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8일 금요일 밤 사진입니다.

 

일하는 곳에서 하는 여러가지 쓸데없는 짓 중에 허접한 축제가 몇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지지난 금토요일에 있었고, 거기서 갈대로 만든 움집 옆에 농기구와 살아있는 병아리를 전시했습니다.

불쌍한 병아리 10마리는 이틀 동안 애들의 만지작거리는 손길과 쌀쌀한 가을 날씨와 사람도 종일 있으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엄청난 소음에 시달리는 학대를 받아야 했고요.

저는 하루종일 음식 팔고 돈 받느라 바빠서 첫날은 병아리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끝내고 밤에 사무실에 돌아오니까 병아리가 있더군요.

제가 사무실 춥다고 이대로 두면 죽는다고 해도 다른 직원들은 "사무실 별로 안 춥다" 이딴 소리나 해댔고(아니 시골에서 자란 아저씨들이 왜 그걸 모르냐고!-_-)

전 일단 급한대로 물병에 뜨거운 물을 담은 후 수건으로 둘둘 싸서 상자에 넣어주고, 그 상자 안의 훈기가 빠져나가지 않게 신문지로 상자 안을 덮고, 그 위에 다시 스탠드를 켜주고 퇴근했습니다.

그러고 집에 와서 병아리 얘길 하니까 엄마가 백열등 들고 다시 가자고 하셔서(참고로 우리집에서 사무실까지 운전해서 대략 20km) 결국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어요.

가서 보니까 병아리들은 전부 물병 싼 수건 옆에 오골오골 모여서 자고 있었고, 저희(엄마+저+동생)는 스탠드를 치우고 가져간 전구를 켜주었습니다.

엄마가 "설마 이거 불 나서 병아리 다 타 죽진 않겠제?"라시길래 "엄마, 불 나면 병아리 죽는 게 문제가 아니고 내 짤린다"라고 답했고요.(제일 위 사진이 이때 모습)

이렇게 신경을 쓴 덕분인지 10마리 전원이 금요일밤은 무사히 넘겼으나 한마리는 토요일에 현장에서의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죽어버렸습니다.

엄마는 병아리 제대로 키울 사람 없으면 일단 우리집으로 데리고 오라고 성화셨고, 남은 9마리를 데리고 가겠단 분이 있긴 했지만

죽음에 초연한 촌사람들은 병아리 한두마리 죽고 사는 거에 신경도 안 쓸 것 같아서 일단 우리집에서 키우다가 좀 자라면 다시 분양하기로 하고 결국 9마리 병아리를 모두 싣고 집으로 왔어요.

축제 뒷풀이에 잡혀있는 동안은 병아리들을 수건 깐 스티로폼 상자에 담은 후 오리털 잠바(밤에 추우면 입으려고 들고 왔던 거)로 덮어서 차 안에 뒀는데 다행히 집에 갈 때까지 모두들 잘 버텨줬고요.

 

*10월 22일 사진입니다.(집 청소한다고 작은 상자로 옮겨 놨어요)

 

병아리들이 집에 온 후로는 온식구의 관심 속에서 전구로 보온을 해주고, 상자 안에는 개님의 화장실 패드랑 신문지를 깔고,

엄마의 특제 모이(쌀+콩+멸치를 믹서에 간 거)를 먹이며 보살폈는데 진짜 엄청나게 잘 먹고 잘 싸더군요.(새 신문지 깔아주면 4시간 만에 똥밭이 됨)

저희집엔 포식동물이 세마리나 있어서 병아리들을 괴롭히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개고 고양이고 아무도 신경을 안 써서 황당할 지경이었어요.

리지야 뭐 워낙에 순하니까 병아리를 좋아할 줄 알았는데 반 강제(...)로 인사 시키니까 좀 겁을 내는(싫어하는?) 눈치고,

꼬마 역시 별 관심 없거나 살짝 경계하는 것 같고, 꼬리는 가까이서 보여주면 무서워하고 평소에는 병아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것 같달까요.

좀 더 익숙해지면 사냥하려 들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보름을 넘긴 지금도 병아리들은 매우 안전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병아리집도 처음엔 안방 화장실에 뒀다가 아무도 관심이 없길래 이튿날 바로 보살피고 구경하기 좋게 거실로 옮겼어요.

그리고 눈 아프도록 쳐다보면서(전구를 켜놔서 오래 들여다보면 눈 아픕니다-_-) 집에 데려온지 12시간 만에 9마리 모두에게 특징대로 이름까지 붙였줬습니다.

흰둥이 노랑이 누렁이 얼룩이(털색으로 구분, 흰둥이도 사실 색이 제일 밝을 뿐 아예 하얀 건 아니에요), 네줄이(등에 무늬로 구분), 점점이 반점이 하트 큰점이(정수리 무늬로 구분)

그런데 얘들이 자라면서 솜털이 빠지고 깃털이 나기 시작하니까 이 특징이 희미해지고 있어서 개체 구분에 약간 혼란이 오고 있네요.

 


 

*10월 29일 사진입니다.

 

최근 십여년 동안은 개, 고양이 같은 고등 포유류만 같이 살았고, 조류가 집에 온 건 진짜 오래간만인데

보고 있으면 동물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멍청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생각보다 훨씬 인간이랑 비슷하다던 콘라트 로렌츠의 말이 절로 떠오릅니다.

