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링고님 글 읽다가 신경숙 소설 사셨다길래 문득 생각난 게 있어서 글을 써요.

저는 2주 뒤 졸업인 국문과예요. 과에서 현대문학을 다룰 때 '90년대 여성문학' 대충 이런 주제로 은희경, 신경숙을 짚고 가곤 해요. 서브로 권지예,

서하진 뭐 이런 별로 안 유명한 작가들도 포함해서. 이렇게 묶어서 다루는 소설은 1인칭 여화자가 초 감성적인 말들을 나긋하게 읊조리는데 불륜

내용이 참 많죠. 싸잡아서 미안하지만 아무튼-.-;;

신경숙의「풍금이 있던 자리」라는 소설은 그런 경향의 소설을 대표하는 특징을 죄다 갖고 있다고 할까. 그래서 현대소설 다루는 커리큘럼에

셋에 한번 정도는 꼭 들어가요. 전혀 잘 쓴 소설은 아닌데, 지금 읽어보면 '사람이 이렇게 촉촉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청승맞고 애잔해서

오히려 팔자눈썹을 하고 웃으며 읽을 수 있어요. 2000년대 들어 신경숙은 풍금때보다는 많이 세련돼졌지만 여전히 특유의 촉촉하고 나긋한 정서가

작품 전반에 깔려 있어서 『리진』을 끝으로 체크를 그만뒀어요.  원래도 잘 나가는 작가였지만, 『엄마를 부탁해』이후로는 완전 폭발적이네요. 

흠, 공...공지영스럽( ..)? 이런 생각도 들지만 뭐. 안 읽었으니 말은 아끼고요. 

 

 

지난 학기에 제 동기가 저는 이미 2년 전에 들었던 '현대소설론'이라는 과목을 수강했어요. 교수님께서 기말 과제로 '커리큘럼 안에 있는 작가의

소설 중 하나를 패러디해 오라'고 했대요. 이 아이가 선택한 게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였죠. 완성하고 나서 제게 보여줬는데 폭소했습니다.

사실 이걸 공유하고 싶어서 글 쓴 거예요<-

 

 

 

 

현대소설론

학점이 있던 자리

-신경숙 소설 패러디

 

 

 

 

 

학교로 들어오는 길은, 막 봄이와서,

여기저기 참 아름다웠습니다. 평화의 전당은 빛나고.....빛나는 사이로 내 등록금이...그 사이...또 올랐...더군요......등록금을 머금고 올라선 평화의 전당이....환하디...환했습니다.

그런 경치를 자주 보게 돼서 기분이 좋아져다가도 곧 처연해지곤 했어요. 등록금고지서를 보면 늘 슬프다고 하시더니 당신의 그 기운이 제게 뻗쳤던가 봅니다.

저, 저만큼, 문과대가 보이는데

저는, 강의실로 바로 들어가질 못하고, 송두리째 텅 빈 것 같은 문과대를 한바퀴 돌고도.......또 들어가질 못하고......

학교를 복학할때는 당신께 이런 메일을 쓰려고 온 것이 분명 아니었습니다. 이런 메일을 쓰려고 오다니요? 저는 당신의 수업 맨 앞자리에 앉지 않았습니까.

 

다음주에 기말고사 봅니다.

 

당신이 기말고사에 대한 결정을 내려 주었을 때, 저는 너무나 갑작스러워 꿈인가?....꿈이겠지, 어떻게 그런 일이 내게....다름도 아닌 기말고사가.....꿈일 테지, 했어요.

 

테리 이글턴 책 전권을 범위로 합니다.

 

제가 꿈인가? 헤매는데 당신은 테리 이글턴을 말하셨죠. 당신을 처음 알던 5년 전 그 수업때도 지금처럼 무너져만 내리던 제게, 어떻게 그런 시련이, 수업을 마치고도 암만 꿈만 같아서, 동기들에게 확인을 받고 또 확인을 하다가 결국은 또 눈물...........이,

 

이 학교를 복학할 때는 당신께 이런 글을 쓰려고 온 것이 분명 아니었습니다. 이런 편지를 드리려 하다니요?

복학하여 처음으로 한 일은 시간표를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5년전 새내기때, 처음 이 학교를 왔을때 시간표를 확인조차 하지 않아 저는 낭패를 많이 당하였지요. 그 이후로 학교를 오거나 새학기가 시작되면 저는 시간표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런게 불쑥 제 속에서 누군가 묻는 것이었어요. 너는 왜 수업도 제대로 안 들으면서 시간표를 확인하는거지? 저는 그 질문에 답변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시간표를 확인하는 행위로 조금의 죄책감을 면하려고 했던 걸까요? 시간표를 확인하면 그래도 수업을 좀 들을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랬을까요? 글쎄, 그런 단순히 이루어진 습관이었을까요?

