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전에 있었던 성폭력 피해가 다시 떠올라서 괴로웠습니다. 잠을 잘 이루지 못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어요. 그 사건이 그토록 강하게 각인된 것은, 무력하게 당했던 마지막 사건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그 후에 저는 흑화.. 아니 자화(紫化)되어서 더 이상은 그렇게 손 놓고 당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자화라는 말은 방금 지어냈어요. 페미니즘의 보라색이란 뜻이죠.


그 사건에서도 피해자들은 상처입고 위축되고 그 커뮤니티를 한동안 떠나게 되었는데 가해자들은 잘 살아갑니다. 교양 있는 시민인 척 하고 개념글까지 쓰더군요. 사실은 그 가해자의 '개념글' 때문에 멘탈의 기울어진 운동장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개별 사건마다 다르지만, 분명히 패턴이 있습니다. (물론, 패턴이기 때문에 예외도 있습니다. 100% 맞는 건 아니에요. 어떤 가해자는 죄책감을 많이 느끼고 개과천선하기도 합니다. 죄책감을 느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폭력 피해자는 (피해자인데도!) 그토록 죄책감을 느끼고 가해자를 피해다니고 피해다니다 못해 공동체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인간관계를 다 끊고 스스로 유폐시키는 사회적 자살에 이르고, 심지어는 진짜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해자는 뻔뻔하게 피해자를 공격하고 자기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려 애쓰고 직장과 학교를 버젓이 다니고 멘탈에 타격도 입지 않은 상태로 살아갑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리벤지 포르노 피해자가 분개해서 가해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다닐 수 있어야 합니다. 억울한 피해자니까요.

또 누군가가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밝히면, 페미니즘을 좋아하지 않는 남자라도 그냥 어깨 한 번 으쓱 하고 지나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남자 개인에게 피해를 준 것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현실은 정 반대입니다.

리벤지 포르노 피해자는 죄인이 되어 자신을 지우고 숨어 살고, 상당수는 자살합니다. 

반면 페미니스트를 발견한 남자들은 분기탱천해서 그 페미니스트를 사회적으로 처벌하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개인적인 신상을 알아내어 퍼뜨리고 가족까지 협박하고 직장에 전화를 해서 짤리게 만듭니다. 


대체 왜요?

멘탈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다수 여성들은 뭐든 자기 탓을 하는 쪽으로 공이 굴러가고, 대다수 남성들은 남 탓을 하는 쪽으로 공이 굴러갑니다. 

다른 말로 하면 출발선이 다릅니다. 여성들의 평균 자존감이 너무 낮습니다. 사회적인 성취를 이루고 친구들에게서 정서적 지지를 듬뿍 받고 페미니즘 공부를 한 상태가 되어야 겨우 보통 남자의 자존감 수준에 이르는 것 같습니다. 반면 대다수 남자들은 본인이 지역 차별을 겪거나 유학가서 인종 차별을 당하는 등 소수자 입장에 한참 있으면서 성찰해봐야, 겨우 여성의 낮은 자존감에 공감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듯 보입니다. 

 

대체로 세 가지 원인을 생각해볼 수 있을 듯 합니다.

1. 생물학적인 차이

남성들은 자아상을 크게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고 하지요. '내가 운동을 안 해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권상우는 씹어먹는다'는 식의 자신감이요. 진짜 자신감이든 근자감이든 남성이 약간 더 강한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2. 양육 과정의 차이

생물학적인 차이는 아주 근소할 수도 있는데, 이것을 뻥튀기하는 것이 사회화 과정입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부끄러워하고 자신을 낮추라는 교육을 받습니다. 지금은 나아졌지만, 중년 이상의 여성들 이름에는 종말이, 끝순이, 소년이(작은년), 대년이 (큰년) 같이 막 갖다붙인 이름들이 많죠. (고종이 어렸을 때 개똥이라고 불렸다지만, 이건 악귀가 귀한 아들 해칠까봐 일부러 천하게 부른 것이고, 나중에 정식이름은 물론 근사하게 지어줬지요. 여성들은 저게 정식이름입니다..) 영유아들의 변비 비율이 벌써 차이가 납니다. 겨우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여아들도 이미 자신의 몸, 성기, 대변이 사회적으로 불편한 존재라는 감을 잡는 것이죠. 그래서 집이 아니면 변을 참는 경향이 더 나타납니다. 그 뒤로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순결, 조신한 몸가짐, 겸양 등에 대해 훈육을 받습니다. 저만 해도 '순결을 잃으면' 자결해야 하는 줄 알았어요. 

반면 남성들은 씩씩하고 대범하고 용맹한 태도로 꿈을 맘껏 키우라는 메시지를 받아요. 그냥 아들이라서 대놓고 위해 주는 집안도 많죠. 

3. 수컷 트러스트의 지지

성폭력, 성차별 사건의 현장에서 대부분의 남자는 침묵합니다. 암묵적인 동의죠. 사건이 불거져도 은연중에 또는 대놓고 가해자를 지지합니다. 가해자는 믿는 구석이 생기는 거죠. 

이 수컷 동맹은 피해자에게 이차가해를 하는 역할을 합니다. 많은 경우는 자신들이 이차가해를 한다고 인식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런 차이가 생깁니다.

밤 늦은 시간에 뒤에서 낯선 남성이 따라오면 그 순간 여성에게 드는 내재화된 공포와 오만 가지 시나리오가, 그 남성에게는 전혀 공감이 가지 않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뜻인지 아예 감을 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남성들보고 '당신의 어머니, 당신의 자매, 당신의 딸이 이런 성차별, 성폭력을 겪는다고 생각해보라'라고 말하는 건 원칙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아요.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는 '당신 자신이 이런 일을 겪는다고 생각해보라'라고 말하는 게 옳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전혀 감흥이 없는걸요. '여성상사가 당신의 엉덩이를 주무른다고 생각해보라'라고 하면 많은 남자들은 '와우. 짜릿하겠는데.'라고 느낄 겁니다. 고양이 앞의 쥐처럼 얼어붙는 공포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수치심이 내면화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뭐가 그렇게 거절하기 어렵고 두고두고 상처가 되는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남성 상사가 당신 딸의 엉덩이를 주무른다고 생각해보라'가 그나마 상상 가능한 대안(?)인 듯 합니다... 


어디서 딱 잘라야 할지 알 수 없이 스물스물 경계를 넘어오는 위계에 의한 성폭력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애인 있냐는 질문에서, 애인이랑 어디까지 해봤냐는 질문, 네 자취방에서 차 한 잔만 달라는 요구, 그리고 더 강도 높은 신체적 접촉....

가해자는 피해자가 어떤 기분일지 전혀 상상하지 못합니다. 같은 시공간에 있지만 보고 느끼는 것이 완전히 다른 거죠. 그런 굴욕감과 수치심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으니까요. 아마 그런 기분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상상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반면 수치심이 내면화되도록 사회화된 여성들은 그냥 속 편하게 사는 게 뭔지 상상하기 어렵네요. 


아마 이에 대한 연구도 이미 되어 있고 '멘탈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의미하는 학술 용어도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에, 혼자 낑낑대며 어렴풋하게 인식한 내용이 '교차성 intersectionality'란 용어로 이미 정립되어있는 걸 보고.. 역시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고 느꼈답니다. ^^)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패턴화는 모든 사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성과 남성 두 개의 성만 서술했지만 다른 정체성도 많이 있고요. 또 뻔뻔한 여성도 있고 소심한 남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여성의 입장에 일단 공감할 수 있게 되어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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