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이 누군지 제작진이 어떤지 그런건 전혀 모르고
예전에 티비 채널 돌리다, 영화 소개 프로에서 이 영화를 소개하는데
조정석이 타는 목마름으로를 부르더군요.
그 뒤로 머리속에는 남겨두고 있다가, 1987 보기 전에 봐봤습니다. 그때 마침 iptv 무료영화에도 있길래.


제목은 저래 써놓았지만 1987과 비교할 만한 영화는 아닙니다. 수준 차이 뭐 그런 재수없는 말은 아니고, 그냥 다른 영홥니다. 이 부분은 설명이 불필요한 것 같네요.

서두에 감독이 누군지 제작진이 어떤지 모른다 운운한 것은 미리 변명을 뿌리는 의도입니다. 제가 틀려도 좀 덜 쪽팔리고자.
운동권 출신이 만든 영화같아요. (틀릴지도)
굉장히 즐겁게 만든것 같습니다ㅎ. (틀릴지도)

솜사탕에 물감 찍어 그린 그림같습니다. 결과물은 차치하고 화가는 재밌게 그렸을것 같아요. 좋아하는, 좋아할 만한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소룡, 짜장면, 순애보, 젊음과 뜨거운 열정들
그리고 민주주의! 아, 민주주의여. 타는 목마름으로 불러봅니다.


얼마전 어떤 시사프로에서 미 문화원 점거 사건을 좀 거칠게 말해 “만만해서” 라고 표현하더군요. 미국에 의지는 전달해야 하겠고, 대사관 같은 곳은 너무 쎄니깐 선택한 게 문화원이란 말이었습니다. 하기사 영향력이야 대사관이 당연히 크겠지만 현실의 벽이란 것이 너무 높습니다. 미군한테 총맞아 죽은 민주투사가 나왔을 지도 모르죠.

영화도 대체로(아마 당시 현실보다 훨씬 더) 만만하게 진행됩니다. 거창한 이념과 정의를 노래하지만 동사무소 직원같은 사람들 쫓아내고 얼굴 뽀얀 전경대를 절권도로 무찌르는 시위대에게서 비장함을 느끼긴 어렵습니다. 경찰 수뇌부는 나홀로집에 도둑 이인조보다 모자랍니다. 미국 쪽 인사로 영어 잘하는 사람 둘이 나오긴 하는데 영어 잘하는 거 말곤 기억이 안납니다. 약간 둘이 굿캅 배드캅 비슷한 기믹인데, 희미하네요. 한국말을 잘하는 할리 아저씨가 더 기억에 남아요.


동사무소같은 문화원 건물을 점거한 시위대는 이제 바깥의 적들이 하도 만만하다보니까 안에서 피끓는 의기도 나누고 프락찌도 잡아보고 사랑놀이도 조금 합니다.
이 중에 주인공 철가방(배우도 배역도 이름이 기억이 안나서 일단 철가방으로 지칭하겠습니다)이 전면에 나오는 장면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장면들이 “운동권”의 언어로 점철되어있습니다. 투쟁, 민중, 혁명 기타 등등등.
이들이 이 말들을 그냥 알아서 아는 것인지, 삶과 경험으로 체득하고 발화하는 것인지, 작품 분위기상 전자 쪽으로 의심이 들긴 하지만, 최소한 마음은 진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외침이 어딘지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열정적인 턱수염 투사가 논리와 정의로 무장한 자신의 이념을 읊어도 철가방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철가방이 가방끈이 짧아서
보다도 저는 말이 올바르게 “번역”되지 못해서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나중 가면 이 언어를 가지고 쁘락치 색출도 합니다.
이 언어가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가 됩니다. 우리는 안에, 쁘락치는 밖에. 근데 이렇게 나누고 나니, 우리 철가방도 밖에 있군요.
물론 일단은 밖의 사람이 맞습니다만, 그렇게 밖에 두어도 되는 사람인지. 원래는 그 혁명이라는 것이 진짜로 향해야 하는 곳에 선 사람이 아닌지.


비꼼, 혹은 자조 그런 것을 저는 이 영화에서 느낍니다.
비꼼이면 그건 좀 못된거 같아요. 현대를 살면서 민주화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함부로 당시의 삼엄한 시대에 힘껏 소리치고 다녔던 사람들을 평가하면, 안되는건 아니지만 좀 그래요. 할려면 최대한 세심하고 조심하게 접근하는 게 그 시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자조라면, 그러니까 그 “안”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그러면 이해가 됩니다. 좋은 뜻과 선량한 의기로 행동했지만, 경직된 논리와 닫힌 언어로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가가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우리가 우리의 슬랭으로 우리를 확인하는 모습은 주인공 철가방과 박철민 철가방이 철가방의 슬랭으로 그들의 철가방을 확인하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삶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짜장면 향기 나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청춘과 의기 그 알량한 자부심으로 거만하게 노래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까, 혼자 상상해봅니다.


