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의 이야기...(안내자)

2017.04.26 20:07

여은성 조회 수:599


 #.한동안은 관성적으로 캬바쿠라에 가곤 했어요. 뭔가 재미가 있어서 가는 게 아니라 그냥 관성으로 간 거죠.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곳에 '그저 존재하고 있는'상태인 거죠. 가서 놀지도, 심지어는 말을 하지도 않곤 하니까요.


 하지만 죽기도 전에 죽어있어서야 영 재미가 없잖아요? 인생이 재미없다면 두가지 중 하나는 해야 해요. 새로운 게임을 찾던가, 아니면 새로운 방법으로 게임을 플레이하던가죠. 그리고 현실 온라인을 플레이하는 내겐 새로운 게임을 찾는 선택지 같은 건 없으니까 결국 플레이 방법을 바꾸는 것만이 답이예요.


 웨스트월드의 캐릭터 중 '검은 모자'라는 녀석이 있어요. 검은 모자 녀석은 너무 오래 게임을 플레이해서 더 이상 웨스트월드 안에서 할 게 없어진 녀석이예요. 그래서 새로운 방법으로 게임을 즐겨 보겠다는 이유로 npc들의 머리가죽을 벗기고 다니죠. 하지만 웨스트월드보다는 현실이 다른 방법으로 플레이해 볼 여지가 많은 게임이예요. 그래서 이 게임을 다른 방법으로 플레이해보곤 하죠. 이건 검은 모자 녀석과 비슷한 거예요. 검은 모자 녀석은 웨스트월드에 숨겨져 있는 미로를 풀려고 하거든요. 나 또한 현실이라는 미궁의 못 가본 다른 길을 찾아내려고 하고 있고요. 


 다른 길은 꼭 물리적으로 못 가본 길이나 새로운 사람을 말하는 건 아니예요. 아직 보지 못한 새로운 단면일 수도 있죠. 


 다만 현실의 미궁에서는 늘 안내자가 필요해요. 미로의 가보지 못한 길을 안내해주는 녀석 말이죠. 현실같이 복잡한 게임에서는 안내자 없이 혼자서 숨겨진 길을 찾아낼 수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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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틱톡 서비스가 정지되어서 대안을 찾던 중 네이버 라인이라는 걸 하게 됐어요. 전에 썼듯이 이런 메신저들은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거나 카톡에 추가하기는 싫은 인간을 넣어두는 곳이죠.


 '전화번호도 카톡도 가르쳐주기 싫은 인간이라면 애초에 왜 만나는 거지?'라고 물어볼 수도 있겠네요. 왜긴요. 재밌잖아요. 복어는 위험한 음식이지만 위험함을 감수하고 먹는 것과 같은 거죠. 



 2.어떤 작자들은 이렇게 말해요. 한국 남자들의 처지에 대해 말할 시간이 있으면 화류계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처지를 생각해 보라고요.


 이건 약간 이상한 말로 들려요. 왜냐면 애초에 화류계에서 아무나 일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물론 내가 안 가본 화류계의 처지까지는 알 수가 없으니 내가 본 캬바쿠라에 대해서만 말해 보자면요. 캬바쿠라에서 일하는 예쁜 직원은 마음만 먹으면 예쁜 편의점 알바가 됐을 수도 있고 예쁜 치킨배달부가 됐을 수도 있고 예쁜 경리가 됐을 수도 있고 예쁜 소방관이 됐을 수도 있고 예쁜 플로리스트가 됐을 수도 있어요. 캬바쿠라에서 일한다는 건 바꿔말하면 일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는 거니까요. 그저 가능한 옵션을 하나 더 달고 태어난 것 뿐이고 거기서 화류계를 선택한 것 뿐이죠. 그들에게 있어서 좀더 나은 처지라고 여겨지는 것을 택한 것...그게 다예요. 


 물론 얼굴만 믿고 면접에 붙어도 태도가 안 좋으면 금방 잘려요. 그러니까 거기서 계속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최소한의 성실함이 있다는 거예요.



 3.그야 그 성실함을 칭찬하려는 건 아니예요. 나는 성실한 게 장점이라고 여기지도 않고, 어떻게 관찰해도 고급 바에서 일하는 건 같은 월급을 받는 다른 직종보다 훨씬 쉬우니까요. 방점은 '성실함'이 아니라 '최소한'에 찍혀 있어요. 


 최소한의 최소한...나와 접점은 있으면서 정말 게으른 사람, 감사할 줄을 모르고 불만이 많은 사람을 찾아내는 게 이 게임의 시작 단계죠.


 그렇게 잘 찾아보면 가게마다 유난히 태도가 안 좋고 게으른 직원이 한 명 정도씩 있곤 해요. 그들은 일을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직원들도 잘 섞이지도 못하죠. 바로 그런 직원들을 굳이 찍어서 술을 마시곤 해요. 그야 그런 직원을 지명해서 술을 마시면 프로페셔널하게 일하는 다른 직원들이 이상해하죠. 저렇게 기본 자세도 안 되어 있고 말상대할 교양이나 지식도 없고 그냥 대충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시간만 잘 때우려는 애에게 왜 돈을 쓰냐고 말이죠.


 하지만 이런 자들이 바로 안내자거든요. 새로운 인간들을 사귀는 연결 통로가 되는 거예요. 내가 일상에서는 도저히 찾아낼 수 없을 녀석들이요.


