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편집자분이 왕족이면서 해쳐먹은 거 이야길 해달라고 해서.

사실 종실이면서 돈 엄청 쳐먹은 걸로 따지자면 여러 사람이 있긴 하지만
정말 악질인 사람을 들자면 민영휘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악질이라고 하면 반발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휘문학교를 세운 사람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공은 공, 과는 과, 여기서는 과만 이야기하도록 하죠.

 

민영휘는 워낙 명성황후의 먼 친척이었지만 능력도 있고 해서 기용되었는데. 결국 여흥민씨 일족의 주도적인 위치를 하는 데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해서 구한말에는 보국8인 중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기도 했지요. 총명하고 정치적 감각도 있었다고 하죠. 하지만 그의 재능이 가장 확실하게 발휘된 것은 바로 돈 버는 데 있었습니다.

 

요즘이야 사업을 하고 상업을 해서 돈을 버는 수도 있지만 예전에는 글쎄요, 민영휘가 탐관오리 소리 좀 듣는 사람이긴 했죠. 그 즈음 신문기사에는 평양감사 두 번 지내고, 수천 사람들의 고혈을 뽑아 당대 조선갑부가 되어 황금과 권세를 자랑했더라, 라고 하더군요. 이 사람 친아버지 민두호도 참 많이 해먹었댑니다. 별명이 쇠갈퀴였고 민씨 3대 도적 중 하나로 일컬어졌다고도 하죠. 당시 국사를 배운 분들이라면야 알겠지만 당시 삼정의 문란 어쩌고 해서 결국 동학운동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죠. 이 혐의에서 아주 자유로울 수 없는게, 이들 재산의 큰 부분이 바로 소작농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곤 해도 그렇게 모은 돈을 불리고 유지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습니다. 민영휘는 구한말 그리 기세등등하던 민씨집안 사람들 중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일제시대까지 치부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1925년 즈음에 당시 제일 부자가 일본인이었는데 그 다음이 민영휘였고, 민영휘의 재력이 창덕궁과 맞먹는다고 했지요. 결국 조선사람들 중에서 제일 부자였단 말입니다.

어쨌건, 돈이야 많았고 그걸 어디다 썼느냐가 문제이긴 한데...

 

민영휘는 수전노라서 돈을 남에게 안 쓰고 끌어만 모았다라고 하는 글이 있기도 한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의외로 사회 기여는 많이 했습니다.
앞에서 잠깐 말했듯이 휘문고교 설립을 하고 교주(敎主 아닙니다)로 있기도 했고, 은사금으로는 은행을 사들여서 민씨집안 가족은행으로 만들었으니, 이게 한일은행입니다. 이게 재계에서 내세우는 몇 안 되는 민족기업, 민족은행이라고 하니 좀 굉장히 많이 서글퍼집니다만...

은사금이란 게 바로 나라 팔아서 받은 돈 5만원이었다는 데 아이러니가 존내 있긴 하지만요. 사람들은 한일은행더러 귀족은행, 민씨왕국 어쩌고 말하고 했죠. 이 한일은행이 나중에 조흥은행이 됩니다.


그 외에 당대 효녀, 효자에게. 또 본부인을 위해 자기 살을 베어준 첩(...)을 위해 금반지를 선물해주고, 수재민에게 성금을 보내주고 학생들에게 종이를 주는 등 많이 베풀긴 했습니다.

그런데 양자이자 큰아들인 민형식은 다른 민씨집안 사람들과 다르게 을사오적의 암살이라던가, 독립운동 쪽에 많은 돈을 대줍니다. 이 때문에 가진 재산 다 까먹고, 일제시대 당시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있던 조선일보에게 돈을 대줬다가 결국 파산하고 8만원의 빚을 지고 맙니다. (이것이 1925년의 일이고,  이후 여전히 재정난에 시달린 조선일보는 1933년에 방응모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해서 자신의 아들과 같이 재판에 나가게 되었는데 조선 제일의 부자 민영휘는 본체만체 하고, 증인으로 와달라는 것도 거절합니다.

...뭐 나중에 2만5천원 정도는 갚아주긴 했습니다만.

신문에까지 이런 내용들이 절절이 실렸으니 당대 사람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아버지라고 오죽 까였겠나 싶습니다.

 

그가 죽은 뒤, 자식들은 재산 다툼하느라 아웅다웅했습니다. 애초에 민영휘는 그에게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이 재산반환소송을 해대자 자식들, 특히 둘째아들 명의로 바꿔놨습니다만. 해서 그가 죽은 뒤 재산분쟁이 벌어집니다. 1938년 민형식으로 시작하여 둘째아들이자 가장 치부에 능했던 민대식, 그리고 넷째 민규식이 재산으로 다퉜으니 그 남긴 유산이 천만원이었댑니다. (한 때 4천만원까지 되었댑니다) 그 옛날 천만원이면 얼마나 많은 돈이었을까요.

