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제가 좋아했던 역사상의 위인은 정조였습니다. 정조와 관련있는 도시에서 태어난 터라 이런 저런 얘기도 많이 들었고, 한동안은 이덕일의 망령에서 헤어나지 못해 비극적 최후를 맞은 개혁군주라는 인상이 제 머릿속에 뚜렷히 새겨져 있었죠. 노론에 대한 증오심도 굉장히 심한편이었습니다. 자연히 그 궁극에 놓여져 있던 송시열을 죽도록 싫어했죠. 명분론에만 사로잡혔고, 당리당략에만 몰두하며 양반우선이라는 체제 이반적인 중세적 이념을 계속 고집해 조선을 나락으로 이끌어간 이기주의적 학자라는 생각을 품곤했습니다. 


그런 제 생각이 결정적으로 회귀한 건 대학교때였어요. 국사학과에 입학하면서 정조가 생각보다 개혁군주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죠. 그는 엄밀히 말하면 복고주의자고 왕당주의자였죠. 왕으로서는 당연한 행보였지만. 어쨌든 정조가 생각했던 개혁의 한계는 송시열이 구상한 조선의 미래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못했죠. 사대부 중심의 농정국가. 정조가 꿈꾸었던 나라는 우리가 생각했던 그의 모습과 상당부분 다릅니다. 


왜 이렇게 된걸까요? 정조 개인의 심성과 능력때문이었을까요? 저는 그것도 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조는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을 국가 주도형식으로 만들만큼 송시열을 싫어하지 않았죠.  정조는 송시열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않았을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정조의 개인적 한계가 송시열을 뛰어넘었다면, 그러니까 그가 새로운 방식으로 조선을 만드려고 했다면 가능했을까요? 저는 또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송시열이 만들어 놓은 사대부 중심의 체제는 굳건했고 한 명의 개인역량으로 부숴볼만한 상황은 아니었죠. 비슷한 의미로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어도 조선이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을꺼라고 봐요 오히려 반동이 오면 왔겠죠. 


사실 송시열이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 체제 - 이른바 우리가 전통적 체제라고 부르는 것들이죠- 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건 송시열 홀로 만들어낸건 아니죠. 그가 제시한 사대부 중심체제와 확고한 신분제가 당시 조선의 기층계층에게 지지를 받았고, 시대 흐름도 조선이 그러는 걸 용인해주었죠. 


저는 이걸 사회설계라고 불러요. 정도전이 조선 전기의 사회 설계를 구상했고, 세종은 이걸 구체화 했죠. 조선 후기의 사회를 설계한 사람은 송시열이고 이걸 구체한 사람은 숙종과 영조였죠. 정조는 이 체제를 손보면서 개량한거에 가까워요. 흥선대원군 역시 이 설계도에서 벗어나지 못했죠. 시대의 흐름이라고 말해야 하나. 아니면 시대의 한계라고 해야 하나. 사회 설계는 쉽게 바뀔 수가 없죠.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변동이 사회 설계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 때문에 한 명의 영웅적 개인도 필요하지만, 시대가 그걸 원하는 것도 필요하죠.


그런 제 입장에서 송시열 이후의 사회 설계사는 박정희에요. 물론 일제하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광복 이후의 이승만을 위시한 수많은 정치가들도 각자 나름대로 어떤 사회가 필요한 지에 대해 구상했겠지만 자신의 설계안을 현실화하고 구체화 한사람은 박정희가 유일하죠. 그리고 그건 지금도 유효하죠. 강력한 국가주의 안에 내면화되어 있는 옹골찬 가족주의. 그리고 국가주의가 만연하면서 삭제된 공공성. 공동체는 무력하고, 개인의 이기주의만 만연한 나라. 박정희가 원한 나라가 이건지는 모르지만, 결국 박정희는 이기주의가 바탕이 된 사회 설계를 만들었고 그걸 지금까지 유지했죠. (이와 관련해서는 도올 김용옥의 강연 소개합니다. 제 졸렬한 글 보다 김용옥의 말이 더 와닿네요.) 그리고 이 사회설계는 imf 이후 더 강화됐죠. 박정희 신드롬과 현 정부의 등장은 아직도 우리 국민들이 박정희가 설계한 사회가 옳다고 생각했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런점에 있어서 dj와 노무현 정부 역시 박정희의 사회 설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어요. 노력하긴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박정희 사회 체제를 수정하는데 그쳤죠. 정조가 그랬던 것처럼요. 


