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소환

2022.12.22 23:18

Sonny 조회 수:393

주인이 정을 들이고 오래 쓰던 물건들은 이후에 도깨비가 된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밤이 되면 우산이나 싸리비나 소쿠리 같은 것들이 자기들끼리 왁자지껄 떠들다가, 아침해가 밝아오면 자리로 돌아가 딱 사물인 척을 하고 있겠죠. 어딘가 귀엽습니다. 그래도 주인의 눈치를 보고 몰래 자기들만의 자유시간을 갖는다는 게. 그렇게 도깨비가 된 물건들은 그래도 행복하지 않았을까요. 주인의 정을 잔뜩 받고 태어난 녀석들이니까요. 딱히 고마움은 없어도 그 생명력을 뽐내며 이런 저런 자유를 누렸을 것 같습니다.

어쩐지 현대 사회에는 적용하기 어려운 설화입니다. 디지털 기기가 도깨비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는 아닙니다. 워낙에 소비가 당연해진 시대라 물건에 대한 애착이 깃들 틈이 없기 때문이죠. 잃어버리면 사면 됩니다. 부숴져도 사면 됩니다. 찾거나 고치는 행위야말로 바쁜 현대사회에서는 사치입니다. 하자가 있으면 바로 갈아치워지고 바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합니다. 도깨비가 잉태되기에는 수천만개의 동일상품이 다시 찍어져나와서 헐값에 팔립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핸드폰과 노트북도 도깨비는 되지 못합니다. 새로운 디자인 때문에, 혹은 선천적으로 2년을 넘기지 못하는 내구성의 한계 때문에 이 기기들은 부숴지거나 다른 나라로 여행을 추방됩니다. 주인의 모든 정보를 안에 담고서, 늘 주인이 손에서 떼놓지 않는 기기들인데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모든 걸 교체하는 세상에서 인간도 그런 취급을 받지 않을거라 자신할 수 있을까요.

얼마전에 산 마인크래프트 횃불의 전등을 갈 수가 없어서 문의를 해보았습니다. 건전지가 있어도 전등이 불이 안들어오면 그 땐 어떻게 해야하냐고. 전등을 갈 수가 없는 구조이니 그 부분은 양해를 바란다고 합니다. 이게 과연 현대의 편리인 것일까요. 하나 더 사면 되고, 혹은 그냥 버리면 되는 이 세상에서 어떤 물건이든 오래 쓰고 싶은 게 저의 괜한 욕심인지. 제 많은 물건들이 저와 오래오래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20년 후에는 밤에 저 몰래 뛰어다니는 뻔뻔한 녀석들이 태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압도적인 물량으로 현대식 퇴마가 이뤄지는 이 세상에서 저는 남몰래 작은 귀신들을 부르는 중입니다. 그 중 대장은 중학생 때부터 입던 저의 오래된 반바지가 확실합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6580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111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4570
122003 새해복많이받으세요^^ [10] 라인하르트012 2023.01.01 248
122002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3] 영화처럼 2023.01.01 195
122001 [핵바낭] 1년 잉여질 결산 + 올해 마지막 날 잡담 [23] 로이배티 2022.12.31 673
122000 영알못이라 지루하기만 했던 아바타 [14] daviddain 2022.12.31 749
121999 프레임드 #295 [2] Lunagazer 2022.12.31 110
121998 ㅋㅋㅋ ㅎㅎ - 초성체를 생각한다 [3] 예상수 2022.12.31 320
121997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 ND 2022.12.31 258
121996 [근조] 사진작가 김중만씨 [1] 영화처럼 2022.12.31 393
121995 '피그' 보고 잡담입니다. [8] thoma 2022.12.31 367
121994 Paramore - Ain't it fun catgotmy 2022.12.31 108
121993 송구영신무지개쇼 왜냐하면 2022.12.31 159
121992 (스포) [가가린] 보고 왔습니다 Sonny 2022.12.31 309
121991 호날두 사우디 이적 공식화 [1] daviddain 2022.12.31 170
121990 새해 직전 본 여러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1] 조성용 2022.12.31 466
121989 [왓챠바낭] 올해의 마지막 영화는 세기말 청... 은 됐고 그냥 '트레인스포팅'이요 [9] 로이배티 2022.12.31 346
121988 [KBS1 독립영화관] 고양이를 부탁해 [EBS1 다큐시네마] B급 며느리 [2] underground 2022.12.30 267
121987 헤어질 결심 린쇠핑에서 보고, 파편적 생각들 [4] Kaffesaurus 2022.12.30 613
121986 송년인사는 이르지만 올해도 하루밖에 안남았군요(포켓 속의 듀게) [4] 예상수 2022.12.30 226
121985 다크나이트를 봤는데(뻘글) [1] 첫눈 2022.12.30 249
121984 화력이 좋아도 영점이 안맞는 총은 쓸모가 없네요. [1] ND 2022.12.30 466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