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가가린] 보고 왔습니다

2022.12.31 11:00

Sonny 조회 수:308

평어체로 씁니다.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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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던 집이 없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특히나 살던 건물이 철거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방빼'의 의미 이상의 파괴적인 현실일 것이다. 자신이 살던 곳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것과, 자신이 살던 곳이 아예 소멸해버린다는 것은 전혀 다른 감각이다.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 가가린의 이름을 딴 건물 가가린 주택단지는 곧 허물어질 예정이다. 가가린 주택단지에서 사는 청소년 유리 가가린은 이 곳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다.


가가린의 꿈은 우주비행사다. 그래서 가가린이 머무는 가가린은 종종 우주적인 공간으로 뒤바뀐다. 방에는 테니스공과 탁구공과 다른 공들이 주렁주렁 달린 채 태양계를 꾸미고 있다. 가가린이 옥상으로 올라가는 문이 열릴 때 나는 기압이 빠지는 소리는 우주선의 문을 여닫는 소리처럼 들린다. 카메라가 천천히 화면을 눕히거나 돌릴 때 화면 속 가가린은 궤도를 잃은 우주비행선 속에서 본인이 따라 중심을 잃는 것처럼 보인다. 가가린 주택단지가 가가린의 꿈과 결합될 때, 가가린 주택단지의 철거는 우주적 위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집이 우주라는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시각적으로 실재하는 위태로운 현상이 된다.


아파트가 우주라면 그 안에는 제각각의 집들이 있다. 은하계라는 거대한 세계를 이루는 별들이 있듯이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소행성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딱히 선하거나 정이 넘치는 사람들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가가린의 곁에 가까이에 있고 가가린을 걱정해준다. 개기일식이 있는 날 가가린은 아파트 앞에 일종의 암막을 쳐서 이웃들과 함께 막 너머의 일식을 본다. 우주적 사건을 함께 목격하며 가가린은 일상 속의 우주적 순간을 지나쳐간다.


인간의 인지가 닿기 전, 일식은 불길하고 무서운 징조였다. 가가린의 주민들에게는 훨씬 더 직명하고 살결로 와닿는 방황의 운명이 정해져있다. 이들은 가가린을 나와야한다. 달과 해가 겹치는 것이 찰나의 이벤트이듯 잠깐 모였던 소행성들은 뿔뿔이 흩어져간다. 프랑스 공산당이 연대를 외치며 세웠던 건축물이지만 그걸 실천하기에 프랑스라는 우주의 힘은 자비가 없다. 가가린계는 와해된다. 이들은 어느 중심을 찾아서 기약없는 공전을 할 수 있을까.


유리 가가린은 가가린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의 절친한 친구마저 살던 곳을 비웠지만 가가린은 자기집에서 버티고 있다. 자신을 버리고 간 친어머니가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에 화가 나서? 그의 고집이 꼭 아들로서의 분노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순하게 우주비행사가 우주선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생존에 대한 집착일지도 모른다. 


가가린에서의 퇴거 명령은 가가린에게 단 한번의 내쳐짐이 아니다. 가가린은 어머니에게 버림받았고 국가에 의해서도 버림받았다. 이번에도 순응한다면 그것은 가가린이 가가린을 버리는 것이 아닐까. 고독하게 시작된 투쟁이지만 가가린은 외롭지만은 않다. 엘리베이터 수리를 하며 친해진 다이앤과 모스 부호를 주고 받으며 둘은 급격히 가까워진다. 가가린은 자신의 방에 다이앤을 초대한다. 그 방은 단 한명이 꾸몄다고는 믿기 어려울만큼 아늑하면서도 수많은 가재도구와 복잡한 우주선 내부의 풍경이 있다. 다른 방에서 가가린은 심지어 토마토와 채소들을 키우고 있었다. 인간이 쫓겨난 공간에서 새로운 생명이 움튼다.