그래서 저는 지금 안철수가 등장하는 상황이 지금 시대가, 그리고 우리 사회가 새로운 사회 설계를 원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난번에 저는 '폴트 라인을 건드린 안철수' 라는 글에서 안철수는 기존의 3세계 정치인들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지적했죠. 공동체에 대한 열망. 이기주의가 아닌 합리적 공동체 주의에 대한 희망이 안철수를 밀어올리는 근원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생각에 대해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지금의 안철수에 대한 지지는 안철수 개인에 대한 지지가 아닌 우리가 새로운 세계를 원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지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여러번 그래왔죠. 가장 간단한 예는 10년 전 노무현이었습니다. 노무현 역시 정의와 공동체를 말했죠. 우리는 그런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구요. 하지만 당시 시대의 흐름은 노무현으로 하여금 새로운 사회설계를 하지 못하게 했다고 봐요. 노무현 개인의 능력 부족도 있고- 아무리 생각해도 관료들과 결탁은 노무현 최대의 실착 중 하나입니다.- 골디락스로 대표되는 세계 경제의 호황역시 공동체의 귀중함을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보았죠. 상대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된 우리는 그때문에 새로운 시스템 보다는 기존의 사회 설계를 강화하는 쪽으로 갔구요. 


그리고 지금 우리는 안철수를 등장시키면서 새로운 사회 설계가 필요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어요. 그걸 공동체 중시 성향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고, 민주주의에 대한 지향이라고 봐도 좋을꺼에요 소수자에 대한 권리 보장이라고 말해도 될것이고, 노동의 권리 향상이라고 지적해도 될 것입니다. 모든 걸 포괄해도 결국 답은 우리가 지금 박정희 이후의 새로운 사회 설계를 원하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아니라고 생각하고 기존의 사회설계가 아직 유효하다고 믿는 분들도 있지만 신자유주의 실패로 요약되는 세계의 흐름도 그러하고 양극화와 대기업들의 무한 확장이 상징하는 시대 흐름도 지금 우리가 기존과 다른 사회 설계안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게 해줍니다.


사실 그러한 의미에서 올해 총,대선에서 야권이 이기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중요하긴 하죠. 정권교체를 해야 뭐 새로운 시스템을 강구해 보기라도 할테니까요.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어떤 사회 설계안을 만들어 내냐는 겁니다. 송시열이 그랬고, 박정희가 그랬듯이 우리는 명징한, 그리고 명확한 새로운 사회 설계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말 지금 걱정하는 건 그런 사회 설계 시스템이 야권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재벌에 대한 공격적 태도는 이해하지만, 그 이후를 대비하지 않아요. 실례로 대기업들이 떡볶이와 프랜차이즈 사업에서 손을 뗀다고 기존 자영업자들의 생계가 훨씬 나아질까요? 자영업자 예비군이 넘쳐나는 한국 사회에서 그런 기대는 순진할 뿐이에요. 이상이의 역동적 복지국가도, 김대호의 사회투자론에서도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놓지는 못합니다. 통합진보당이 주창하는 시스템은 일견 나이브해 보이기까지 하죠. 물론 본인들은 선의가 굉장히 크지만. 


일견 이해는 되요. 한국 사회에서 야권은 총출동해서 사력을 다해야만 겨우 겨우 정권교체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정치적 불리함을 가지고 있죠. dj도, 노무현도 이 상황에서 싸워야했고, 그래서 궁극적인 사회 설계의 변화를 이룩하지는 못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는 겁니다. 지금이 정말 우리에게는 사회 설계 시스템을 제대로 바꿔낼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좀 있으면 닥쳐올 북한의 파고와, 동북아시아에서의 정세변화. 그리고 우리의 고령화 사회. 제조업은 점차 설자리를 잃어가고 사회 시스템을 노후화 되어 여기 저기서 삐걱거리는 시스템을 고칠 대안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1년이 정말 한반도 오천년 역사에서 몇 순위안에 들 중요한 한 해라고 보는 이유는 단연 총,대선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사회 설계 시스템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즘 이 생각을 하고 살아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근데 답이 참 안보이네요..



그냥 주저리 주저리였습니다. 오늘도 결론은 산으로 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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