영화가 끝날때가 되면은 내내 가만있던 경찰도 아 영화 끝날 때 됐구나 하는 걸 어떻게 또 알고 본격적으로 진압을 하네요.
만만함은 끝났습니다. 백골단이 등장하고 열뻗친 전경의 군홧발이 기다립니다.
약오르게도 핵심 인물들은 다 빠져나가고 철가방이 남은 일을 감내합니다.
민주도 노동도 모르고 사랑만 아는 우리 철가방은 그 하나 아는 사랑때문에 열뻗친 전경의 군홧발을 온몸으로 맞이합니다.

철가방이 여대생에게 갖는 사랑은 일차원적인 “첫눈에 반함”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내면의 깊이를 알지도, 사상에 감화되거나 하지도 않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하게 좋아합니다.
농성의 와중에 철가방이 노동자의 권리를 깨닫고 민주화의 대의를 알게 되는 일도 없습니다. 혁명의 깃발을 같이 휘두를 생각 같은게 갑자기 생기진 않았을거예요.

혁명은 모르겠고 너가 좋아서. 영화 시작할 때의 이 마음을 영화 끝날때까지 가지고 갑니다. 그 마음 하나로 닭장차에 대신 오릅니다.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허공에 공허하게 말을 뿌리는 운동가는 자리를 지키는 민중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민중이 그들을 지켜주는 이유는, 사실 혁명은 잘 모르겠고 좋아서. 사랑해서. 안 맞고 안 괴롭힘당했으면 싶어서.
이런 진솔한 가치는 잘 오염되지 않지요.


영화의 약점은 만만함 그 자체입니다. 영화가 시대를 만만하게 그리니 관객도 영화를 만만하게 보게 됩니다.
마지막에 이르러야 현실 비슷한 것을 끄집어내지만, 많이 늦어보여요.
코믹한 장면은 노골적이고, 종종 무리수다 싶게 튑니다. 너무 대놓고 웃기려고 노력하다보니, 여하간에 제가 깔깔거리며 본 장면은 없습니다.


솔직히 재미없게 봤습니다. 그래도 싫어하진 못하겠네요.

글 쓰던 중간 즈음부터 주인공 배우가 김인권이었다는 걸 기억해냈는데, 그냥 두겠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66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811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315
121461 [아마존프라임바낭] 안 웃기고 몹시 긴장되는 코미디, '이머전시' 잡담입니다 [4] 로이배티 2022.11.06 427
121460 프레임드 #239 [6] Lunagazer 2022.11.05 146
121459 [아마존프라임바낭] 또 속았다!! 하지만 재미는 있는 '데블스 아워' 잡담 [6] 로이배티 2022.11.05 3119
121458 [謹弔] 만화가 정훈(1972~2022) [14] 예상수 2022.11.05 1072
121457 태극기 휘날리며 (2004) [1] catgotmy 2022.11.05 264
121456 이번생은 처음이라 [3] singlefacer 2022.11.05 502
121455 이태원 참사 사건의 비한국인 희생자 유족이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2] Sonny 2022.11.05 1064
121454 에놀라 홈즈 2 밀리바비브라운,헬레나본햄카터,헨리카빌 [1] 가끔영화 2022.11.05 445
121453 [탑골바낭] 2002 월드컵 20주년(엠비씨 다큐) [1] 쏘맥 2022.11.05 244
121452 오늘 올라온 OTT 해외 신작영화들 [2] LadyBird 2022.11.04 533
121451 넷플릭스에 올라온 '얼라이브' 잡담 [7] thoma 2022.11.04 562
121450 엔드게임 멀티버스 예상수 2022.11.04 188
121449 프레임드 #238 [9] Lunagazer 2022.11.04 169
121448 이태원 참사 중 경찰 인력 배치에 미흡했던 정부 외... [7] Sonny 2022.11.04 931
121447 [왓챠바낭] 간만에 본 J-스릴러 '작년 겨울, 너와 이별' 잡담 로이배티 2022.11.04 308
121446 복수는 나의 것 (1979) catgotmy 2022.11.04 296
121445 근조리본소동의 본질은 뭔가요? [8] 첫눈 2022.11.04 866
121444 (스포) [블랙아담] 보고 왔습니다 [4] Sonny 2022.11.03 507
121443 에피소드 #9 [5] Lunagazer 2022.11.03 152
121442 “토끼머리가 범인”유언비어 퍼트리던 놈들은 털끝도 안건드네요? [1] soboo 2022.11.03 681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