그날, 오랜만에 개강이라고 술을 퍼마시다 가방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가방 속 프린트와 교재는 당신이 주신 것이었지요. 시작부터 불길함을 나타낸 그 교재. 테리 이글턴.

제 마음속에 일어난 이 파문을 당신께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과연 설명이 가능한 파문인지조차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께 어떻게든 제 마음을 전해 드려야지요.

지금 제 마음은 어쩌면 당신께 이해를 받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령 그렇더라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하는 것임을, 그것이 당신에 대한 제 할 일임을 괴롭게 깨닫습니다. 제 표현이 모자라서 이 편지를 다 읽으시고도 변동사항이 없다면.....그러면 또 어떡해야 하나........

학점은....학점은, 늘.......늘 받았지만, D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어찌된 셈인지 제게는 그 학점이 제 심연의 물을 퍼주고야 얻은 값이란 것을, 아니에요, 이런 소릴 하는 게 아니지요. 다만, 어떻게 하더라도 제게 어찌할 수 없는 아픔이 남는다는 걸 알아주시....아니에요, 아닙니다.

그 분.....그 분 애길 당신에게 해야겠어요.

새내기 때 였을까, 아니면 2학년? 저는 빈 강의실에 앉아 새로운 교수님의 이름을 확인하며 수업시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김준기 교수님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교수님이 앞문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그분의 온화한 인상에 펜을 툭, 떨어뜨렸습니다. 그때까지 그런 인상의 교수님을 뵌 적이 없었어요. 국문과를 단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저는, 손에 소주잔을 든 교수님, 입에 소주를 머금은 교수님, 몸에 소주냄새가 밴 교수님, 종강파티를 새벽 내내 소주로 달리시던 교수님, 답사 때 파도타기 열 번을 시키시던 교수님.....이렇게 술과 일체가 된 교수님들만 보아왔던 것이니, 그 온화한 인상과 무알콜의 모습에 눈이 둥그렇게 되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가 국문학개론 교실 맞나?

교수님께서 제게 물었어요. 어느새 교수님은 출석부를 펼치시고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셨죠. 학생들은 모두 교수님에게 집중하여 잠자코 수업을 들었습니다. 저 역시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설화가 무엇인지, 구비문학이 무엇인지를 배웠지요.

잠시 나갔다 와야겠습니다. 학회실에서 동기가 부르네요.

 

방금 학회실을 다녀왔습니다. 봄인데도 봄내음보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그곳을 다녀왔습니다. 퀴퀴한 냄새와 함께 보인 동기와 선배들, 그리고 후배들........저는 또 한 번 가슴이 철렁했어요. 기....억은, 이상한 것이에요. 칠흙 같은 무명에 휩싸여있던 것들이 어떻게 해서 한순간 그렇게도 투명하게 비춰지는지.

제 기억 속 학회실 안의 선배들은 눈물대신 소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1학년 때부터 학회실을 들락거렸습니다. 그때, 한 예비역 오빠가 소주를 나발불며 울부짖었어요.

시험도 안끝난 사람이 이게 무슨 짓이여!

다른 선배들이 한사코 말렸지만 예비역 오빠는 병나발 불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른 선배들이 모여 앉아 하는 얘기로는 그 오빠가 세 번째 학고를 받을 위기라는 것이었습니다. 병나발을 불던 오빠는 이번 학기도 날려먹어 울면서 소주를 마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불투명 초록빛으로 빛나던 그 술.

지금 당신이 있는 교수 연구실, 또 다른 선배가 그곳을 찾아갔었죠. 당신께 말씀드렸나요? 학기말 종강 때 연구실을 찾아가 폭삭 무너지며 무릎을 꿇었다는 그 선배를요. 교수님께서 기어이 에프를 주시겠다지 뭐야, 졸업해야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병나발을 불던 선배, 교수님께 가서 빌었던 선배의 이야기가 떠오르며 제 가슴을 훑고 지나간 건 또.......웬.................

 

존경하는 당신

이제 이 메일의 발신의도를 아시겠는지...요. 종강직후 차마, 바로 당신께 할 수 없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말만은 당신께 하지 않으려고 그렇게나 노력했건만.

