반대로 또 4등을 하거나 더 안 좋아지거나 하면 누구에게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았고(인물들 모두에게도, 관객에게도), 그럴 경우 이 아이의 표정을 지켜보는 건 너무 가슴아픈 일이 될 것 같았어요. 또 4등을 했지만 괜찮아! 난 행복해^-^ 라고 웃는다고 해도,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만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걱정이 될 것 같았고요. 

 그래서 경기 결과가 나왔을 때 조금 허무했습니다. 어라? 이렇게? 그런데 영화는 그 순간을 꽤나 다르게 담아내더라구요. 마침내 팡파레를 울리는 요란함도 아니었고, 다른 방식으로 결과를 알려주지요. 그리고 언제든 용도를 바꿔서 무섭게 변할 수 있는 그 수많은 청소도구들을 한동안 응시한 후 우리를 바라보는 마지막 표정은, 마치 '...이렇게, 쉬운 것이었어요.' 라고 말하는 듯 했습니다. 

 ''그놈의' 1등, 그건 사실 이렇게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어렵게 별짓을 다해가며 때리고 맞고 비상식적인 짓거리를 해야만 따낼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사실 너무 쉬운 것이었다는 사실에 허탈감을 느끼는 듯도 했고요. 아직도 저 몽둥이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라고 하는 것도 같고. 우리 모두는 아직 우울하게 이런 걸 감내하고 있어요, 라고 하는 것도 같고..

 

 전 이 호흡이, 이 주제가, 정말 좋았어요.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는 결말은 참 어렵잖아요. 실컷 현실고발을 하다가 마지막엔 비현실적인 승리를 쟁취하는 단순하고 동화적인 결말, 현실적으론 졌지만 정신승리하며 마무리하는 결말, 다 싫거든요.

 우리의 주인공은 중반에 이르면 엄마가 시키는대로 '1등!' '거의 1등!'을 앵무새처럼 말하고, 자기가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제가 쇼트 연습장에서 봤던 그 우울한 아이의 모습이요), 나중엔 정말 내가 그걸 좋아한다는 걸, 하고 싶다는 걸 깨닫고, 다시 또 제대로 배우고 싶어 스스로 길을 찾고, 선생의 말을 이해한만큼 받아들이긴 하지만 그 방식을 그대로 따르진 않고(코치가 줬던 수경을 내려놓는), 마침내 무엇이 제대로 된 길인지 스스로 확인하게 되죠. 


 배움/혹은 교육의 과정이란 게 이렇게 길고 긴 과정입니다그려... 대부분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잘못된 배움/교육의 과정에서 중간에 그만 둘 경우, 그 악습만을, 껍데기만을 받아들이게 되죠. 중후반부에 주인공이 동생을 때렸던 것처럼요. 너무 많은 여러 고비를, 너무 힘든 고비고비들을 넘고 넘어서야 참된 그것을 따낼 수가 있네요. 휴. 가르치는 일도, 배우는 일도 정말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 마지막 경기에서 선수 명단 확인 후 경기장으로 나갈 때, 늘 1등을 하던 선수가 바로 앞에서 걸어가면서 자기 허벅지 뒤쪽을 만지잖아요. 전 그걸 보고 '어머, 쟤도 맞으면서 훈련했나봐..ㅜㅜ' 생각했는데 같은 생각 하신 분 있으신가요?


* 2등을 하고 고기파티 하던 장면 말예요, 아이도 "맞아맞아 거의 1등!" 그러고, 아빠는 "우리 '장남'!" 이라고 하고, 이 장면 대화들이 참 현실적이라 그 안에 내재된 폭력들이 파티의 언어로 치장되는 게 은근 소름이었어요.




4.

 '실패'한 사람은 그 나름의 교훈을 갖고 있지만, 애정이 담긴 상대를 대할수록 그 교훈은 왜곡되고 굴절되어 괴물처럼 변해갑니다.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너가 나같은 아픔을 겪게 할 수 없다'는 데서 기인하는 거죠. (그래서 학교 선생님이나 전문인들도 자기 자식을 직접 가르치는 것은 몇 배로 힘들어하곤 합니다) 이 영화가 좋았던 건 그 폭력을 휘두르는 코치의 입장도, 엄마의 입장이 꽤 현실적이고 객관적으로 그려졌다는 점이었어요. 엄마는 뭣에 홀린 듯이 아이를 내몰지만 (경기장에서 소리 지르는 그녀에게 눈을 찌푸리는 주변인들의 모습도 앵글에 자연스럽게 담겨있죠) 전 거기서 그녀의 오버스러움 외에도 피로감이 보였거든요. 자기 자신을 위한 소원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엄마의 모습도. (이 때의 대사의 흐름도 너무 좋았어요. 첫째에게 올인하느라 둘째에게 신경쓰지 못하는 것을 묘사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엄마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향해서요) 

 누구 하나를 본투비 악인으로, 동화적 악당으로 그리지 않을 뿐더러, 그렇다고 개인적 전사를 읊어주는 신파로 가지 않는 것도 좋았고요. (엄마 말예요.)

 그리고 주인공의 마음이 변하는 (뭔가를 깨닫거나 하는) 순간들을 표정으로 잡아내기보다 서있는 자세 등으로 보여주거나 굳이 보여주지 않는 것도 좋았어요..



5. 수영장에서의 영상이 어쩌면 조금 과하다 싶은 생각도 좀 들긴 했는데 대부분의 장면들은 참 아름다웠어요.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한 어느 밤에 방 안을 덮쳐오던 그 장면이 참 좋았어요. 그렇게 몰려올 때가 있죠. 그러면...맞아요, 달려나가야죠..


6. 뭔가에 흥미를 갖고 시작할 땐 그걸 좋아하는 줄도 잘 모르다가, 

   배움을 하다보면 지루해지고, 부담이 되고 과제가 되고,

   좋아하는 마음을 갖고 늘 설레며 몰입해가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7. 영화를 보기 전에도 그랬지만, '4등'이라니. 정말 좋은 소재이고 좋은 제목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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