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대로.

2014.03.08 19:26

잔인한오후 조회 수:1360

1_ 그런 논리를 들어봤던 적이 있습니다. 대략 "진심은 전하여 확증하지 않는다."로 줄여 볼 수 있는데, 개인이 강한 감정을 가졌을 때 타자에게 이야기를 전하면 그 깊음이 훼손된다는 식의 이야기였습니다. 정말 슬픈 사람은 겉으로 슬퍼하지 않는다거나, 심히 괴로운 사람은 괴로움을 남에게 호소하지 않는다거나 말이죠. 잘 생각해보면 괴로움을 나누는 이들을 폄하하고, 자신을 다른 무언가로 차등을 두어 안심하려는 논리인지도 모릅니다. 나누지 않음을 나눔으로써 안전하게 자기의 감정을 유지하는 거죠.


저는 "기쁨은 나누면 두 배,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라는 감정역학을 믿지 않습니다. 인간의 감정에 역학이 있다면 거시 물리학보단 미시 물리학에 어울리겠고, 대통일 이론 같은게 있더라도 저렇게 E=mc^2 마냥 딱 떨어지리라 생각하기도 힘들겠죠. 무엇보다 앞 뒤가 똑같은 비례식이었다면 대충 납득하고 넘어갈 터인데, 정반대이니 좀 안일하고 쉽게 생각하고 만든 말이 아닌가 싶더군요. 감정은 마치 가상정보와 같아 복제하는데 비용이 적게 들거나 아예 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둘 다 나눴을 때 전보다 늘어나는게 옳지 않나 싶어요. 관용어구를 이런 식으로 짓이기는 것은 반칙이겠지만, 뭔가 슬픔을 분담할 때의 비용을 낮춰잡는 회계 사기 같달까해서. 인간이 슬픔을 해소하는 데 있어 공유할 때 그다지 힘을 안 써도 되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산술급수도 아니고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니.


이런 투덜거림은 개인적인 감정 길항상태 때문이겠죠. 저는 지금 오도가도 못하는 상태에 빠져있어요. 상태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물리학 관련 서적에서 두 가지 상태를 기술하는걸 본 적이 있어요. 구를 절반으로 잘라서, 바가지처럼 놓인 것과 산처럼 놓인 것의 중앙에 작은 공을 놓는 거죠. 전자는 힘을 가해도 결국 한 점으로 수렴할 것이고, 후자는 중앙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힘들겠죠. 당연하게도 저는 전자의 이미지에게 잡혀있습니다. "불가항력"이라는 단어도 잡힐락 말락 제 곁을 떠돌다가 최근에 잡았죠. 자신의 감정이 공감받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과 감정을 나누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안정감 및 피로감을 동시에 얻는 적정한 공간, 그런 공간에 마치 우주에서 온도가 안정되어 있는 지구에 옴싹달짝 않고 달라붙어 사는 인류마냥 시간을 허비하고 있죠. 헛수고도 수고고, 수고는 피로를, 피로는 만족감을 주니까요.


2_ 최근, 무언가를 많이 잊어버렸다는 것을 느끼고 조금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예컨대, "나 요새 기억력이 많이 떨어져서"라고 말하는 것보다 차라리 "나 요새 망각력이 많이 늘어서"가 적합하달까요. 삶을 살면서 어떤 계를 배우다 보면, 어느 순간 구조 전체가 직관적인 틀 하에 이해되며 빠듯한 기쁨을 느낄 때가 있는데, 결국 몇 번이나 또한 몇 개나 그런 중간 단계의 흡족함에 빠진 후 모든걸 잊어버림을 반복하는 중입니다. 제 자신에게 치명적인건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남은게 하나도 없다는 거구요. 달성한 것도 획득한 것도 없어요.


다만, 모 책에서 그랬던 것을 기억하며 조금의 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책을 한 참 읽을 때 읽은 것들이 어디론가 희석되어 날아가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아, 마치 수 년간 물만 마시고 온 사람처럼 허탈감이 들었을 때, 그러더군요. "우리는 음식을 먹을 때 그 영양분이 어디로 갈 지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식사가 우리를 유지시켜주는 것을, 그리고 우리를 형성하는 일부분이 됨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독서의 결과는 마치 그와 같다."라구요. 정확하진 않지만 이 비슷하게 위로를 잘 하는 책이었어요.


니힐리즘에 빠지는 것만큼이나 바보같아 보이는 건 따로 없겠지만 말입니다.


3_ 생각해보면, 저는 누군가에게 납득이나 이해나 공감을 바라본 적이 또는 그걸 위해 노력해본 적이 없습니다. 제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제 자신의 상황이 납득도 이해도 공감도 힘든 상황이란 걸 잘 알고 있으니까요. 다른 무엇보다도 자업자득이니까요. 자기한테도 납득이 안 되는걸 남에게 납득해달라 징징거릴 수는 없잖아요. 세상에게 투정부릴 줄 모르는 건 별로 좋은 일은 아니겠죠. 하지만 교과서적으로는 투정부리는 사람들이 안 좋은거니까요.


김기덕 감독 작품을 단 한 편도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해서 <배우는 배우다>를 본 적이 있어요. 벌써 한참 된 일이군요. 제가 김기덕 감독에게 느끼는 이미지는 관객을 괴롭히는 감독이라는 정도. 제 자신을 괴롭혀보고 싶어서 보러 갔습니다. 맘에 드는 영화였습니다. 아마 각본가는 명대사를 쓰면서 자신도 그 대사가 주요한 대사라는걸 알고 있겠죠. 노골적이지 않게 전달되도록 노력도 할 것이고, 이리 저리 돌려도 볼 것이고.. 작품에서는 실제 세계에 있다면 용서해주기도, 공감해주기도, 이해해주기도 곤란한 두 사람이 나옵니다. 그 중 주인공은 심한 편이죠. 결국 나락으로 떨어진 둘이 만나 "우린 항상 제자리걸음이에요."라고 전하는게 전부인 영화였습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어떻게 생각하면 등장인물들을 괴롭히다 꼬부라치는 이야기는 비극으로서는 통속적일지도 모르겠군요.


4_ 제 삶은 어떻게 보면 정신적인 깨달음의 연속이었습니다. 성인과 같은 높은 단계의 그런 깨달음이 아닌, 작고 소소한, 자신의 정신에 걸맞는 그런 논리적 사고의 타당한 결론, 이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문제 해결로의 실마리 말이죠. 다만, 그런 것들이 삶의 실질적인 변화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죠. 마치 정신적 작심삼일과도 같은, 그러니까 방법론으로는 아무도 천재나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단순한 논리죠. 깊게 생각하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운동을 했다면 좀 더 좋은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또다른 골목의 끝에서 얻은 소소한 깨달음은, 깨닿는 것은 쓸모가 없다는 거죠. 바뀌지 않는게 당연하기도 하고.


그래서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살았어요. 무언가를 생각해서 쌓아 올리는 것에 질려버렸기 때문에. 아직도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

글을 쓸 때 독자를 상정하는건 정말이지 중요한 일입니다. 독자를 상정하지 않고 글을 쓰는건 가혹하구요. 저는 다만 글이 쓰이는 곳을 /


*_ 헛수고도 수고고, 수고는 피로를, 피로는 만족감을 주니까요. (이 구절이 명대사라고 생각하는건 아닙니다. 마지막에 있어야 될 거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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