집에 온지 사흘째 밤부터 네줄이가 좀 비실 거리는 것 같아서(지금은 멀쩡해요) 나흘째 아침에 바닥 신문지를 갈아주면서 밥이라도 좀 편하게 먹으라고

일부러 걔만 제일 먼저 집에 넣어줬더니 처음엔 밥 잘 먹다가 잠시 후에 혼자라는 걸 깨닫고는 엄청난 기세로 빽빽 울어댔어요.

직관적으로 다른 애들 없다고 저러는구나! 싶어서 얼른 나머지 여덟을 집에 넣어주니까 다시 조용해지던데 

진짜 한주먹도 안되는 쬐깐한 병아리도 혼자 남겨지는 상황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니까 뭔가 짠하더군요.

또 자기들끼리 노는 걸 보면 뭔가 원초적인 즐거움이 느껴지는 기분이에요.

지난주 화요일 저녁에 처음으로 논에서 주워온 짚단을 잘라 넣어주니까 그걸 쪼고 발로 헤집고 부산을 떨면서 노는 모습이나,

똥 묻어서 뭉친 모이를 물고 쫓아다니면서 술래잡기를 할 때(드러운 것들-_-),

배추를 잘라 주니까 한마리가 그걸 물고서 아직 따라오는 녀석도 없구만 날 잡아보란 듯 요란스레 뛰어다닐 때 등등 

소소한 즐거움을 추구한다고 해야하나, 닭대가리 닭대가리 하는 얘들조차도 유희적인 존재라는 게 확연히 눈에 보여요.

아 그리고 주제를 바꿔서 하나 더 느낀 점은 역시 진화란 정교한 작업이구나- 입니다.

솜털이 빠지고 깃털이 날 때 날개부터 제일 먼저 바뀌는 걸 보면서 그래, 새한테 제일 중요한 건 날개지- 이러고 감탄했어요.(날개 다음으론 꽁지 깃이 납니다)

대략 한달쯤 키우면 실내에서 키우긴 버거울 정도로 자라리라 예상을 했고,

데려올 때부터 시한부 관상용이라고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쑥쑥 자라는 것 같아요.

처음 데려왔을 땐 날개에 깃털이 좀 있을 뿐 연약한 병아리였는데 셋째날부턴 밥그릇(과자 상자를 압정으로 바닥에 고정시켜뒀거든요)을 엎어서 벽에 구멍 뚫고 끈으로 묶어둬야 했고,

그 다음날엔 꽁지깃이 돋아나는 게 눈에 보이고, 온 지 일주일쯤 지나서는 배추를 안 잘라줘도 잘 쪼아먹고, 알갱이가 큰 모이도 잘 먹고, 아주 무럭무럭 크고 있습니다.

데려온 후 상자를 두번이나 더 큰 걸로 교체해줬는데 지금 쓰는 상자도 벌써 좁아보여서 좀 더 큰 상자를 구해뒀습니다.(거대한 상자가 안 구해져서 중간 상자 두개를 연결하려고요)

하는 짓을 보니 횃대에 올라앉고 싶어하는 눈치라서 더 크고 깊은 상자로 이사하면 설치해 주려고 나무막대도 미리 하나 구해놨고,

저번주엔 공수의한테 생균제랑 비타민제를 얻어서 그것도 모이에 섞어 먹이고 있고, 어제는 중병아리 사료도 25kg짜리를 주문했어요.(택배 아저씨 죄송합니다) 

 

 

*방금 찍은 사진입니다.

 

어차피 결국엔 전부 잡아먹히겠지만 그래도 당장 살리고 보자+행복한 유년기를 보내게 하자는 생각으로 데려왔는데 

보다보니 정이 들어서 한두어마리라도 빌라 옥상에서 키우면 안되나? 이런 욕심이 생겨요. 

얘들 우리집에서 이렇게 호강하면서 살다가 갑자기 촌에 가서 곧 식량이 될 가축 취급 받으면 얼마나 충격 받을까- 이런 생각에 서글퍼지기도 하고,

닭고기 잘만 먹으면서 왜 이렇게 위선을 떨고있나 이러면서 괴로워도 합니다.

며칠 전엔 9마리 중 유일하게 꽁지깃이 안 난, 유달리 발육이 느린(게 아니라 유일한 암탉일지도 모르는?) 점점이를 잠깐 손바닥 위에 놓고 만지니까

잠이 오는지 눈을 슬 감더니 좀이따 다시 상자에 넣어줘도 손에서 내려갈 생각을 안 하더군요. 제가 손으로 밀어도 버티고요.

심지어 어제는 하트를 손에 올렸다가(하루에 한두번 정도, 오늘은 얘 내일은 쟤- 이렇게 돌아가면서 만집니다. 일주일에 한번쯤 손타는 건 큰 스트레스는 아니겠거니 하면서요) 
다시 상자에 넣어준다고 손을 넣고 있으니까 점점이가 제 발로 제 손바닥 위에 올라와서는 하트를 밀어내고 탁 앉아버렸습니다.

제 심정은 점점이 너무 귀여워+엉엉 니 이렇게 손 타서 어쩔려고 그러니-였고요.

 

얘들 더 안 크고 그냥 이대로 저희집에 쭉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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