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하루...

2018.09.08 12:02

안유미 조회 수:703


 #.아직 박근혜의 위세가 대단하던 시절...그리고 다음 번 대통령은 누가 될 것 같냐고 물으면 반기문의 이름이 떠오르던 시절이었어요. 29가 내게 말했어요. 집에 있는 TV에서 tv조선 같은 종편 채널을 몽땅 삭제해 버렸다고요.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새누리당 칭찬과 민주당 욕을 할 때마다 가열차게 반박해드리고 있다고 말이죠. 그래서 대답했어요.


 '그런 건 의미도 없어. 형의 아버지도 나이를 많이 드셨으니 옳은 게 뭔지 잘못된 게 뭔지는 이제 중요하지도 않아. 나라면 어르신들에게 그냥 tv조선의 정치 포르노를 틀어 드릴거야. 그걸 보면서 그냥 하루를 즐겁게 보내실 수 있도록 말야. 그거면 된 거 아니야?'


 그래요. 당시에는 정말...종편 뉴스와 토론은 포르노보다 더했어요. 그 취향의 어르신들이라면 그걸 보며 충분히 신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 취향만 맞는다면 하루종일 블로우잡을 받는 기분일걸요. 


 그리고 그 편이 나아요. 수십년도 훨씬 넘게 살아온 어르신과 정치 문제로 말싸움을 하고...결국 말빨로 굴복시킨다고 해도 어른들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잖아요. 바뀌는 거라곤 없어요. 상대의 기분만 잡치는거죠. 상대가 수십년간 믿어온 걸 논파시키거나, 논파당했다고 인정하지는 않지만 상대를 더이상 할 말이 없을 때까지 몰아붙이는 것...그런 건 유쾌한 일이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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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약간 기분이 나았어요.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부유하는 상념...악념...뭐 그런 것들이 조금 줄어든 것 같았어요. 일어나서 주식을 좀 보고 가만히 있다가 외삼촌네 집에나 가 볼까 싶었어요. 삼촌이 유튜브를 보고 싶어하는데 유튜브가 되질 않는다...라는 말을 어머니를 통해 들어서요.


 외삼촌은 심심하게 살거든요. 가끔 외삼촌의 집에 찾아갈 때마다...들어서는 순간 시간이 멈춰버린 곳에 와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요. 케이블 티비도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하루종일 공중파 채널을 틀어놓고 있는데...공중파 채널엔 무시무시할 정도로 볼 게 없죠. 모두가 알듯이. 외삼촌네에겐 아이도 없고...그리고...뭐랄까. 아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거죠. 


 그분들은 나 같은, 자기애와 심술로 똘똘 뭉친 싸이코가 아니니까요.



 2.전화를 해보니 와도 좋다는 대답이 돌아와서 가기로 했어요. 도착하니 이미 점심 시간이어서 외숙모는 식사를 하고 있었어요. 외삼촌도 식사를 해야 했지만 그러는 대신 내가 컴퓨터를 고치는...정확히는 인터넷을 고치는 걸 구경하러 왔어요.


 사실 컴퓨터에 관한 무언가를 내가 고친다...이건 넌센스죠.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거든요. 삼촌네 컴퓨터는 뭔가 글자가 자글자글거리고...해상도도 맞지 않았는데 아무리 해상도를 잡아 보고 글자의 가독성을 나아지게 해보려고 해도 어떻게 하는 건지 짐작도 안 갔어요. 결국 포기하고 유튜브나 되도록 만들어 보기로 했어요.


 그건 꽤 간단했어요. 그냥 크롬을 까니까 유튜브는 알아서 되더라고요. 인터넷 브라우저에서 크롬으로 즐겨찾기 목록도 옮겨 드렸어요. 그리고 유튜브 사이트를 보여 드리며 '여기에는 온갖 것들이 있으니까 찾아 보면서 재밌게 시간을 보내시라...'고 말해 드리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삼촌의 목적은 지만원의 사이트에 링크되어 있는 유튜브 동영상을 보는 거였어요. 즐겨찾기 목록을 보니 지만원 사이트에 일베(...)까지도 있었어요. '이 사이트는 이상한 놈들 모이는 곳 아닙니까.'라고 한마디 하자 삼촌은 피식 웃었어요.



 3.그래도 삼촌이 유튜브라도 보며 소일거리를 찾았으면 좋겠다...싶은 마음에 이런저런 걸 보여 드렸어요. ytn뉴스 실시간 방송을 보는 법이나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검색해서 보는 방법 같은 거요. 삼촌이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좋아할 것 같아서요.


 어쨌든 크롬을 깔고 유튜브 정도를 재생되게 만드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이었어요. 숙모가 삼촌에게 근처에 있는 돈까스 집에 나를 데려가서 식사라도 하라고 권해서 같이 나갔어요.

 

 신사에서 논현으로 이어지는 거리를 걸으며 이런 곳에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는 곳을 평화로운 곳으로 옮기면 악념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희망을 조금 품고 있거든요. 한동안 걷다 보니 저쪽에 돈까스 가게 같은 게 보였지만 알고 보니 네일샾이었어요. 다시 한동안 걸으니 이번엔 돈까스 집이 보였어요. 삼촌이 입을 열었어요.


 '저건 우리나라식 돈까스는 아니고 쪽발이들이 하는 그런 돈까스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경양식이 아니라 일본식이군요.'라고 대답했어요.



 4.휴.



 5.돈까스는 상당히 맛있었어요. 하긴...그런 곳에서 가게를 열고 살아남고 있다면 그 가게가 맛이 없을 리는 없겠지만요. 양은 꽤나 적은 편이었지만 삼촌이 돈까스 두 조각을 줘서 배불리 먹었어요. 삼촌은 만원짜리 다섯장을 주며 가지라고 했어요.


