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톡방에 오른 내 사진

2019.02.24 11:24

어디로갈까 조회 수:1992

사진 찍히는 일을 병적으로 싫어합니다. 자기 부정 혹은 자기 소멸의 감정이 지배적이었던 사춘기 시절부터의 염오인데, 대학 졸업앨범 사진도 찍지 않았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졸업여행 때의 단체 사진이 실려 있어서 아차! 시무룩했던 기억이...)
약간 나아지기는 했지만 지금도 누군가에게 기습적으로 찍히는 경우 외에 스스로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은 드물어요. 여권 갱신할 때마다 사진 찍기 위해 한달은 한숨을 쉬며 미루죠.
거창하게 말하자면, 존재의 무근거성을 무모하게 앓는 성향이어서 사진에 의탁하여 존재의 형식을 세울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이런 저의 증상을 막내는 이렇게 분석한 바 있어요.
"그건 누나가 나르시스트라는 반증인 거야. 좋게 말해서 자기 자신에게 보이는 것으로 족한 부류인 거지.  스스로에게 담담한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사진을 찍고, 공공 장소에서도 거침없이 거울을 들여다 보는 법이야."

날카로운 간파지만, 반 정도만 동의해요. 어깨를 반듯하게 펴고 지평선 너머를 주시하고 있지는 못하다 해도, 제가 자기 손바닥만 들여다 보고 있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착각 없이 어떻게 삶을 지속하겠어요~) 
그러나 아무도 없는 방에서, 밤중에 혼자 거울을 보는 종류의 사람이란 건 아마 사실일 거예요.

2. 좀전에 회사 단톡방에 들어갔더니 제 사진 몇 장이 떠있더군요. 누군지 알아보는데 삼,사 초 걸렸습니다.
어제 dpf의 생일파티 때 찍힌 사진이었어요. 와인 두 병을 비운 시점이었고, 옆자리의 누군가와 한참 논쟁 중인 참이었습니다. 
건너 편에 앉아 있던 그가 갑자기 이름을 불러서 고개를 돌렸더니 카메라로 절 잡고 있더군요.  몰두해 있던 대화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정신이 카메라를 향해 '어어... 지금 뭐하는 거야?' 묻고 있는 벙찐 표정이 적나라하게 잡혀 있었어요.

솔직히 제가 그렇게 맹한 눈 표정을 가지고 있는지 지금껏 모르고 있었습니다. 친구들과의 눈싸움에서 한번도 져본 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꽤 형형한 눈빛이지 않을까,라고 마음대로 착각해왔어요.
한 동료는 '난로가에서도 추워서 꿈벅댈 것 같은 눈'이라고 짐짓 시적인 표현을 달아뒀던데, 한마디로 잘라 말하자면 '아무 생각없이' 세상을 사는 자의 눈이었어요.

어제 dpf는 로마 병정을 컨셉트로 한 페이스 페인팅을 하고 파티장에 나타났습니다. 검은 물감으로 사악한 얼룩을 덕지덕지 만들어 넣자, 
예상 외로 그의 얼굴은 우리의 손이 닿지 못할 아름다운 무엇이 되었어요. 저너머의 (au de la) 어떤 것. 
(그래도 넌 나의 응징을 면할 수 없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415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963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582
121484 용팝. 선물 전용 계좌 개설. 정말 듣도보도 못한 발상이군요. [26] Jade 2013.08.27 5461
121483 주상복합 계약했습니다. 서울에서 집을 산다는 것은...으아아 [26] 시간초과 2011.05.24 5461
121482 이건희가 죽든 말든... [25] 머루다래 2014.05.16 5460
121481 신입생의 패기 [18] 화려한해리포터™ 2012.08.06 5460
121480 곱순씨는 왜 꽃구경을 가지 않느냐는 질문에 생각 난,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한 장면 [30] 라곱순 2013.04.22 5460
121479 행정고시 빽쓰는 거 걸린 사진 [14] 머루다래 2011.10.13 5460
121478 명동교자 칼국수 [14] 01410 2010.09.15 5460
121477 너구리가 사람을 공격하는 경우가 흔한가요? [16] sent & rara 2010.09.08 5460
121476 오만해진 앤 헤서웨이? [16] 월요일 2013.06.03 5459
121475 박원순 시장, “가든파이브, 귀곡산장 같아 … ” [17] chobo 2012.04.18 5459
121474 교황이 어그로 끄네요 [57] ricercar 2014.09.02 5458
121473 “수정란 착상을 막는 응급피임약은 사실상 낙태”(경향신문) [40] catgotmy 2012.12.10 5458
121472 싸이, 오늘 엘렌 쇼 라이브 (잘리기 전에 보세요) [11] espiritu 2012.09.20 5458
121471 안철수 출입기자가 페북에 올린 글이라네요.- 수정 (문재인 출입기자입니다) [28] 마르세리안 2012.11.18 5458
121470 엄지원 열애 인정 [10] @이선 2013.07.15 5457
121469 베를린 별로에요 [18] magnolia 2013.01.31 5457
121468 제가 나름 무한도전 8년 팬인데 [5] 닥터슬럼프 2014.06.07 5457
121467 듀게 최고 인기 외국 남배우는?(조토끼 vs 코선생 vs 셜록) [50] 자본주의의돼지 2012.01.11 5457
121466 날도 더운데 "병"으로 시작하는 x맛, x림픽, x신 등등에 대한 짜증돋는 지적글 [38] mithrandir 2012.08.03 5457
121465 결국 애플과 스티브잡스는 옳았다. [29] 무비스타 2011.02.23 545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