 왜냐면 이렇게 편한 일을 하는데도 제대로 못 해내고 불만이 많은 사람이라면? 2차도 안 나가고 가벼운 터치 시도도 사장이나 실장이 다 막아 주고 그냥 술만 따르면 되는 일을 하며 수백만원씩 받아가는데도 불만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주위에 있을 수많은 친구들 중에는 훨씬 더한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거든요. 최소한의 성실함도 가지지 않고 살아가는, 보통의 일상생활에서는 인카운트될 수 없을 정도의 마이너스인 사람이 말이죠. 



 4.휴.



 5.너무 넘겨짚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간단한 수학이예요. 예쁘고 활동적인 사람이라면 주위에 친구가 많을 거라는 건 일단 당연해요. 친구의 표본이 많을수록 스펙트럼은 넓게 분포될 거고요. 플러스의 경우도 있을 거고 마이너스의 경우도 있겠죠. 


 그럼 일단 그 직원과 친해지고, 그 직원의 인간관계를 털어봐요. 그리고 괜찮은 친구 목록을 가진 직원을 안내자로 삼는 거죠. 안내자의 소개를 받아 일사천리로 그 직원의 친구들 중 마이너스에 수렴하는 인간들과도 친해지는 거예요. 나의 네이버 라인 목록에 들어갈 인간들 말이죠. 


 누군가는 '그럼 플러스의 인간은 사귀지 않는건가? 플러스인 인간이 더 좋은 인간 아닌가?'라고 할 수도 있겠죠. 흠...



 6.하지만 좋고 나쁨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거니까요. 인간의 인격이 아니라 기능을 보고 만난다면 마이너스의 인간들이 훨씬 좋은 사람들이거든요. 왜냐면 친해지는 속도가 빠르든 느리든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플러스인 사람과는 '친해지는 기간'이 필요하니까요. 그게 1년이든, 한 달이든, 일주일이든간에 최소한의 기간은 필요한 거예요. 


 사실 캬바쿠라에서도 플러스인 직원들은 그래요. 자기자신을 위해 살고 똑바로 현실을 마주하며 살고 있어요. 플러스의 직원들은 저금도 하고 있고 낮에 일하는 직업을 가진 남자친구도 사귀고 있어요. 누군가가, 또는 무언가가 자신을 파먹도록 절대 놔두질 않죠. 그야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이런 플러스인 사람들과 한편이 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러나...이 지나치게 발전한 메가로폴리스에서는 플러스인 사람들과 친해져봐야 별로 이득이 될 일이 없다는 게 문제예요. 왜냐면 플러스인 일...생산성이 필요한 일을 할 때는 나 혼자 하는 게 제일 낫거든요. 계획을 세우는 일, 계획을 실행하는 일, 계획이 잘 흘러가는지 감독하는 일 모두 나 혼자 하는 게 마음이 편해요. 생산물이 많은 날은 혼자 독점하고 생산물이 별로 없는 날은 혼자 감수하는 부분까지도요. 누군가의 발목을 잡는 것도 누군가에게 발목을 잡히는 것도 싫거든요.


 그리고 이 메가로폴리스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두가지뿐이예요. 생산물(경제재)를 모으거나 아니면 방출하거나. 둘 중 하나의 일을 하는 거죠. 경제재를 모으는 단계까지는 혼자여도 괜찮아요. 



 7.문제는 경제재를 방출하는 일을 할 때죠. 혼자서 경제재를 방출해봐야 외롭거든요. '외롭다는 말을 쓰다니 너무 약한 면을 노출하는 거 아닌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예요. 외로움은 인간 모두의 약점이지 나만의 약점은 아니니까요. 어쨌든 경제재를 방출...즉 돈을 쓸 때는 마이너스의 사람들을 모아서 하는 게 좋은 편이예요.


 왜냐면 플러스인 사람들은 그렇거든요. 간신히 모아 놨는데 '내일'이라는 말만 하는 거예요. 뭐만 하면 내일, 내일, 내일, 내일, 내일...! 내일이라는 말이요. 이 순간엔 관심이 없다는 듯이요. 그들은 내일 걱정 때문에 이걸 할 수 없고 내일 걱정 때문에 저걸 할 수 없다고 말해요. 


 뭐 이해해요. 플러스인 사람들은 '내일'이란 걸 신주단지 모시듯이 한다는 거요. 아무래도 이젠...플러스인 사람들을 점점 덜 만나게 될 것 같아요. 그들과 일을 하지도, 놀지도 않게 된 거니까요. 그들과는 더이상 할 것이 없게 된 거죠. 


 물론 이걸 뒤집어서 말하면 나도 플러스인 사람들에게 쓸모가 없어진 거고요. 서로 쓸모없어진 거겠죠.



 8.원래는 마이너스의 인간들에 대한 일화였는데...이제 막 일화를 쓰려고 하니 글이 너무 기네요. 만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잡담글이 되어버렸어요. 이야기 시리즈가 아니라.


 요즘은 다시 혼자 다니는 편이지만 그간 만난 몇몇 사람의 일화는 인상에 남아서 일기에 써보고 싶었어요. 다음에 원래 쓰려던 걸 써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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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기를 마치려다가 보니...생산성이나 생산물이라는 용어는 잘못 쓰여진 것 같네요. 나는 실제로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니까요. 생산물보다는 수확물이라는 표현이 옳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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