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결이 다른 비혼 이야기

2018.11.23 17:36

isbl89 조회 수:1720

제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건 31살쯤입니다. 30살쯤에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신 후 그렇게 되었어요. 그전에 7년 정도 만난, 다들 결혼할 줄 알던 남자친구도 있었지만 어머니 간병 기간 중에 헤어졌습니다. 처음 어머니가 암 선고를 받고 1차 관해에 이르기까지 수개월간 남자친구는 전혀 의지가 되지 못했습니다. 제가 주말마다 병원에서 지내는 걸 짜증스럽게 여기기까지 하더군요. 


암병동에서 지내는 동안 여러 가족들을 봤습니다. 과연 가족이란 뭔가 싶었어요. 아버지가 보여준 태도도 가족에 대한 제 믿음을 깨버렸죠. 죽을 때까지 서로를 보살피겠다는 결혼 서약은 언젠가는 다가올 죽음의 무게는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냥 젊은 혈기에 내지르는 무지의 약속 같더군요. 상대방이 그 약속을 이행하길 기대하기 어려운 만큼, 저 또한 그 약속을 지킬 만큼 헌신적인 사람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구요.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죽음은 더더욱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이제 뭘 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되죠. 내가 죽거나 내 가족이 죽거나겠죠. 내가 먼저 죽지 않는 한 저는 아버지와 동생, 적어도 두 명의 가족이 죽는 것을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나아요. 그리고 여기서 가족의 수를 더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어차피 내가 지켜볼 죽음이 늘어나거나, 혹은 내가 죽는 걸 슬퍼할 사람이 늘어난다는 거니까요.


평균 수명이 40살이던 시절에 결혼의 의미는 좀 달랐을 거에요. 죽음은 정말로 가깝게 있고 가족 공동체는 이 죽음에 대항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단위였겠죠. 그들은 혼인에 서약하면서 죽음도 함께 겪는다는 걸 지금의 우리보단 좀 더 실감하며 받아들였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결혼에 그런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걸 안 이상, 더더욱 결혼을 할 수 없겠다는 마음을 먹었어요. 제 경우엔 누군가 함께해준다고 고통이 경감되는 종류의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가족들조차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고 각자가 각자의 고통에서 해맬 수밖에 없었어요. 


저는 결혼이 엄청나게 복잡하고 군더더기 많은, 사치스러운 제도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구요. 유전적 이해관계가 없는 두 사람이 경제공동체로 묶이는 거니까요. 회사가 3천만원 연봉의 직원 하나 뽑을 때도 그렇게 오랜 시간 재고 다듬는데, 두 사람(혹은 두 집안)이 재산을 합치는 건 얼마나 까다롭겠어요. 이걸 왜 하나 싶은 관례나 예습들도 과연 그/그녀를 우리 집안에 들이기 적합한 건지 시험해보는 테스트의 일부입니다. 이런 과정에서도 도저히 합의를 못 볼 정도의 두 사람이 향후 수십 년을 어떻게 함께하겠나요. 물론 저는 이런 것들 하나도 감당할 자신이 없으니 결혼도 안 하겠다는 사람이지만요.


혼자 살기로 한 후엔 혼자 살아도 충분할 만큼의 경제력을 확보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타인에게 크게 의지하지 않는 성격이라 아직 외로울 겨를은 없어요. 

아이가 없는 건 (지금은 전혀 모르겠지만) 언젠가 아쉬울 수도 있겠죠. 예전에 잠깐 고양이 한마리를 한 달 정도 보호한 적이 있는데, 아이를 키우는 게 이렇겠구나 생각은 한 적 있어요. 하지만 전 그때도 이 고양이도 나보다 먼저 죽겠지 하는 생각에 때때로 가슴이 애이더군요. 


공동체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결혼은 여전히 좋은 선택일 겁니다. 전 분명 그런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그래도 저 같은 사람이 드물진 않을 것 같아요. 소설책보면 가끔 "혈육이 없는 고모할머니가 내게 유산을 남겨줬어."라는 얘기 나오잖아요. 저도 아마 그런 고모할머니가 되지 않을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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