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잡담] 설탕 뽑기의 추억

2012.02.02 18:22

LH 조회 수:2724

 


어린 시절, 학교 마치고 교문을 나서면 문방구 근처의 골목길에 머리 하얀 할머니 한 분이 연탄 화로 하나 끼고 앉아있었습니다. 행여 다른 아이가 먼저 갈세라, 서둘러 달려가 당시로선 거금이던 백 원(이던가?)을 주고 뽑기 해주세요! 하면 할머니는 느릿느릿 손을 움직여서 뽑기 제작에 들어가곤 했죠. 먼저 가운데가 옴폭 들어간 작은 국자를 집어들지요. 국자의 아가리 주변은 늘 시커멓게 늘어붙은 설탕 얼룩이 가득했습니다.
그 국자, 한 번도 씻은 걸 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당시는 별 생각이 없었지요. 이미 맛있는 뽑기를 먹을 생각으로 가득했으니 말입니다.

 

국자 안에다가 눈처럼 하얀 설탕 두 숟갈 팍팍 부어넣고 연탄불 위에 올리면 앗 하는 순간에 스르륵 녹아 갈색으로 끈적끈적해집니다.
물론, 이렇게 녹는 동안 쇠꼬챙이로 살살 잘 저어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는 녹고 어디는 안 녹거든요. 저어주면서 국자를 요리조리 잘 굴려 국자 밑바닥 전면으로 열기를 잘 받게 해주는 기술도 있었던 거 같습니다.
집에서 국자로 하면 꼭 그 맛이 안 나와요.
...국자도 홀랑 타고요.

 

그렇게 설탕이 다 녹으면,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뭐 그대로 먹을 순 있긴 한데 딱딱하고 단단하죠. 그러므로 이제 뽑기 제작의 화룡점정이 펼쳐집니다.
이제까지 설탕을 녹여온 꼬챙이로 난로 구석백이에 있던 마법의 하얀 가루를 쿡 찍습니다. 그리고 녹은 설탕에 넣고 잘 뒤섞어주지요.

그 정체는 바로 Nacl... 은 아니고, 소다도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소-다 입니다. 분량이 너무 적으면 잘 안 되고, 너무 많이 들어가면 써집니다.
오직 적당한 비율로 들어갔을 때만 좋은 뽑기가 나옵니다. 뽑기의 달인인 할머니들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쇠꼬챙이로 쿡 찍어 넣기만 하는데도 녹은 설탕은 금방 하얗게 번지고 노리끼리한 색깔이 되어, 기존의 2배 분량으로 부풀어오릅니다.

 

...그걸 보게 되면 이제 슬슬 입 안에서 군침이 돌게 되지요. 할머니는 쇠꼬챙이로 국자 안의 뽑기를 빠르게 휘휘휘 젓고 무릎 앞의 양철 판대기에 퍽, 하고 내리쳤습니다. 그럼 국자 안의 뽑기가 고대로 톡 떨어지지요. 숟갈로 떠내도 그렇게 반듯하게 나오진 않겠다 싶어 늘 신기했는데, 물론 집에서 해보니 절대 안 되었습니다. 그게 다 달인의 솜씨다 싶어요.

그렇게 뽑기 반죽이 내려놓아지면.
할머니는 재빠르게 구석에 있던 호떡 누르개를 집어들고 지그시 눌렀습니다. 그렇게 빤빤해진 뽑기 한 가운데 양철로 된 모양 누르개를 찍었지요. 하트도 찍고, 다이아몬드도 찍고.
왼쪽 한 번 오른쪽 한 번, 그리고 한 가운데에 누르개로 선 하나 쫙 그어주는 원 액션, 투 액션, 쓰리 쿠션.
그런 뒤 양철 누르개로 바닥에서 샤악 분리하면 끝.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따끈한 뽑기를 건네받고 냠냠 먹으면 되었습니다.

 

원재료가 설탕이니 당연히 달콤하고, 소-다가 들어가서 약간 씁스레 하면서도 퐁신퐁신해서 그냥 설탕 녹인 덩어리보단 식감이 좋았지요. 그거 하나 들고 길을 걷노라면 마냥 행복했지요.

...가운데의 누름선은 형제가 있을 경우 나눠 먹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압력으로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하트라던가 다이아몬드 모양을 부러지지 않게 말끔하게 뽑아내면 하나를 더 준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렇긴 한데 아이의 서툰 손놀림으로는 잘 잘라내진 못했지요. 또 할머니들의 교묘한 솜씨는 모양을 찍어주기는 하되, 깊숙히 찍어주진 않아 작업에 애로사항이 꽃폈습니다. 그래도 다이아몬드는 그럭저럭 도전해볼만 했는데, 하트나 별은 진짜 미션 임파시블이었습니다.

