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제목이 별로 제 취향이 아니어서 예고편도 안 보고 있다가 어젯밤에 본방송을 봤는데요. 


아흔 살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하는 다큐를 이렇게 에로틱하게 찍을 수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아직 며칠 더 남았지만) 저에겐 올해 가장 인상깊은 EIDF 다큐가 될 것 같아요. 


내용은 간단합니다. 


어떤 남자 무용수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들이 있는 요양병원에 가서 할머니 한 사람 한 사람과 춤을 춥니다. 


자기 이름도 잘 기억 못하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할머니들이 춤이라는 걸 제대로 출 리가 없겠죠. 


그런데 이 남자 무용수는 각 할머니의 몸 상태에 맞춰서 능수능란하게 리드하며 아주 멋지게 춤을 춥니다.  


덕분에 할머니들은 어리버리한 상태, 그냥 이 남자에게 몸을 맡기면 저절로 춤이 나오는 그런 상태에서 


잠깐 동안 마치 무대 위의 여주인공이 된 것처럼, 마치 이 남자 무용수에게서 구애를 받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가 된 것처럼 


젊은 시절 느꼈던 로맨틱한 감정을 맛보게 되죠.   


이 남자 무용수는 50대쯤 되어 보이는 베트남과 프랑스의 혼혈인데 차림새는 무슨 부랑자 같지만 춤은 멋지게 춥니다. 


할머니들은 로맨틱한 노래와 춤의 분위기에 취해 어질어질 혼미한 상태인데도 잘생긴 청년에게서 구애를 받은 


10대 소녀처럼 즐거워하고 흥분한 모습을 보여주더군요. 


어떤 할머니는 이 남자 무용수에게 좋아한다고 고백도 해요. 


이 지점에서 저는 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이런 춤을 계속하는 것이 이 할머니들에게 좋은 것인가... 


남자 무용수와의 로맨틱한 춤이 할머니들에게 젊은 날을 환기시키고 삶의 에너지를 불러 일으키는 즉각적인 효과를 주긴 해도 


사실 이 춤은 잠깐 동안 무대에서 벌어지는 연극과도 같은 것인데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는 그것을 현실처럼 느끼고 


연애 감정을 갖는 모습에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정말 아홉 살 소녀 같은 모습... ㅠㅠ) 


이 남자 무용수와의 춤이 할머니들에게 불러일으킨 어떤 에너지는 기쁨도 배가시킬 수 있지만 고통도 배가시킬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마음이 복잡해지더군요. 


나이가 든다는 게 젊음이 불어넣는 어떤 감정적인 에너지를 잃어가는 과정이라면, 그런 에너지의 상실은 삶에서 맛볼 수 있는 


기쁨과 흥분도 줄어들게 하지만 삶에서 맛볼 수 있는 (자신에게 가하거나 혹은 타인에게 느끼는) 격렬한 심리적 고통들도


줄어들게 하겠죠. 그야말로 자신에 대한, 그리고 타인에 대한 모든 감정이 조금씩 둔해지고 무감각해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런데 그런 에너지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건 삶의 기쁨도 다시 증폭시키겠지만 감정적인 고통도 다시 증폭시키게 되겠죠.  


알츠하이머에 걸려 시들어가는 할머니들에게는 이 남자 무용수와의 춤을 통해 얻는 삶의 활력이 좀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실 감각에 좀 문제가 있고 감정적으로 상처를 받는다고 해도 혼자서는 되살릴 수 없는 그런 에너지가 필요할 거예요. 


어쩌면 나이가 들어가는 모든 사람은 그런 에너지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를 매력적인 여성으로, 혹은 매력적인 남성으로 


보아주는 그런 시선과 몸짓만이 줄 수 있는 에너지가 있는 것 같아요. 그건 그냥 사람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욕망인 것 같습니다. 


이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 생의 활력이 시들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나이가 드신 분들께 정말 필요한 것은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느낌은 그냥 기계적으로 돌봐주는 것으로는 도저히 충족될 수 없는 것이죠.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눈빛과 몸짓과 행동으로


느껴져야 하는 것이고 춤과 같은 어떤 신체적 접촉과 움직임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고요. 


나이가 90이 되어도, 알츠하이머에 걸려도, 누군가 자기를 여자로 보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저 밑바닥에 여전히 남아있는 걸 보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욕망과 고통을 생생하게 맛볼 수 있는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죽음 혹은 늙음으로부터 조금은 멀어질 수 있는 건가 


생각하면서, 아마도 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삶의 에너지를 다시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삶을 선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선택이 가능하다면요...) 



결론은... 이 다큐 재미있습니다.  보시려면 => http://www.eidf.co.kr/dbox/movie/view/307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394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948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550
121676 경복궁역 혹은 경복궁 옆, 통의동, 카페 B612 [10] 01410 2010.08.05 12657
121675 인셉션 결말 뒷북 (제 생각이 오바일까요 ㅠㅠ 스포) [7] 진달래타이머 2010.08.05 3764
121674 새벽 바낭적 주절주절(암울한 이야기) [3] run 2010.08.05 2628
121673 [바낭] 최근에 지른 것.. [7] 진성 2010.08.05 3534
121672 이번에 빨리 등업하신 분들 축하드립니다(내용은 없습니다) [5] 가끔영화 2010.08.05 1514
121671 신기한 우연 - 길과 꿀단지 [1] Tamarix™ 2010.08.05 2654
121670 눈팅만 한지 벌써 몇년이던가... (바낭) [2] 블랙엘크 2010.08.05 1537
121669 베스트 만화 [20] 보이즈런 2010.08.05 4810
121668 청춘쌍곡선 [2] 키드 2010.08.05 2068
121667 [이것이 바낭이다] 흙먼지 맛이 나는 노래 [16] 룽게 2010.08.05 2026
121666 [bap] 두타재즈페스티벌이 열리는군요 [3] bap 2010.08.05 1942
121665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 반 (본문삭제했습니다) [21] 뚜레 2010.08.05 4501
121664 가입인사. 와 첫글이에요. 씐나요:)! [8] Paul_ 2010.08.05 2358
121663 결국 목도리까지 하였습니다. [13] soboo 2010.08.05 4091
121662 올레패드? 엔스퍼트 - 아이덴티티 제품군 어떨까요? [2] Parker 2010.08.05 1823
121661 지금 CinDi 예매중인 분 계세요? [9] 로즈마리 2010.08.05 1687
121660 와콤 타블렛 쓰시는 분 계세요? [6] Paul_ 2010.08.05 2718
121659 혼자 여행을 계획하니 숙소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습니다. [18] 토토랑 2010.08.05 4315
121658 홍대나 신촌에 괜찮은 만화방 좀 소개해주세요. [7] 호레이쇼 2010.08.05 4294
121657 피싱전화 받았어요-_- [2] 폴라포 2010.08.05 204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