지금도....이 말을..........당신께......꼭, 해야 하는가........?

몇 번이고 제 자신에게 되묻게 됩니다. 내뱉고 나도 당신께서는 꿈쩍도 안하실 수 있죠.

그래도,용서,하세요.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저 역시 한 학기 등록금이 오리무중될 것 같으니.

소주병을 불던 예비역 오빠, 교수님께 무릎꿇고 빌었던 선배.....그래요.....제가...바로, 그 선배들 아닌가요?

존경하는 당신.

노여워만 마세요. 저 역시 제 성적에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다시 새내기로 돌아가 이야기하면 저는 김준기 교수님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좋은 김준기 교수님은 저에게 C+을.....아니,아닙니다. 이 얘기는 하는게 아니지요. 글을 더 쓸 수가 없군요. 내일이 당신의 시험입니다. 책이라도 한번 보자고 동기가 부릅니다.

 

다시 펜을 들면서 저는 참담함을 느낍니다. 이미 본 시험지가 눈에 어른거려 글을 못 끝낼 것만 같습니다. 성적입력 마감일이 이제 겨우 하루 남았습니다. 제가 항의메일을 보내기도 전에 당신은 마감을 할 것입니까? 정녕 하루 후면 이대로 성적마감이 되는 것입니까?

 

김준기 교수님께서도 그러셨죠. 그렇다고 제가 교수님께 무슨 대거리를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성적이 뜬 후 전화를 드리자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너는 출결이 엉망이라 안돼....라고.

 

존경하는 당신!

........성적을 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이 성적은, 저를, 저 자신을 반성하게 돼요. 자기를 들여다봐야 하다니요? 싫습니다! 저는 지쳤어요. 그것만이 우리 삶의 다라고 여길 수 밖에 없는 불편한 부분이 제 마음에 흐르고 있어요. 복학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복학한 이상 이미 저는 그 불편함에 의해 끔찍해져 있는 겁니다. .........성적을...성적을 보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것밖에 달리 제 마음을 어떻게 쓴단 말인가요. 어머니에게 이미 한 대 맞은 것 같이 쓰라려옵니다.

 

지금.....막, 성적입력 기간이 지났습니다. 순간, 숯불이 얹혀지는 듯한 뜨거움이 가슴에 치받쳤습니다. 이 치받침은 매우 익숙한 것입니다. 4년간 성적표를 확인할 때마다 이 치받침을 느꼈고 또 금세 잊었습니다. 나에겐 오히려 동무같은 감정이에요.

혹시나 하여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당신은 정말 이대로 마감을 하는가? 바꿀 수 있는 기회는 없는가?

전화는 당신 조교가 받더군요. 지루한 목소리였습니다. 당신 이름을 또박또박 대며 바꿔 달라고 했을 때만도, 당신이 이대로 마감했는가? 가슴이 불덩이 같았어요. 당신 조교가 내뱉는 말이 들리더군요.

교수님, 안계시는데요.

 

저는 가만히 수화기를 놓았습니다. 당신, 벌써 퇴근하셨더군요. 퇴근. 조용히 그 단어를 읊조려 봤어요. 허무한 단어. 방문을 열어보니 여름방학을 알리는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이 메일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땐 성적을 제가 조정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답니다. 이토록 안되는 것을 모르고서 저는, 이 메일을 통해 제 성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나봅니다.

바깥의 기온은 점점 올라갑니다. 저는 다시 한번 당신의 수업을 들어야겠지요. 그때쯤엔, D라는 학점도 제 가슴에서 아련해질는지, 안녕.

 

 

 

 

 

 

 

 

 

 

이걸 읽고 나서, '신경숙체' 혹은 '풍금체'가 돋아서 그 친구와 네이트온으로 '....'가 점철된 대화를 나눴습니다. 말줄임표랑 쉼표 많이 쓰고

상대방을 '당신'이라고 부르며 말하다가 멈칫, 하면서 '아니.....아니지요...' 혹은 '아니.....아닙니다....'하는 게 포인트예요. 국문과끼리만 칠

수 있는 개그가 있는데, 이런 거 너무 좋아요. 같이 엠티카서 카프놀이 한다든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산문시 읊기 이런 개드립ㅋㅋㅋ

어제 등업됐는데 저 글 너무 자주 쓰는듯-_- (나비야 제비야 깝치지 마라) 너무 할일이 없어요. 책이나 골라봐야지.

 

그, 그리고 재미 없........으셨으면 죄송( ..) 참고로 친구는 저 과목에서 A+를 받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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