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다리를 보며

2022.10.10 20:56

Sonny 조회 수: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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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름날 동대문역 근처를 산책하다가 이상한 건축물을 보았다. 안내판에는 이 전에 있던 대교를 철거하고 일부러 남겨둔 부분이라고 적혀있었다. 그걸 알고서도 알 수 없는 감흥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슬프다거나 웅장하다는 감정적 영역은 아니었다. 현재의 내가, 현재의 남겨진 건축물을 보며 과거에 이끌려가는 시간적 감각에 더 가까웠다. 한때 완성된 채로 사람들이 이용하던 대교가 이제는 흔적만이 남았다는 사실에 시간의 위력을 상기했다. 이것을 사건의 인과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시간은 어떤 식으로든 사건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시간 앞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그 무엇이든 소멸하고 폐허로 남는다.


저 철골물의 유해를 왜 나는 있는 그대로의 현재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이제는 그저 유적으로서 남아 과거를 알리는 그 본분을 다 하고 있음에도 나는 기어이 저 남아있는 부분들에서 과거의 전체를 그리려고 애를 썼다. 원래는 더 커다란 것들이 저 작은 다리들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듯이, 희뿌옇게나마 저 다리의 과거를 복원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나의 의식은 저 다리의 과거로 소환되고 말았다. 현재는 늘 지금이라는 시간으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어떤 순간은 현재를 못박아놓고 미래를 그 부속품으로 만들어버린다. 이것이 혹시 우리가 육체의 젊음과 늙음을 인식하는 시간적 개념은 아닐지. 완성된 것, 창창한 것, 기능하고 있는 것만을 "현재"로 인정하는 이 오만은 최후의 저항일지도 모른다. 시간의 비가역성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그 때 그 순간으로의 회귀를 꿈꾼다.


과거와 현재 사이의 초현실적 감각이 도리어 내 안의 우수를 몰아내었다. 과거에서 현재로 금새 제자리를 찾아온 내 의식은 남아있는 저 다리에 꽂혔다. 풍화의 때와 그을음이 깔려있음에도 남은 다리들은 그 자체로 육중했다. 만약 저 다리들이 저렇게 굳건하지 않았다면 습한 상념이 내 안에 끼어 울적해지진 않았을지. 거의 전체가 소실되었음에도 남아있는 부분이 있기에 아직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 앞에서 존재는 존재를 증명한다. 가루가 되지 않았다면 존재는 시간 속에서 직립하고 있는 것이다. 부분에서 전체로, 현재에서 과거로 역행하는 의식은 존재의 본능이 아닐까. 시간이라는 위협 앞에서 어떤 형태로든 남아있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곧 현재를 놓치지 않은 필멸자들의 위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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