저도 일평생 뽑기 모양 자르기에 도전했지만 성공한 것은 딱 한 번 뿐이었습니다. 친구놈 중 하나는 그걸 어떻게 해보겠다고 혀로 조금씩 천천히 녹여먹더군요. 또 어떤 놈은 명찰을 꽂아두는 안전핀의 바늘을 세워 뽑기의 테두리를 아주 열심히 긁어댔습니다... 성공했는지는 모르겠고요.

 

그렇긴 한데 뽑기의 세계도 참 다양하더군요.
아주아주 오래전, 시골 촌놈이던 저는 뚤레뚤레 서울에 갔는데, 어른들이 집을 비운 동안 사촌누이가 스케이트 타자며 절 끌고 나갔습니다. 어디 논두렁 같기도 한 곳에 얼음이 얼어있었고, 스케이트를 빌려주는 데였죠. 난생 처음 스케이트를 타본 저는 엉덩이가 촉촉히 젖을 때까지 엉덩방아를 찧어댔습니다.
그렇게 추운 곳에서 한참 놀다가 스케이트를 갈아신으려고 천막 안에 들어갔는데 사촌이 배가 고프다며 뽑기를 해먹더군요. 그런데, 제가 알고 있는 뽑기와 달랐습니다. 뭔가 하얀색과 분홍색이 섞인 네모난 것을 뽑기 국자에 놓고 녹이는 거여요. 그런 것을 난생 처음 본 저는 "우와 역시 서울 사람들은 뽑기도 굉장한 걸 먹는 구나 >ㅅ< "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그게 달고나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촌이 자기만 먹고 전 안 줬지요. 크르릉. 역시나 먹는 것에 얽힌 원한은 무섭습니다.

 

한편, 소-다 없는 설탕 뽑기도 아주 인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있는 건 아니고... 가끔 학교 앞으로 커다란 리어카가 올 때가 있었지요. 그 위에는 유리판이 놓여있었고 바둑판 모양의 종이 위에 수많은 숫자가 쓰여져 있었고, 또 많은 제비 쪽지들이 들어간 통 - 보통 분유통이었습니다 - 이 하나 있었지요.
노는 법은 간단했습니다. 아저씨에게 돈을 내고, 유리를 잘라 만든 판대기 몇 개를 바둑판 위에 가지런히 놓습니다.

이걸 기역자 모양으로 놓기도 하고, 아무렇게나 여기저기 흩어놓기도 하고, 그런 다음 통에서 제비를 뽑는 거죠. 제비를 펼쳤을 때 나온 숫자가 판대기에 가려둔 숫자와 겹쳐지면 축 당첨! 판대기에 쓰여진 모양의 뽑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꽝이면 손가락 만한 작은 뽑기를 받았지만 유리판 위에 전시된 뽑기는 크고도 아름다웠지요. 큼직한 물고기 모양도 있었고 독수리 모양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큼직한 설탕 뽑기들은 지나가던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해 리어카 제일 위에 보기 좋게 전시되어 있곤 했습니다. 여기엔 그래도 행운이 있었던지, 초등학교 5학년 때 바로 그렇게 제 팔뚝만한 큼직한 호돌이 모양의 뽑기를 받았지요.
시험 성적이 잘 나왔을 때 보다 그게 더 기뻤고, 자랑스레 큼지막한 걸 들고 집에까지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정말 원없이 먹었습니다. 처음엔 그런 뽑기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먹다 먹다보니 질리더군요. 쿠엑.

 

지금 와 생각하면 맹 설탕에다 영양가가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대단히 훌륭한 테크닉이 들어간 맛인가 하면 그것도 절대로 아닌데.
이젠 웰빙에, 초콜렛에, 육포에, 소세지, 치즈, 기타등등 참 맛있게 잘 만든 주전부리들이 참 많은데도 가끔 어린 시절 먹었던 그 뽑기만큼 행복하게 먹었던 게 또 있나 싶습니다.
물론, 치과에 가야 했던 것은 안 행복했지만...


이토록 그리운 것은 다시는 그 때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모두 즐거운 하루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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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홍대 앞 리치몬드 제과점도 문을 닫고. 사법부가 신뢰도를 잃어버리게 된 원죄랄 수 있는 인혁당 사건을 뒤져보다가, 너무 화나고 슬퍼서 빙구처럼 훌쩍 대다가, 기분이 너무 가라앉아 옛 추억을 뒤벼봤습니다.

역시 우울할 땐 단 게 최곱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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