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08 22:48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봤다는 친구가 2시간 내내 울렁거려서 영화를 보면서 배멀미를 했다고 해서
저는 그 때 DVD를 빌려서 봤는데요. '좀 울렁거리기는 해도 멀미할 정도는 아니던데?' 라고 생각했죠. 그 친구는 극장의 큰 화면에서 보면 다르다고 우겼습니다.
그게 15년전입니다. 그 때는, 영화를 보면서 정말 멀미를 할까 거기에 온통 집중해서 보는 바람에 큰 스토리 흐름 외에 다른 건 별로 기억나지 않아요.
어부들이 돈 벌기위해 낚시하러 나갔다가 재수없게 최악의 폭풍을 만나 다 죽는 이야기죠.
그런데 15년후에 다시 보니, 어맛, 그 때는 알아채지 못한 것들이 보이는 겁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건, 영화의 남자 캐릭터들의 병맛 수준 판단력이예요.
특히 사이드로 나오는 요트 미스트랄호의 선장은 정말 고구마 민폐 캐릭터였어요. 옆에 있었으면 한 대 때려 기절시키고 배 돌려서 가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특히 배가 360도 회전해서 죽다 살아났는데도 항해를 하다 보면 원래 그런 거라는 둥, 이건 내 배니까 구조요청을 할 건지 결정은 내가 한다는 둥 끝까지 모두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멍청한 고집을 부립니다. 전형적 민폐에 맨스플레인.
이 인물을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주인공 안드레아 게일호의 선장도 약간 비슷했기 때문이예요.
그의 친구이자 한나 보든호의 선장인 린다가 경고를 하는데도 무시하고 폭풍속으로 돌진을 하죠.
사투를 벌이다 결국 돌아가자고 계획을 변경하지만 너무 늦게 결정을 내리는 바람에 모두들 파멸하는 영화죠.
저는 이 부분에서도 빌리가 무리한 항로로 밀어붙인 계기가 린다와 교신을 하면서 자기는 고기를 하나도 못 잡았는데 린다는 좀 건졌다고 하는 장면에서 묘한 질투심 같은게 그를 자극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기다가 하필이면 자기보다 운도 좋고 실력도 좋은 사람이 여자란 말이죠. 물론 빌리는 린다를 좋아하고 그들은 좋은 친구사이이지만, 만약 린다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무리하게 밀어붙였을까요? 영화는 빌리에게 그렇게까지 해야하는 당위성을 만들어주려고 했던 게 아닐까요?
뭐야, 이거 남혐영화인가? 라고 잠깐 생각했지만
2000년에 그런 영화를 만들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또 아니라고 하기에는 왜 미스트랄호 선장도 저 따위냔 말이죠.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건 여자들밖에 없어요. 미스트랄호의 선장도 여자들이 '더는 못 참아 구조요청을 해야돼'라고 하는 바람에 목숨을 건졌어요.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구조요청을 못하게 하려고 고함을 질러대는데 저는 정말 무전기 작동하는 여자를 뒤에서 때릴 거라고까지 생각했다니까요.
안드레아 게일호를 구조해달라고 요청 한 것도 린다였죠. 정작 그 배의 선장은 무전도 끊어버리고 근자감에 쩔어서 폭풍속으로 돌진하고.
그게 아무리 2000년의 영화를 2000년대의 시각으로 보려고 해도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영화가 의도하지 않았을 이상한 것들이 자꾸 눈에 들어와요. 뭐지? 이 어부들의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인가? 자연에 목숨으로 맞서는 진짜 사나이? 듀나씨는 여자들을 항상 그런 전형적이고 평면적인 캐릭터에 가둬버리는 한국 영화들을 줄곧 비판해왔는데 제 눈에는 이 영화가 그 반대의 경우로 보였어요. 남자들을 저렇게 멍청하고 고집스럽고 잘못된 판단만 내리는 인물들로 묘사해놨잖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영화는, 그들의 투쟁, 그들의 사랑과 운명, 그리고 직업정신 (바다 사나이들이니 바다에서 죽는다)을 조명하는 드라마가 됩니다.
