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 내게 무해한 사람 중

2019.07.14 21:50

Sonny 조회 수:850

이 단편선의 제목인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는 구절이 나온 단편입니다. 미주가 진희를 바라보며 속으로 흘린 말이죠. 내게 어떤 상처도 줄 수 없고 주지도 않으려 하는 사람. 그러나 책의 뒷장에 나온 글귀만큼 마냥 달콤한 말은 아닙니다. 무해한 당신은 단 하나의 해도 끼치지 못할 만큼 너무 착하고 연약해서 어쩔 수 없이 타인에게 주고 마는 그 가해들을 모조리 자신에게 되돌려 삼켜버렸다는 의미이기도 할 테니까요. 진희는 정말 그런 사람입니다.


저는 이 소설의 구성에 대해 좀 생각해보게 됩니다. 정작 나레이터인 "나"는 따로 있고 그는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미주의 고백을 듣습니다. 미주는 고등학교 때 친구였던 진희와 주나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미주와 주나는 진희의 고백을 제대로 들어주지 못했습니다. 후에 진희와 주나는 서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나레이터인 "나"는 홀로 고백합니다. 그가 대학교에서 미주를 가장 열심히 생각했던 계기는 미주가 무당에게 소리쳤던 일 때문이라고. 두 명의 청자를 두고 용기를 냈던 고백은 이내 일 대 일의 조금 더 외로운 고백으로, (왜냐하면 이전에는 셋이었지만 이제는 둘이 되어버렸으니까요) 그리고 그 고백은 당사자도 그 당사자를 들어주지 못했던 또 다른 공범도 없이 외롭게 무당을 붙잡고, 이제는 시간이 흘러 그와 무관한 다른 남자 한명에게 향합니다. 제대로 통하지 못했던 고백은 이내 미움으로 그 성질을 바꾸며 뾰족하고 날카롭게 변해 반사되다가 시간에 무디어져 삭힌 슬픔으로 완만해진 채 타인에게 흘러갑니다. 그리고 그걸 듣는 "나"는 신에게 고백하고 신의 목소리를 듣는 신부님입니다. 미주의 고백을 들으면서 "나"는 곱씹습니다. 피조물을 믿지 말고 신의 말씀을 들으라지만, 그래도 불완전한 피조물에게 기대고 싶고 기대어야 해소되는 외로움이 있다고. 신을 사랑하고 받들어야 하는 "나"는 신에게 인간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며 외로워집니다. 신도 품어주지 못하는 외로운 고백이 돌고 돌다 인간들의 부질없는 노력 안에서 갇혀있는 것 같습니다.


주나는 "병신"이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지만 친구를 위해 거침없이 싸워주고 뜨거운 정을 베푸는 친구입니다. 진희는 그와 반대로 늘 여리고 섬세한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친구입니다. 그 두 사람이 다른 만큼 둘과의 우정도 각각 결이 다른 걸 느낍니다. 다수와의 우정을 이렇게 표현한 게 너무 적확하다 느꼈어요. 저 역시 고등학교 때 4인방이라 불리는 친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어떤 친구와는 좀 데면데면하고, 어떤 친구와는 다른 친구들에게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고, 어떤 친구와는 또 다른 진솔한 이야기를 하고, 그랬거든요. 결국 인간은 일 대 일로 서로 이해할 수 밖에 없나 싶습니다. 그 밀접한 관계가 다수 안에서는 또 남는 한 명에게 어쩔 수 없는 외로움을 주고 마는 것도 있고.


진희는 미주와 주나에게 고백합니다. 자신은 사실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라고. 주나는 역겹다며 자리를 떠납니다. 미주는 그런 진희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지금이야 퀴어의 개념이 전보다는 보편화되었지만,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저 이상하게만 느껴졌을 청소년기에는 그 고백을 받아들이기 힘들지 않았을까요.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요. 제가 이렇게 말하는 건 미주와 주나를 변호하는 게 아니라, 저 자신도 개념에만 익숙하지 실생활에서는 퀴어라는 존재를 받아들이는 데 힘들 것 같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주가 진희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제가 저지를 것만 같은 실패를 간접체험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아마 그 개념을 몰랐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도 몰랐다면 저도 저런 상황에서는 똑같이 반응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리고 인간의 부족함은 때론 변명이 되지 못합니다.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걸고 낸 용기일테고 그걸 헤아리지 못하면 고백에 걸었던 용기, 즉 목숨을 판돈으로 지불하게 될테니까요. 괜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 누가 무슨 고백을 하든 내가 듣는다면 이해하지는 못해도 떠나지는 않는 피조물이 될 수 있어야겠다고. 저는 제가 고백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누군가의 솔직함에 당사자보다도 더 큰 무게를 느끼곤 하는데, 아무리 제가 부담스럽고 조심스러워해도 말을 담아왔다 건네준 당사자보다는 못할 겁니다. 아마 소설 속에서 진희는 더욱 그랬을 겁니다.


그 다음 내용을 읽으면서 최은영 작가의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발견하고 좀 고마웠습니다. 누군가와의 이별을 함부로 죽음이란 단어로 정의하지 않으려는 마음씨에 그래도 작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미주는 차마 그 단어를 입에 올릴 수 없었을 겁니다. 저 역시도 갑자기 이별하게 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를 볼 수 없는 현재를 특정한 단어로 개념화하는 걸 좀 꺼리게 됩니다. 그냥 어떤 선택은, 다른 이들에게 오랫동안 낫지 않을 상처로 남습니다. 온전한 고백을 크게 하나로 받아서 가슴에 품지 못했을 때, 부숴진 조각들은 기억 속에서 계속 흐르며 온 몸을 찌르다가 어느 순간 분노나 슬픔을 피토하듯 꺼내게 하는 게 아닐까요. 미주와 주희의 재회도 언젠가는 뱉어내야 했던 핏덩어리 기억의 계기였을지도 모릅니다. 나 때문에, 너 때문에. 미주는 주희의 매몰찬 언어를 기억하지만 주희는 미주의 굳은 얼굴을 기억합니다. 둘 다 굳게 믿고 싶어했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누구도 진희를 안아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고백을 들어주지 못해 후회하는 사람의 고백을 "나"는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된 것일까요. 제 때에 닿지 못한 고백은 신이 귀를 기울일까요. 미주는 말했습니다. 너는 나를 동정해서 너랑 사귈 수 없다고. 그건 모욕이라고. 상처를 줘서 생긴 자신의 상처에 섣부른 위로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일까요. 저는 앞서 남긴 제 결심이 부질없는 것은 아닐지 다시 의심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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