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

2019.05.11 18:40

어디로갈까 조회 수:1365

1.  아침에 아파트를 나서는데 현관 앞에 낯선 청년이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습니다. 인생의 목표를 완전히 상실했다는 듯, 말할 수 없이 시들하고 지루한 표정을 하고 있더군요. 들어올 때도 그는 아침의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근데 저와 시선이 부딪치자 그의 권태에 반짝 불이 켜지더니 "현관 비밀번호 아시죠?"라는 질문이 건너왔어요. 그제야 그가 다음 주부터 자동시스템으로 전환되는 현관문의 비밀번호 방식을 가르쳐 주기 위해 '앉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죠.
낮엔 봉은사 근처를 지나다가, 팔리지도 않는 시든 꽃들을 놓고 앉아 있는 아주머니들을 봤습니다. (내일이 석가탄신일인 걸 그래서 알게 됐어요.)  그 거리는 보행자보다 쌩쌩 질주하는 차들이 많은 곳인데 도로 한 켠에 종일 오색 꽃을 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일이라니. 

저 역시 그렇게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브리핑을 끝낸 후 동료들이 소감을 한마디씩 던지며  회의실을 빠져나갈 때면, 제가 꼭 단독의 좁디좁은 직무에 갇힌 '지니'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요. 이건 현관에 앉아 있던 청년이나, 오색 꽃 아줌마의 예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2.  저만의 개념어 사전에 있는 단어를 또 하나 소개하자면 'Angestellter'가 있습니다. 안게슈텔터: 직원, 피고용인의 의미로 직역하자면 '앉아 있는 사람'이에요.
이 단어는 힘든 환경에서 단순한 경제활동을 하는 이들만을 일컫는 건 아니에요. 조직속에서 기능적 필요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안게슈텔터'입니다. 즉 어떤 기능을 충족하도록 투입된 부품들인 존재죠.
내적 필연성과 순전한 자발성에 의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닌 모든 상황들 속에서, 기실 우리는 '앉아 있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자율적, 자발적인 행동을 하는 입장이 아닌 한 누구나 '안게슈텔터'인 것입니다. 저 역시 안게슈텔터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지만, 유난히 파편화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짙은 연민이 엄습해와서 난감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해요.

무엇이 사람을 자율적, 자발적이게 할 수 있을까요? 한없이 자유로운 아이들을 보면 그 답을 알 것 같기도 합니다. 바로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미지의 체험 자체에 대한 이끌림에 의해 행동하는 아이들이죠.
아이들이 이끌리는 건 미지의 체험이 유희가 되는 상황들이에요. 그들이 유희를 통해 만족을 얻는 커다란 체험은 자신에 대한 새로운 자각입니다. 인생의 '안게슈텔터'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이들의 그런 면을 숙고하고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아이들에게서 배우는 일은 '앉아 있'는 일보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_-


3.  언젠가 제주도에 갔을 때,  <만장동굴> 안의 가장 깊은 장소에 책상을 차려놓고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주는 알바가 있었어요. 아직 뺨에 솜털이 보송송한 젊은 여성이었죠. 관광객들은 그녀에게 사진을 찍고, 사진을 받아들자말자 곧 1 km 남짓의 어둠을 걸어 동굴 밖 환한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해질 무렵까지 종일 그곳에 남아 있어야 하는 거죠. 그녀는 제가 만나 본 안게슈텔터 중에서 가장 큰 냉기와 어둠에 휩싸여 있던 사람이어서 아직도 기억 깊이 남아 있습니다.


4.  이런 안게슈텔터와 정반대의 자세를 보여주던 '앉아 있는 사람' 한 분이 생각나네요. 법정 스님. 
입적 하신 후, 그분을 가까이서 바라보고 말씀을 듣는 내용으로 꾸며진 다큐를 방송한 적이 있었습니다. 방영 당시에는 그다지 볼 마음이 들지 않았기에 아버지가 녹화해두신 걸 어느 밤에야 문득 보게 됐어요. 겨울이었고, 눈 속에 절이 있었고, 스님이 앉아 있었고, '간결하게 살라'는 스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산을 향해 마루에 정좌하고 있던 스님의 모습. 멀리 너머엔 푸른 기운을 감춘 흰 산이 솟아 있었는데, 카메라가 지정해 주는 대로 저도 스님의 시선을 따라 그 정경을 오래, 가만히 바라보았어요.

제가 본 것은 그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군요. '我相' (불교에서, 자아를 실체로 보고 고집하는 생각)은 어떠하든, 단정한 앉음새는 언제나 제 마음을 끌어요. 그것 하나면 티끌 만한 부족함도 없이 충분하다는 느낌이 제 마음의 기저에 있습니다.
마음인가, 몸인가? 라는 선문답이 있죠. 마음을 바로 갖추면 몸이 따라오는가, 몸을 바로 갖추면 마음이 따라오는가? 저 같은 사람이 그 답을 알리 없지만, '바로 앉음'에 관해서는 그 육체성과 상징성을 아울러 저는 꽤 오랜 동경을 가지고 있어요.

한 시절, 저는 벚꽃 그늘 아래 무연히 앉아 있을 수 있는 존재이기를 환영처럼 원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해 봄을 지나면서부터 벚꽃들은 감각에서 사라져버렸고, 이제 저는 그 사실을 별로 아쉬워하지 않는 사람이 돼 있군요. 다만 이젠 '바로 앉기'만이 절실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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