뭐 재판과정에서 민대식은 아버지의 재산은 부정축재 및 남의 것을 빼앗은 게 아니라 할아버지가 근검절약하고 농사를 개량하고 비료를 사용해서 해마다 추수를 모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뭐 민영휘는 대한민국 최초의 권력형 비리 케이스로 꼽히는 인물이니 여기서는 그냥 알토란 같이 웃읍시다.

더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지요. 사실 제가 좀 더 잘 알아야 재미나게 쓸 수 있을텐데 그냥 피상적으로 아는 정도 뿐이라, 전문가들이 보시면 너무 조악할 거 같아서 미리 꼬리를 말겠습니다. 돌돌돌...

어쨌건 사회 자선활동을 한 것마저 까서는 안 되겠지요. 그것마저도 안 하는 밥통들도 있었으니까요. 이완용 같은 경우에는 후작인 주제에 내 재산은 고작 요만큼이니까 세금 못내겠다, 차압 하려거든 해라고 뻗대서 당대에도 엄청 욕을 먹었으니 말입니다. 허나 후작이라고 기세 등등하고 돈이야 워낙 많았으니 관리만 쩔쩔 맸죠.

 

그럼 민영휘는 좋은 사람 아닌가요, 라는 생각도 들 겁니다. 이거저거 구구절절한 썰을 풀 기운이 나질 않으니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냐를 이야기해드릴께요. 그 즈음 일제도 싫어하고 조선도 싫어한 회색분자이자 마찬가지로 친일파로 낙인이 찍힌 윤치호가 있습니다만. 그 사람이 자기 일기에서 민영휘를 이렇게 까댑니다.

 

"조선일보는 민씨가 도덕도 재력도 조선최고라고 하는데 웃기지 마라. 극악무도하게 돈을 벌어서 그거 중 일부를 공익사업에 투자하면 만사 오케이냐? 그렇다고 조선 청년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랑 다를 바 없잖아! 게다가 이놈은 청일전쟁 원인까지 제공했는데, 학교 하나... 아니, 아무리 많은 학교를 지원한다 하더라도 용서받을 수 없어!"

 

뭐 여기엔 윤치호가 일본 쪽이라서 친청파인 민영휘를 싫어해서 그랬다고 할 수 있겠지만. 신채호도 신문 사설에서 한 마디 했습니다.

 

"뜻없는 사람의 지식이 쓸데없듯이 민영휘의 돈도 공공 운동에 쓸모없다."

 

라고요.

당대 사람들은 그리 생각했는데 요즘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모두 좋은 밤 되세요.

 

p.s1 : 역시 현대사를 쓰니 혈압이 오르고 짜증이 넘실대는 군요.
다음엔 좀 유쾌한 이야기 좀 써보겠습니다.

 

p.s2 : 써놓고 보니 어떤 여배우의 이야기가 게시판에 올라왔네요.
개인적으로 안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고를 수 없는 거니까요. 허나 사람들이 상상하는 최악의 친일파 - 일제, 이승만 자유당, 군사정권까지 잘 먹고 잘 살았던 기회주의자로 후손까지 잘 먹고 잘 사는 - 의 클리셰로 너무 완벽해서 정말 안 되었습니다. 
차라리 집이 중간에 망했다거나(...), 국사 좀 공부했으면 그리 되진 않았을텐데. 이러니 다들 나라 역사를 빡세게 배워야 해요.

 

잠깐 다른 이야길 하자면 민영휘의 둘째아들 민대식은 한일은행 은행장이 되었습니다만, 그리 물려받은 재산이 많으면서도 아버지 장례는 엄청나게 초라하게 치렀다고 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민병도씨의 증언에 따르면 민대식은 그 나름으론 일제의 이거 해라 저거 해라라는 압박을 많이 받아 졸도를 할 정도로 고민했다고 합니다. 결국 은행장 자리에도 물러나게 됩니다. 그 압박의 내용이란 게 일본인 중역을 취임시키고 다른 은행과 합병하라는 것입니다만. 동아일보에 따르면 이런 저항을 통해 동일은행의 민족주체성을 높이 평가하는 역사가들이 있다는데... 대체 그 역사가가 누굽니까, 저랑 좀 만나서 이야기해봅시다. 이건 그냥 영업방해자나요. 이게 어째서 민족은행이 되는 근거가 되나효. 아놔.

 

p.s 3 : 보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신청 받습니다. 짠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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