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하며 글쓰기.....의 실체

2017.08.22 15:35

Bigcat 조회 수:1796

....나는 어느 시기부터 장편소설은 해외에서 쓰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이건 일본에 있으면 아무래도 잡일(혹은 잡음)이 이것저것 자꾸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외국으로 나가버리면 쓸데없는 생각은 할 것 없이 집필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특히 내 경우에는, 쓰기 시작하는 시기에 - 장편소설 집필을 위한 생활 패턴을 정착시키는 중요한 시기에 해당하는데 - 일본을 떠나 있는 편이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일본을 떠났던 게 1980년대 후반인데 그때는 역시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정말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고 불안해했습니다. 나는 상당히 겁이 없는 편이지만, 그래도 역시나 배수의 진을 친다고 할까 돌아올 길을 끊어버리는 식의 결심이 필요했습니다. 여행기를 쓰겠노라고 약속하고 무리하게 출판사에서 약간의 선급금을 받기도 했지만(그건 나중에 <먼 북소리>라는 책이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내 저금을 헐어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까.

 

 그런데 마음먹고 결단을 내려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했던 것이 내 경우에는 좋은 결과를 낳았던 듯합니다. 유럽 체제 중에 썼던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소설이 어쩌다 - 예상 밖으로 - 잘 팔리고 생활이 안정되면서 장기적으로 오랜 기간 소설을 쓰기 위한 개인적인 시스템을 우선은 설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오만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행운만으로 일이 흘러간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일단 내 나름의 결의와 배짱이 있었습니다...

 

 이사크 디네센은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씁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매일매일 20매의 원고를 씁니다. 아주 담담하게. '희망도 절망도 없다'는 것은 실로 훌륭한 표현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네 시간이나 다섯 시간, 책상을 마주합니다. 하루에 20 매의 원고를 쓰면 한 달에 6천 매를 쓸 수 있습니다. 단순 계산하면 반년에 3600매를 쓰게 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해변의 카프카>라는 작품의 초고가 3600매였습니다. 이 소설은 주로 하와이 카우아이 섬의 노스쇼어에서 썼습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곳이고 게다가 비가 자주 내려서 그 덕분에 일은 잘됐습니다. 4월 초에 쓰기 시작해서 10월에 다 썼습니다. 프로야구 개막과 동시에 시작해 일본 시리즈 시작할 때즘에 끝냈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합니다. 그 해에는 노무라 감독 휘하의 야쿠르트 스왈로스가 우승했습니다. 나는 오랜 세월 야쿠르트 팬이라서, 야쿠르트는 우승하지, 소설은 다 썼지, 아주 싱글벙글했던 게 기억납니다. 대체로 내내 카우아이 섬에 가 있었기 때문에 정규 시즌에 진구 구장에 거의 가지 못했던 것은 유감이었지만....

 

...소설을 쓴다는 것은 밀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한없이 개인적인 일입니다. 혼자 서재에 틀어박혀 책상을 마주하고 (대부분의 경우) 아무것도 없었던 지점에서 가공의 이야기를 일궈내고 그것을 문장의 형태로 바꿔나갑니다. 형상을 갖고 있지 않았던 주관적인 일들을 형상이 있는 객관적인 것으로 (적어도 객관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환해간다 - 극히 간단히 정의하자면 그것이 우리 소설가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작업입니다.

 

 "아니, 나는 서재같은 대단한 건 없는데요."


라는 사람도 아마 계시겠지요. 나도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할 무렵에는 서재 따위는 없었습니다. 센다가야의 하토노모리하치만 신사 근처의 비좁은 아파트(지금은 철거되었지만)에서 주방 식탁을 마주하고 아내가 잠들어버린 한밤중에 나 혼자 원고지에 사각사각 글을 썼습니다. 그렇게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 처음 두 권의 소설을 써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두 편에 (내 마음대로) '키친 테이블'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소설 <노르웨이의 숲>의 첫 부분은 그리스 각지의 카페 테이블이나 페리 좌석, 공항 대합실, 공원 그늘, 싸구려 호텔의 책상에서 썼습니다. 큼직한 원고지를 일일이 들고 다닐 수 없어서 로마의 문구점에서 산 값싼 노트 - 옛날식으로 말하면 대학 노트 - BIC 볼펜으로 자디잔 글씨를 써 내려갔습니다. 주위가 와글와글 시끄럽고 테이블이 흔들거려 글씨를 제대로 쓸 수 없거나 노트에 커피를 흘리기도 하고, 호텔 책상에서 한밤중에 문장을 음미하는데 얇은 벽 너머로 옆방에서 남녀가 성대하게 일을 치르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뭐 이래저래 사연이 많았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흐뭇한 에피소드 같지만 그때는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일정한 주거지를 찾지 못해 그 뒤에도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장소에서 그 소설을 썼습니다. 커피(인지 뭔지 모르겠는) 얼룩이 진 그 두툼한 노트는 지금도 내게 남아 있습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중에서, 양윤옥 옮김

 

 

 

 

 

 

 

 

근사하네요. 바로 이것이었군요. 유럽여행하면서 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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