 그 돈을 쥐고...별 생각 없이 주머니에 넣으려다 갑자기 안톤 쉬거의 대사가 떠올랐어요. 쉬거가 가게 사장에게 '그 동전은 절대로 다른 동전과 섞이게 두지 마시오.'라고 하던 장면 말이죠.


 나는 그 돈을 왼쪽 주머니에 넣었어요. 다른 돈과 섞여서...술집 사장에게 건네지거나 술집 호스티스에게 건네지는 일이 없도록요.


 헤어지기 전에 한번 더 물어 봤어요. 집에 케이블티비를 설치하면 어떻겠냐고요. 삼촌은 내심 그러길 바라는 것 같았지만 숙모의 반대가 마음에 걸렸는지 숙모가 하는 말과 똑같은 말을 했어요. '그런 거 놓으면 하루종일 그것만 봐서 안 돼.'라고요. 그래서 대답했어요.


 '하루 종일 보고 싶어질 정도로 좋은 게 있다면 더더욱 집에 들여놔야죠.'


 어쨌든 강요하는 건 좋지 않으니 그냥 말해 봤어요. 집에 케이블티비를 놓는 걸 한번쯤 더 생각해 보시라고요. 삼촌은 고개를 끄덕였어요.



 6.조금 전 돈까스 가게를 나올 때 아마도...회사 점심 시간에 나온 듯한 한 무리의 여자들이 앞에 있었는데 맨 뒤에 있는 여자가 내가 나갈 수 있게 문을 잡고 서있었어요. 


 뭐 나는 그래요. 전에 어떤 남자도 다른 남자의 뚜쟁이 짓을 할 필요가 없다...라고 썼듯이 어떤 누군가가 내게 도어맨 노릇을 해주는 것도 싫어하죠. 물론 내가 하는 것도 싫고요. 누군가는 '그게 뭔 도어맨 노릇이야. 그냥 매너지.'라고 하겠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과 나를 철저히 격리하는 편이예요. 대부분의 타인과의 관계는 상대가 판매자, 내가 구매자 노릇을 하는 것에서 멈춰야만 한다고 생각하죠. 그 이상이 되면 매우 짜증나니까요. 그래서 누군가가, 내가 편하게 지나갈 수 있게 문을 잡고 있어주면 그냥 걸음을 멈추고 그가 갈 때까지 기다려요.


 하지만 뭐...갑자기 특별 서비스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고맙다고 말하며 목례했어요. 그렇게 해 보니 앞으로도 종종 그렇게 해 줘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7.이전에 썼었죠. 여기서 신세가 더 나아지면 나는 재수없는 놈이 될거고 만약 신세가 안좋게 되면 끔찍한 놈이 될거라고요. 어느 쪽이든 빌런이긴 하죠. 어쨌든...내게 있어서는 신세가 나아지는 게 좋겠지만 세상에 있어서는 내 신세가 이쯤에서 고정되는 게 그들에게 좋은 일일 거라고 썼었죠. 재수없지도 않고 끔찍하지도 않은...완벽하게 무해한 사람으로 사는 거니까요.

 이건 내 고찰일 뿐이지만, 남자는 처지에 따라 3가지 감정을 가지게 되거든요. 처지가 존나 안 좋을 때는 분노에 휩싸여 살고, 적당히 괜찮은 처지가 마련되면 자신감을 가지고 살게 돼요. 여기까지는 좋은 거죠. 한데 처지가 너무나...압도적으로 나아져 버리면 자신감은 교만함으로 변질되어 버리고 말아요. 처지가 나쁘기 때문에 괴물이 되는 게 아니라 처지가 너무 좋기 때문에 괴물이 되는 거죠.

 아니 뭐, 그게 결정나는 건 약간 미래의 얘기고...어쨌든 그래요. 사실 저 정도로 극적인 신세의 변화를 겪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요. 기껏 잘해봐야 한 단계 정도의 변화를 겪죠. 그것조차도 어려운 일이고요. 분노에서 교만함까지, 최하층에서 최상층까지 올라가는 놈들은 별로 없어요. 

 이 게시판에서 몇 번 강용석에 대해 꽤나 좋게 썼었죠. 강용석이 비록...종종 쓰레기같은 짓거리를 하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긍정적인 감정들과는 달리 부정적인 감정들은 사라진 후에도 잔해가 남는다고요. 그리고 분노를 겪으며 살아야 했던 남자는 분노를 겪을 필요가 없게 된 후에도 종종 분노의 잔해에 시달리곤 하죠. 강용석에게서도 종종 분노가 그를 할퀴어놓은 흔적이 눈에 띄는 것 같아서 강용석에 대해선 다른 보수파 인간들보다 좀 너그러운 기준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요. 만약 귀족이 되고 얼마간의 영지와 얼마간의 하인을 가지게 된다고 하더라도...분노의 잔해를 없애야만 진정으로 성공하는 거라고 믿고 있어요. 왜냐면 분노보다도 분노의 잔해가 더 상대하기 까다롭거든요. 그것은 오래 전에 멈춰버린...멈춰버려야만 했던 오르골이 멋대로 재생되는 것과도 같으니까요. 

 시끄러운 오르골이 실제로 있다면, 그 오르골을 박살내버리면 되겠죠. 하지만 그 오르골은 이제 없거든요. 오르골은 없는데 오르골의 소리만이 들려오고 있다면, 그게 더 상대하기 까다롭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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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말하는 오늘은 어제 금요일이예요. 어제 쓰다가 자버려서 그냥 이어서 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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