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소맨과 도로헤도로

2022.12.08 12:10

Sonny 조회 수: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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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소맨: 어둠의 악마가 등장하는 장면


후지모토 타츠키 작가는 전작 [파이어 펀치]에서도 들쑥날쑥한 스토리 전개와 주요인물들이 어이없이 사망하여 탈락하는 전개로 선과 악, 승리와 패배가 무의미해지는 작품을 만들어냈죠. [파이어펀치]는 이해와 불가해, 의미와 무의미를 구분해놓고 그것이 뒤섞이며 알 수 없게 되는 혼란의 이야기입니다. 


[체인소맨]은 그 기조를 그대로 이어나간 후속작입니다. 전작이 고뇌와 사유가 넘쳐서 다소 매니악한 작품이 되었다면([파이어펀치]를 용두사미라고 하는데 그 평에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체인소맨]은 주인공을 지극히 1차원적인 이드 덩어리로 만들어서 세계는 혼란스럽지만 고뇌는 할 필요가 없는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작품의 난이도와 대중의 취향을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발전'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2021년 제가 본 만화 중 가장 충격적인 작품으로서 [체인소맨]은 언젠가 한번 각을 잡고 이야기해보고 싶은 만화입니다. 


한 작품을 보다 깊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다른 작품을 이해해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도로헤도로]를 먼저 본 사람이라면 [체인소맨]을 이야기할 때 그 작품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단순히 소재의 유사성이나 레퍼런스라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동일한 소재를 가지고 한편으로는 유사하게, 한편으로는 저마다의 노선으로 갈라지는 부분이 분명하기 때문이죠. 


일단 [체인소맨]의 데빌 헌터는 [도로헤도로]의 청소부를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나 '신'과 '노이'라는 두 캐릭터의 커플링으로 이뤄진 청소부들이 검은색 정장을 입고 다니는 데빌 헌터들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하죠. 디자인적으로도 그렇고, 금발(비흑발) 남자 여자가 짝을 맞춰서 다닌다는 설정도 그렇습니다. 남자는 조금 헐렁하고 여자는 열혈인 쪽도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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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헤도로]의 주인공인 니카이도입니다. 이 작품 안에서는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데, 이 사람들이 재능이 있으면 악마에게 발탁되서 '악마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습니다. 그 훈련을 성실히 받으면 악마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머리에 뿔이 돋기 시작합니다. 이런 이미지는 [체인소맨]에서 파워가 피를 너무 많이 마셨을 때 뿔이 엄청 커지는 장면과 겹쳐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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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여자 캐릭터인 '노이'입니다. [도로헤도로]에서 제 최애캐릭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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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소맨]에서 제일 인기가 많을 지도 모르는 캐릭터 파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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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두 작품이 닮은 지점은 두 남자여자 주인공이 직접적인 연애를 하지는 않되 서로 애틋해하며 의존하는 로맨스를 한다는 점입니다. 두 만화 모두 살점이 맞 찢겨나가고 굉장히 고어한 지점이 크지만 그 폭력의 묘사 정도에 비해 성애의 묘사는 굉장히 말랑말랑한 편입니다. 오히려 성애라기보다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로맨스가 단짝친구처럼 그려진다는 점에서 고어한 부분과 로맨스의 애틋함이 대비되며 묘한 애상감을 자아내는 게 있어요. 둘이 서로 좋아한다면서 키스를 한다거나 몸을 섞는(...) 그런 장면은 없지만 상대를 구하려하고 소중히 여기는 감정적 묘사가 간접적으로 나오는데 이게 또 나름 덕후들의 버튼을 누르는 지점이죠. 그 묘사되지 않은 것들을 독자가 상상하게 한다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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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작품은 유사점만큼이나 차이점도 많습니다. 일단 디자인적으로, [도로헤도로]에 비해 [체인소맨]은 인물들이 훨씬 더 하늘하늘 여리여리합니다. [도로헤도로]의 작가 하야시다 큐는 일본만화계에서는 좀 독특하게 사람의 몸을 두툼하게 그리는 걸 좋아합니다. 작가가 서양 아저씨들의 스타일을 좋아한다고 할까요? 남자고 여자고 기본적으로 떡대가 있는데다가 날씬한 여자는 사정없이 이쑤시개처럼 그려서 그의 작풍이 더 도드라집니다. 그에 반해 [체인소맨]은 사람들이 다 모델 체형입니다. 어떤 남자 캐릭터는 강동원을 참고한 것 같은 느낌도 줍니다. 


어떤 면에서는 [도로헤도로]의 매니악한 지점을 예쁘게 다듬어서 새로 내놓은 게 [체인소맨]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미지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세계관의 묘사나 인물 외형 같은 것들이 대중성에서 많이 차이가 나거든요. [도로헤도로]는 기본적으로 그림이 좀 혼탁합니다. 선도 거칠고 제목처럼 진흙투성이나 어두운 지하실의 구불구불한 배관같은 걸 굉장히 많이 그립니다. 그에 반해 [체인소맨]은 대낮의 도시나 멀끔한 방 같은 모던한 이미지를 많이 보여줍니다. 


이미지와는 또 반대로, [도로헤도로]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니카이도와 카이만이 자신들의 과거를 찾아서 본인이 어떤 사람이고 이 세계에 왜 이런 혼란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질척질척하지만 그 과정을 거치면 모든 것이 명쾌해지고 주인공들은 해피 엔딩에 도달합니다. 미스테리라는 장르이지만 결국에는 그게 다 끝이 나는거죠. 이 작품에는 시작과 끝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인물들은 죽음의 위기에 휘말려도 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작품안에서나 독자에게 모두 소중한 존재들이니까요.


[체인소맨]은 혼란이 끝나지 않는 작품입니다. 오히려 주인공인 덴지가 그저 먹고 사는 걱정만 하고 있던 초반부가 제일 명쾌했죠. 그러나 데빌 헌터가 되면서부터 계속해서 혼란에 빠집니다. 자신에게 깃들어있는 체인소맨이란 악마는 어떤 악마인가. 자기가 좋아하는 마키마는 어떤 사람인가. 왜 자기 주변에 있는 아키나 파워는 점점 고통에 빠지는가. 이 세계는 정말로 평화로워질 수 있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 덴지는 굉장히 절망적인 답을 얻을 뿐입니다. 궁극적으로 [도로헤도로]와 지향하는 세계가 반대방향입니다. 이 세계에서 한 개인은 무력하고 잠깐의 행복을 얻었다가도 이내 그걸 잃으면서 고통만 더 커질 뿐이기에 점점 회의론적인 질문만 늘어갑니다. 


그런 면에서 같은 소재와 잔혹한 연출을 사용했어도 [도로헤도로]가 다소 동화적인 느낌이 든다면 [체인소맨]은 허무한 일기장의 느낌이 듭니다. 주인공에게 절대적으로 보장되는 행복이 있는지, 혹은 반드시 되찾게 되는 소중한 게 있는지 그 부분에서 두 작품은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어둠의 세계에서 이렇게 갈라져나온 두 작품을 비교해보니 괜히 덕심이 충족되어 즐겁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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