대마초나 팔면서 가가린에 머무르던 또다른 마지막 거주자 달리가 불쑥 처들어온다. 시비를 걸 것 같았지만 그는 가가린 호의 탑승객으로 가가린과 다이앤과 가까워진다. 그는 채소가 자라는 방에서 적외선을 맞으며 식물이 된 것처럼 생명을 음미하기도 한다. 그는 불쑥 할아버지가 췄던 민속춤을 보여주겠다며 음악이 맞춰 계속 빙글빙글 돈다. 턴테이블과 회전댄스. 그렇게 궤도 안에서 자전을 하는 달리를 보며 카메라도 빙글빙글 돈다. 횡으로 도는 카메라 안에 풍경에서 다들 웃으며 춤을 춘다. 인간은 즐거우면 자전을 한다. 일찍이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도 우주선이 왈츠를 추며 우주비행의 기쁨을 만끽했던 것처럼.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예정된 이별을 모른 체 하며 최후의 유대를 누리고 있었을 뿐이다. 가가린이 다이앤과 키스를 하고 크레인에서 내려온 그 날 공무원들이 다이앤의 집을 다 허물어트리고 있었다. 이들 가족이 캐러밴으로 터를 잡고 살던 공간은 분명히 불법이기는 했을 것이다. 물건이라도 챙기게 해달라는 다이앤의 아우성이 무색하게 포크레인은 다이앤 가족의 집을 우그러트린다. 아늑한 꿈을 깨트리는 것은 지구별 프랑스의 쇳덩이가 담은 중력이다. 그날밤 가가린은 건물이 철거되어 주저앉고 무너지는 악몽을 꾼다.


드디어 때가 온다. 날은 추워지고 가가린의 방에는 찬 공기와 입김이 가득하다. 이제 더는 살 수조차 없다. 생명유지가 끊어진듯한 그 우주선에서 가가린은 다른 수를 찾지 못한다. 그리고 달리가 숨겨달라며 가가린의 방에 들어왔다가 발각된다. 이제 가가린은 옥상에서 머무른다. 우주비행사는 허름한 우주비행복에 의지해 우주 공간을 떠돌아다닌다. 철거가 시작되려하고 가가린의 전 두민들이 모인다. 철거 폭탄이 설치되었지만 가가린은 아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이앤이 불안해하며 그를 찾아보려하지만 현장의 인부들은 아무도 없다며 폭발 스위치를 누른다.


전선 더미를 주렁주렁 이고 다니며 뭔가를 연결하던 가가린이 건물의 전기스위치를 켠 순간이 밖에서 버튼을 누르는 것보다 빨랐다. 폭발은 일어나지 않고 밖의 사람듷은 웅성댄다. 밖의 상황을 알 리 없는 가가린의 몸이 갑자기 둥실 떠오른다. 가가린이 무너지기 직전 우주비행선의 완전한 무중력을 실현한다. 가가린은 건물 내부를 무중력으로 돌아다닌다. 그리고 건물 밖에서는 오로지 하나의 층에 있는 방들의 전기가 연결되어 반짝거린다. 옥상으로 올라간 가가린은 쏘아올려지듯 하늘로 빠르게 떠오른다.


본래대로라면 건물은 무너져야한다. 그러나 건물 안은 무중력이 된다. 가가린은 건물더미에 깔렸어야하지만 그는 오히려 그 안을 떠다닌다. 가혹하게 작동했을 중력이 환상 속에서 무중력으로 전환된다. 가가린이 정신을 차리고 누워서 하늘을 바라봤을 때 한 열의 창에만 불빛이 켜진 가가린 주택단지가 보인다. 그게 단순히 착시가.아니라는 듯 건물은 진동하며 발사된다. 집을 잃고 발붙일 땅이 없어져 중력을 잃어버린 이들에게도 무중력의 자유가 도래한다. 무너질 집이 하늘로 솟아오른다. 집의 현실에도, 우주적 환상과 함께 꿈은 도약한다. 가가린은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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