물론 이들이 어부라는 것에 어느정도 캐릭터의 전형성이 부여된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그렇게 극단적으로까지 할 이유까진 사실 잘 모르겠어요. 주인공들중에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은데요. 빌리가 모두가 반대하는 출항을 그렇게 밀어붙인 이유로 선주의 압력인 듯한 장면이 잠깐 등장하지만 그야말로 잠깐이고 영화내내 크게 부각되지 않아서 설득력이 약해요. 모든 건 빌리의 욕심처럼 보이거든요.
그 와중에 높은 파도로 인해 선실에 물이 차는 걸 막기 위해 입구를 철판으로 막아서 잠그었던 것이 배가 전복했을 때 오히려 트랩이 되고 말죠. 조타실이 아닌 곳에 있던 어부들은 그대로 익사하고 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퇴로는 확보해두어야 한다는 교훈을 준 이야기였습니다. (영화와 같은 그 정도의 폭풍속에서는 퇴로가 있건 없건 크게 의미가 없겠습니다만)
아마도 이건 2000년 영화를 2018년에 봤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세월호 이전과 이후의 이런 영화는 또 달리 보일수 밖에 없겠죠. 아무리 어부들의 생사를 건 사투와 드라마를 얘기한다고 해도 사람이 바다에서 물에 빠져 죽어가는 걸 그냥 재미로 볼 수는 없게 되었어요. 왜 저런 멍청한 판단을 내려서 아까운 목숨을 잃게 만드느냐고 영화보는 내내 욕이나 해댈뿐이죠.
2018.05.08 22:59
2018.05.09 00:18
따지고 보면 좀 이상하고 극단적인 방향으로 빠지는 마초영화죠.
영화 전체 톤으로 보면 상업 영화였는데, 장렬한 결말(?)에 대한 욕심이 있었는지.. 끝나고 여운보다는 그냥 좀 뻥진 상태로 나오긴 했어요ㅎ
클루니 팬이라 굳이 영화관 찾아가서 보긴 했는데,
플롯과는 별개로 볼프강 페터젠 답게 스펙터클한 부분은 볼만하긴 했죠. 특히 마지막에 나온 파도 장면은 그 당시 스크린으로 봐도 쫄밋하긴 했어서, 아이맥스로 보면 어떨까 궁금해지긴 하네요.
2018.05.09 03:01
선장들이 괜한 고집이나 잘못된 판단을 내려서 위기에 빠지거나 말아먹거나 하는 해양 이야기들을 종종 보는 것 같아요. 실화이든 픽션이든.
2018.05.09 13:10
이런 영화의 목적은 거대한 폭풍을 화면에 실감나게 구현하는 것이죠.
인물 설정이나 사건의 개연성은 스펙터클한 화면을 보여주기 위한 부수적인 구실에 불과하고, 그만큼 허술할 수 밖에 없죠.
2000년 전후해서 이런류의 재난영화가 유행을 탄 적이 있었습니다.
1996년에 트위스터가 성공하면서, 1997년 타이타닉, 단테스 피크, 볼케이노, 1998년 딥임펙트, 아마겟돈, 2000년 퍼펙트 스톰 등이 잇달아 개봉했죠.
지금처럼 CG로 모든것을 해결할 수 있는 시절 이전에, 아날로그식 특수효과와 막 발전하기 시작하는 디지털 특수효과가 결합하면서 기술적 발전 자체에 흥분하던 시기였습니다.
특수효과의 발전으로 사실적인 묘사가 가능해지면서 재난장면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볼거리가 된다는 걸 깨달았고, 97년 타이타닉의 초대박이 기름을 부었으며, 밀레니엄 전후의 분위기가 부채질을 한 측면도 있죠.
2000년작 영화는 1997년작 동명 소설을 영화화 한거고, 1997년작 소설은 1991년 폭풍으로 인해 실종된 실제 사고를 소재로 했다고 하네요. 생존자가 없으니 실제 사고가 어땠는지는 정확히 알 턱이 없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